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삶이 언제 시작되는지 아무도 말해주지 않는 거죠?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세상에 덩그러니 남겨진 수잔나는 글을 쓰고 싶었다. 사실 그녀는 남겨진 게 아니라 그 자리에 서 있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남들은 그녀가 서 있는 곳이 출발선이라고 했다. 수잔나가 다니던 졸업반 아이들은 그녀를 제외하고는 모두 대학교에 진학한다. 출발선에 남겨진 그녀를 바라보는 주위의 시선은 차갑거나 뜨겁다. 차가운 시선으로 바라본 이들은 그녀가 사회의 골칫거리가 될 거라고 생각했다.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본 이들은 그녀를 돈 들이지 않고 쉽게 가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수잔나는 자신을 따뜻하게 바라본 이들과 잠자리를 함께한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그녀는 여전히 제자리에 있다. 아무도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았기 때문에 멈춰있을 수밖에 없었다. 두통을 멈추기 위해 그녀는 보드카와 아스피린을 한 통 먹는다. 죽다 살아난 그녀는 클레이무어라는 정신병원에 들어간다.
수잔나의 진단명은 경계성 인격장애(borderline personality disorder)다. 설명에 따르면 ‘애착 능력 결함과 중요한 대상과의 분리 시의 부적응적인 행동 패턴, 감정의 불안정성이 중심이 되는 인격장애’라고 한다. 수잔나가 애착하지 않는 것은 삶이다. 그녀는 그리 좋아하지 않는 토비와 잠자리를 함께하며 이런 대화를 나눈다.
토비 : 누구나 한 번은 자살을 생각해.
수잔나 : 그걸 생각하면… 이상하고 새로운 종류의 인간이 되는 것 같아. 소멸을 꿈꾸는 생명체 같아. 네가 바보 같다고 생각하면 자살하게 되고. 영화를 좋아하면 살아. 기차를 놓쳐도 자살하게 돼.
토비 : 수잔나, 그런 얘기 그만하자.
수잔나 : 왜?
토비 : 그건… 바보 같으니까
수잔나는 자살을 생각하는 이를 소멸을 꿈꾸는 생명체라고 표현한다. 수잔나는 병동에서 그 누구보다 자유로운 리사를 만나게 되고 친해진다. 리사는 병원에서 8년 동안이나 살고 있다. 담당의는 그녀를 ‘심각해지는 조울증, 환자들을 장악하고 있음, 약물 및 치료 효과 없음’이라고 진단한다. 리사는 병원을 집으로 삼아, 간호사들을 보호자 삼아, 환자들을 친구 삼아 살아간다. 하지만 약을 먹지도 않고, 전기 충격 치료도 거부한다. 그녀는 지금 상태로 살고 싶어 한다. 리사는 병원을 탈출해 수잔나와 함께 퇴원한 동기인 데이지를 만나러 간다. 하지만 데이지는 병원에서와 똑같은 삶을 살고 있다. 리사는 자신이 다 나아서 새로운 기회를 얻었다는 데이지의 팔목에서 자해한 흔적을 발견하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네가 나아서 퇴원한 게 아냐. 그냥 포기했을 뿐이야. 이게 제대로 사는 거니? 아빠 돈으로 이것저것 사고 아빠 닭으로 뒤룩뒤룩 살찌면서? 겉만 그럴 듯 하지. 병원을 나와도 변한 게 하나도 없어. 네 아빠가 널 건드린다는 걸 다들 알고 있어. 모르는 게 있다면 너도 즐긴다는 거지.
데이지는 다음 날 아침 자살한다. 수잔나의 입을 빌리면 소멸을 강요당한 생명체가 되어 소멸된 것이다. 데이지의 죽음에 아무런 가책을 느끼지 않는 리사에게 실망한 수잔나는 다시 병원으로 돌아간다. 그리곤 데이지가 꿈꾸었지만 결국 얻지 못했던 새로운 기회를 얻으려는 듯이 진지하게 상담에 임한다. 수잔나는 친구라고 생각했던 병동의 동기들이 사실은 세상에 나가기 두려워 정지 버튼을 환자들이라는 걸 깨닫는다. 그리고 그게 그들의 잘못만은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된다. 영화는 퇴원을 하는 수잔나의 독백으로 끝나게 된다.
나에 대한 최종 진단은 경계 회복이다. 그게 무슨 말인지 아직도 모르겠다. 정말 미쳤던 것일까? 어쩌면… 아니면… 삶 자체가 미쳤을지도 모른다. 미쳤다는 건 의지가 없다거나 비밀을 감추고 있는 것이 아니다. 당신이나 나도 미친 사람일 수 있다.
수잔나의 치료는 사실 별 게 없었다. 그녀는 자기가 어떤 상태인지 인지하고 인정했을 뿐이다. 광인이 정의된 이후로 광인은 세상에서 격리되었다. 그 정의에 부합되지 않아야 미치지 않은 것이다. 정의는 언제든 달라질 수 있다. 수잔나는 타인과 대화를 통해 그 정의에 부합하여 스스로를 재정의했을 뿐이다. 그녀는 타인의 시선을 거부하기보다 인정하고 자신도 한 사람의 타인으로 자신을 바라봐야 한다는 걸 깨닫는다. 타인이 되는 순간 자신을 훼손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다. 글쓰기도 이와 비슷하다. 글을 쓰는 순간 글을 읽는 사람도 된다. 글을 수정한다고 자신이 훼손되지는 않는다. 그건 대화다. 대화를 통해 고쳐나가는 과정이다. 수잔나는 타인과 대화를 나눌 수 있고 글을 쓸 수 있기에 세상을 살아갈 수 있다.
감독 : 제임스 맨골드 / 각본 : 제임스 맨골드, 리사 루머, 안나 해밀턴 펠런 / 배우 : 위노나 라이더, 앤젤리나 졸리, 브리트니 머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