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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군자 Mar 21. 2021

파잔, 코끼리를 길들이는 성인식

코끼리처럼 인간도 길들이다.

Photo by Cristofer Jeschke on Unsplash


태국에는 코끼리 관광상품이 성행한다. 코끼리 등에 탄 채로 산책 경로 한 바퀴를 도는 게 대개의 관광코스이다. 여기 사용되는 코끼리는 사람을 위협하지 않으며 반항 한 번 없이 코스를 완주한다. 관광에 사용될 코끼리를 훈련시키기 위해 어린 코끼리에게 시행하는 태국의 전통의식이 있다고 한다. '파잔(Phajaan)' 일명 코끼리 성인식. 이는 아주 잔인한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파잔을 위해 선택되는 코끼리는 생후 2년이 되지 않은 새끼 코끼리이다. 70년이라는 사람에 버금가는 코끼리 수명을 생각하면 2살 배기 어린이나 마찬가지이다.


어미에게서 새끼를 강제로 떼어놓는 걸로 시작해 무려 열흘간 우리에 넣고 가둔다. 나무 우리는 코끼리 몸에 꼭 맞는 크기에 밧줄까지 온몸을 묶고 있어 여기 갇힌 코끼리는 앉지도, 고개를 돌리지도 못하며 말 그대로 옴짝달싹도 못하게 된다. 이어서 열흘 동안 몽둥이로 때리고, 쇠꼬챙이로 피가 나게 찌르는 학대가 계속된다. 그야말로 끝없는 고문이다. 이 과정에서 코끼리는 식음을 전폐하기도 하고 목숨을 잃는 경우도 상당수라고 한다. 이유 없이 긴 시간 큰 고통을 겪으며 코끼리의 자의식은 완전히 무너진다.


이 잔인한 행위를 거치고 나면 코끼리의 야생성은 사라지고 완전히 인간에게 복종하게 된다. 성년이 되어 아무리 덩치가 커지고 힘이 세져도 변하지 않는다. 그럼 코끼리는 사람을 등에 없고 70년이라는 긴 수명 동안 복종하며 일하게 된다.  지금도 태국 코끼리 4분의 1이 이 의식을 거친다고 한다.


인간의 쓸모를 위해 코끼리에게서 스스로 생각하는 법과 자유의지를 박탈하는 것, 그 과정에서 야만적인 폭력과 억압을 주는 것이 파잔의 본모습이다. '성인식’이란 고고한 이름으로 치장했지만 코끼리가 진정한 의미에서 성숙한 성년이 되기를 바라는 의식이 아니다. 자신을 잃어버리고 무조건 복종하는 노예로 만드는 게 목적인 악습에 불과하다.


꼭 닮은 어떤 문화가 우리나라에도 있었다. 신입생 신고식, 신입사원 신고식, 일명 ‘신고식’. 여기서 '신고'는 조직에 들어옴을 신고한다는 의미이다. 국내 굴지의 대기업들은 대부분 신입사원 공채가 끝나면 며칠간의 신입사원 교육일정을 갖는다. 코로나 시기와 채용 감소가 맞물려 대규모 신입사원 모집이 줄어들면서 자연스럽게 언택트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는데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일주일 이상 숙박하며 단체 교육이 이루어졌다. 여기서 교육은 단순히 학습을 뜻하는 게 아니라 몸도 쓰고 머리도 쓰면서 경쟁이 맞물린 여러 프로그램을 이수하는 것이다.


"기합이 작습니다!! 여러분의 열정이 이것밖에 안됩니까! 실패입니다!"

"왼쪽 뒤! 소심한 동작 뭡니까! 크게 안 합니까?!!"

"한 명이 틀렸습니다! 협동이 안됩니다! 다시 도전하세요!"


입사한 기쁨도 잠시, 이전 회사의 연수 마지막 프로그램이었는데 회사 이념과 슬로건을 나열한 흡사 100명의 위인들 같은 3분짜리 노래와 이에 맞춘 율동까지 완벽하게 숙지하는 미션이었다. 노래는 최~대한 큰 소리로. 율동은 5명의 팀 멤버가 단 한 번도 틀리지 않고! 단, 3분이 아닌 1분이라는 시간 이내에.  틀리면 몇 번이고 다시 도전해야 한다. 땀이 뻘뻘 나고 지쳐 다리가 후들거린다. 200명이 넘는 신입사원 팀들 중 9시가 다 되어가는데 아직 단 하나의 팀도 통과하지 못했다.


"다시! 도전하겠습니다!!"

팀원 5명이서 틀리면 나 때문인 거 같아 미안해하고, 목소리와 동작이 작다고 지적받은 사람에 대한 티 안나는 원망의 눈길이 오간다.


"쟤네 어떻게 통과했대?"

"들어갈 때 미친 듯이 소리 질렀대, 우리도 완전 크게 소리 지를까?"

"저 팀보다 우리 목소리가 더 큰데! 왜 통과 안 해주는 거야?"


다수에 대한 원망과 짜증, 다른 팀에 대한 질시와 부러움이 곳곳이 퍼지는 시간들을 지나 저녁 10시가 넘어가자 하나 둘 통과하는 팀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의미 없는 공허한 가사와 우스꽝스러운 박수와 몸짓이 연결된 안무를 외우면서, 이해할 수 없이 계속 실패라는 결과를 받지만 그래도 통과하기 위해 계속 최대한 소리를 지르고 할 수 있는 가장 큰 동작으로 춤을 춘다.


"여러분이 보여주신 협동심과 열정이 멋졌습니다! 패스입니다!"

성공했다고 좋아하는 팀원들과 같이 좋은 척 웃으며 자리로 들어왔지만 깊은 불쾌함에 속이 씁쓸했다.

'저녁 10시 시작, 11 마감이었네.'


실패표를 주는 데는 이유가 없다. 누가 틀렸다거나 목소리가 작다는 제멋대로인 이유는 그냥 핑계일 뿐. 몸이 아프던 얼마나 지쳤건 간에, 목적과 의미 없이 고생을 하더라도 ‘알겠습니다.’하고 다시 시키는 대로 하는 것. 일명 ‘까라면 깐다.’를 내재시키는 게 목적인 교육이기 때문이다.


코로나 시기와 채용 감소가 맞물려 대규모 신입사원 모집이 줄어들면서 자연스럽게 이런 교육 문화도 사라져 가는 듯하다. 하지만 지금 회사에서 일하고 있는 대부분의 구성원들, 특히 윗세대들은 이 문화를 거쳐온 사람들이다. 새로 들어오는 사람들이 어떻든 회사의 문화를 구축하고 있는 건 오래 머물러온 기성 조직원의 몫이 크다.


대학이나 회사에서 신입들에게 장기자랑을 요구하는 문화도 마찬가지이다. 넘치는 끼를 주체 못 하고 이를 발산하기 위해 신입들 스스로 나서서 뽐내는 자리가 된다면 예외겠다. 하지만 대부분은 지금까지 다 그래 왔으니 너도 굴욕을 참고 술자리의 찰나의 유흥거리를 맡으라는 식으로 진행된다.


조직문화의 첫 교육, 첫 신고식이 “아무리 싫어도 참고 군말 없이 수용하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라는 건 의미심장하다.  첫 교육에서 주입된 복종 문화는 회사의 업무 방향성이란 큰 결정이나 자잘한 심부름 같은 작은 순간 속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있다. 반복된 일상 속 작은 ‘참음’과 ‘침묵’ 이 쌓인 뒤 무조건 수용하는 것에 익숙해진 회사원들은 결국 스스로 생각하는 능력은 사라지고 무조건 복종하는 회사 인간이 되어버린다.


집채만 한 코끼리마저 발아래 두고 평생 사람을 엎고 다니는 유흥거리로 만들어버린 인간들. 회사는 조직문화라는 이름 속에 사람마저 반항하지 못하는 집코끼리로 만들어버린다. 스스로 생각하는 능력을 잊고 있는 건 아닌지 꾸준히 의식하려고 노력하자.  그렇지 않으면 어느 순간 우리도 완전히 길들여질 테니까.





참고자료

[2019 창사특집 다큐멘터리 휴머니멀] '파잔'

https://www.youtube.com/watch?v=k92doQ5EtPQ&t=93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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