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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군 Nov 04. 2021

소리도 없이, 2020

소리도 없이 우리는 가까워질 수 있을까?

태인은 말을 하지 않는다. 하지만 살아가는 데는  지장이 없다. 어차피 세상은 정해진 역할에 따라 순조롭게 진행된다. 사람을 죽이는 역할, 죽은 사람을 치우는 역할, 아이를 유괴하는 역할, 아이를 데리고 있는 역할, 아이를 팔아 넘기는 역할까지 빽빽 차있다. 여기서 태인이 맡은 역할은 역할을 바꾸는 시도를 하는 역할이다.


태인은 자신을 어렸을 적부터 돌봐준 창복 아저씨를 따라 트럭에서 계란을 판매한다. 그리고 부업으로 조직과 연계하여 잡혀온 사람을 매달고 죽으면 시체를 묻어 주며 일당을 받는다. 어느 날 창복과 태인에게 일을 주던 실장이 조직에 밉보여 사망하는 역할로 잡혀온다. 실장이 죽기 직전, 몸값을 받기 위해 유괴한 초희라는 11살짜리 여자애를 창복과 태인에게 맡기면서 각자 맡은 바 역할에 따라 돌아가던 세계는 뻐거덕대기 시작한다.



남의 것을 탐하면 불구덩이에 빠진다고 하지 않았냐.

실장을 자꾸 흉내내는 태인을 보고 창복이 내뱉은 말이다. 이 말은 결국 자기실현적 예언으로 나타난다. 유괴된 아이를 맡고 싶지 않았던 창복이 결국 돈을 받아오는 역할까지 맡게되면서 창복은 주말에 예배를 빠진 대가를 치른다.


자기 제시는 다른 사람의 삶에 미치는 통제력을 전략적으로 얻는 방법이자, 비용을 최소화하면서 보상을 늘리는 방법이다.(Jones & Pittman, 1982; Schlenker, 1980)



자신이 유괴된 줄 알고 있는 초희는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해 살아남으려 노력한다. 말을 하지 않는 태인과 방치된 채 살아가고 있는 태인의 동생 문주에게 필요한 게 무엇인지 재빠르게 파악하고 그들의 삶에 끼어든다. 어질러진 집을 청소하고, 고장난 식탁을 고치고, 문수를 씻기는 등 부모님이 수행해야 할 역할을 연기하며 원하는 것을 얻고자 한다. 연기를 한다고 그 사람의 행동을 모두 거짓으로 판단하는 건 심각한 오류를 초래할 수 있다. 그래서 때론 직접적으로 물어보거나 말을 해야 진실과 거짓을 구별할 수 있을 때가 찾아온다. 하지만 태인은 말을 하지 못한다. 그래서 결국 태인은 유괴범이자 초희를 인신매매꾼에게 팔려고 했던 사람이고, 초희는 집에 돌아가기 위해 유괴범의 호감을 산 똘똘한 인질로 남게된다.


근데 왜 태인은 마지막에 손을 놓지 않으려고 했을까?



태인이 초희를 학교로 데려간 날, 운동장에서 선생님을 발견하고 뛰어가려던 초희의 손을 태인은 놓지 않는다. 태인은 표면적으로 유괴범에, 경찰도 죽이고, 같은 업계 사람들을 배신했으며, 삶을 이끌어주던 창복 아저씨를 잃은 상태였다. 무리하게 초희의 원래 역할인 초등학생으로 되돌리려 하지 않았다면 그의 세계가 그렇게까지 망가지진 않았을 것이다. 그러면 고맙다는 인사를 듣고 싶어서 손을 놓지 않은 걸까? 그렇지는 않을 것 같다. 그는 초희를 한 번 버렸다는 죄책감을 안고 있으니까. 다만 작별인사는 하고 싶었을 것이다. 태인은 아마 소중한 누군가를 떠나보낸 적이 처음이었을 것이다. 대부분은 만난 사람들은 죽어가는 직전, 창복의 말을 빌리면 사망하고 계시는 중인 이들만 만났다. 죽지 않은 사람과 작별하는 걸 배운 적이 없기에 손을 잠시 놓지 않는 걸로 대신한다. 초희는 그런 태인이 두려웠을 것이고, 태인은 다신 못 볼 초희가 그리웠을 것이다.

인류애를 다룬 영화라기에는 거창하고, 우정을 다뤘다고 하기에는 계층이라는 현실에서 충돌한다. 태인과 초희가 소리를 주고 받은 거라고는 박수 소리밖에 없다. 사람이 보이지 않는 곳에 내가 아직 옆에 있다는 안도와 안심을 주는 박수 소리. 너무 응축된 그 소리의 의미를 알아차리기엔 초희에게 조금은 긴 시간이 필요할지 모른다.


태인은 왜 양복을 입었는가?



태인은 앞서 죽은 실장을 처리하다 그가 입고 있던 양복을 따로 챙긴다. 그에겐 양복을 입고 한번쯤 폼나게 살아보고 싶은 욕망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도 그에게 그런 역할을 주지 않기에 그는 스스로 옷을 입고 역할을 부여한다. 하지만 사실 폼나게 사는 게 무엇인지 잘 모른다. 그가 양복을 입고 한 거라고는 초희의 세상을 돌려놓는 거 뿐이다. 그 과정에서 찢어진 양복처럼 그의 인생도 망가진다. 그런데 그걸 폼나는 삶이라고 할 수 있을까? 사람마다 평가는 다를 것이다. 하지만 타인의 삶을 돕는다는 건 대가 없이는 불가능하기에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집으로 되돌아가던 태인이 스스로를 멋있었다고 느꼈으면 좋겠다. 초희의 등장은 구원보단 파괴에 가까웠지만 태인의 삶에서 파괴된 건 엉망이었던, 영원히 머무를 뻔했던 현실이다. 태인에게 언젠가 아무 소리도 없이 가까워질 수 있는 사람이 다시 나타날 거라는 희망을 가져본다.



감독/각본 : 홍의정 / 배우 : 유아인, 유재명, 문승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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