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이 사랑하는 여배우에 관한 짧은 필름
여기서 감독은 홍상수, 여배우는 김민희가 아니다. 물론 그렇게 보지 않기 힘들다. 여주인공과 감독의 이름을 모른 채로 봤다면 어땠을까라는 생각마저 든다. 감독의 배려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이들을 위해 촬영감독이 직접 검은 옷을 입고 등장해 이것은 영화라고 설명해준다. 마치 연극의 방백처럼, 소격효과처럼 영화와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는 관객을 위한 장치가 숨어있다. 영화를 보며 현실 속 누군가를 떠올리다가 검은 옷을 입은 남자 덕분에 ‘아, 이건 영화였지’라며 다시 영화에 집중할 수 있다.
영화는 마치 여러 개의 액자를 놓고 그 사이를 왔다갔다하듯 보게된다. 영화를 보는 관객으로, 여주인공과 감독의 관계를 아는 입장에서, 영화와 현실을 구분하기 위한 연극적 장치로, 꿈 속과 현실에 각각 액자가 놓여있다. 하나의 액자에서만 이 영화를 볼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다양한 액자만큼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영화다. 평론가들이나 기자들에겐 갓 잡은 회처럼 입에 넣고 음미할 거리가 많아 좋았을 영화같다. 거의 모든 물음에 대한 답이 영화에 다 들어있다. 하지만 영화는 그들이 아니다. 때문에 말할 수 없는 것은 침묵해야하는 것이다.
1부는 함부르크에서 펼쳐진다. 처음엔 영희와 지영의 대화가 연극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다시 보니 현실적이었다. 우리에게 익숙한 영화에서는 이렇게 대화하지 않는다. 좀더 극적인 상황에서 감정과 스토리를 응축시켜 대화를 나눈다. 그래서 처음에 영희와 지영의 대화가 낯설었고 어색하게 느껴졌다. 대화를 주고 받는 두 사람이 한 사람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했다.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는 사실 독백에 가까웠다. 영희가 지영의 말을 따라하거나 반대인 경우도 많이 보인다. 공감을 표하기 위해선 상대방의 말을 되풀이해서 말해주는 게 효과적일 수 있다. 이런 패턴은 2부에서도 반복되기 때문에 영화는 보는 이들에게 공감을 바라고 있었다. 결국 이 영화를 보는 이들은 액자를 두고 관찰하는 익명의 누군가이니까 말이다. 여배우는 계속 말을 건다.
이 영화에서 검은 옷을 입은 남자를 빼놓을 수 없다. 검은 옷을 입은 남자는 공원을 걷는 영희와 지영에게 시간을 물어보며 처음 등장한다. 외국에서 한국말로 너무나 자연스럽게 말을 건네는 이는 촬영감독이라고 한다. 카메라라는 액자 밖에서 안으로 들어온 것이다. 검은 옷을 입은 남자는 1부의 끝에서 영희를 들쳐업고 해변에서 사라진다. 소란을 피해 외국에서 쉬고 있는 여배우에게 근황을 묻는 기자처럼 다가와 여배우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한국으로 소환해 버린 것이다.
2부에서는 한국으로 돌아온 영희가 지인들을 만나면서 전개된다. 그녀에게 유부남 영화감독과 어떻게 되었는지 끈임없이 묻고 궁금해 한다. 그리고 영희가 영화계에서 은퇴한 것처럼 돌아오라고 설득한다. 애정을 담아 한 말이겠지만 그녀는 은퇴한 적도 일부러 유부남인 영화감독을 사랑한 적도 없다. 검은 옷을 입은 남자는 영희가 묶을 숙소에 나타나 베란다 창을 닦는다. 마치 그녀를 들여다보려는, 기사를 클릭하려는 네티즌처럼 말이다. 그녀가 이제 다시 일을 시작하기 위해 지인들과 다짐을 하자 검은 옷을 입은 남자는 흥미가 떨어졌다는 듯이 말없이 해변을 바라본다. 소란이 끝난 것이다.
영희는 해변에서 혼자 잠들었다가 꿈을 꾼다. 꿈 속에서 유부남인 감독을 만나 하고 싶었던 말을 한다. 그러나 꿈에서 깨면 그 이야기를 기억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결국 그녀만 아는 속마음일 뿐이다. 1부와 2부의 도시 모두 사람들이 살고 싶어하는 도시라는 이야기가 나온다. 하지만 영희에게는 단지 살기만 하는 건 기만이다. 사는 게 중요하다는 핑계를 사랑하지 못하는 당위로 삼는 사람들에게 자격미달이라 말한다. 그녀가 사랑 받을 자격을 논하는 게 나쁘지 않았다. 그녀가 자격 없다고 말한다면, 그걸 말할 자격은 있는가라고 뫼비우스의 띠처럼 답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다음은 꿈 속에서 영희가 감독과 나누는 대화이다. 현실이 아니기에 결국 이 대화도 독백이다.
여배우 : 고마워요 감독님.
감독 : 뭐가 고마워 갑자기.
여배우 : 아니 그냥 다 고마워요. (화를 내며)감독님이 그렇게 저를 사랑해주셨잖아요! 그러니까 고맙죠!”
감독 :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서 그 경험에 대해서 쭉 따라가는 그런 영화.
여배우 : 너무 개인적인 이야기는 지루한데… 맨날 자기 얘기만 하는 건 다들 지루해 해요. 아닌가요? (중략)왜 그런 영화를 만드세요!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영화를 만들어서 뭘 하시려고요? 무슨 한풀이라도 하시려고요?
감독 : (중략)그래 내가 그때부터 정상이 아니다. 영화는 만들지만 정상은 아니다. 지금 계속 괴물이 돼가는 거 같아. 괴물 되지 말아야지. 벗어나야지. 후회하는 것에서 벗어나야지.
여배우 : 후회 하세요? 정말 후회하세요?
감독 : 계속 매일 같이 지긋지긋하게 후회해.
여배우 : 후회하지 마세요. 후회한다고 뭐가 달라지겠어요.
홍상수 감독은 자신의 삶을 재현하는 자전적 영화는 아니지만 진실한 영화 작업을 위해 자신의 경험의 디테일을 가져온 건 사실이라 말했다. 범죄수사물을 만들기 위해 작가가 경찰과 인터뷰하는 것과 결이 다르지 않은 이야기다. 인터뷰 대상이 자신이 바라본 여배우였을 뿐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영희는 김민희가 아니다. 하지만 김민희로부터 영희가 탄생한 것은 맞다. 꿈은 현실이 아니지만 현실 때문에 나올 수 있다. 누군가의 시선으로 규정되어 버린 영희는 혼자 있을 때 이런 노래를 흥얼거린다.
보이시나요 저의 마음이. 왜 이런 맘으로 살게 되는지. 보이시나요 저의 마음이. 왜 이런 맘으로 살게 되는지.
감독/각본 홍상수, 배우 김민희, 서영화, 권해효, 송선미, 정재영, 문성근, 안재홍, 박홍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