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금테 제작기 #02
돌이켜 보니 여태껏 차별화에 꽤 많은 비중을 두고 안경을 만들었다.
세상에 뻔-히 있는 안경을 굳이 또 만드는 것은 디자인아이웨어가 아니라는 생각으로 말이다. 특히나 스튜디오지엔지알과 함께 만드는 진저아이웨어에서는 차별화가 영감의 원천이고 사명이다. 매시즌 머리를 맞대고 가영실장님과 아주 재밌고 힘차게(?) 디자인하고 있다. 그렇게 얇은 티타늄 테부터 판깎이 테, 뿔 테 등 조금씩 의미있는 것들을 세상에 내놓았다.
그러다 이번에는 혼자 안경을 만들게 되었다. 어떤 안경을 만들까?
이미 어딘가에 있지만 내가 만들어보지 못한 안경을 만들어야겠다. 안해본 공정을 진행해보려 한다. 또 중요한건 1차적으로 곧장 내가 쓰고 기뻐할 만한 것을 만들고 싶다. 사이즈는 조금 컴팩트하게, 색깔은 내가 좋아하는 색으로 만들어야지. 이런 생각들로 시작하니 안경을 처음 만들 때처럼 두근댔다.
좋은 안경. 이것이 첫 키워드다. 나는 좋은 안경이란 잘 어울리는 안경이라고 생각한다. 잘어울리려면? 사이즈가 잘 맞고 얼굴에 피팅이 잘되어야 한다. 안경사분들이 늘 말씀해주시는 피팅하기 좋은 요소들을 넣고 알 크기를 두가지 정도 구성할 예정이다.
의미있는 안경. 두번째 키워드. 꽤 여러개의 안경을 쓰는 사람으로서, 안경은 시력교정이나 스타일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고 느낀다. 특별한 날 꺼내 신는 신발이나 속옷처럼. 안경마다 각각 가지는 토템 같은 느낌이 있다. 회의를 할때는 꼭 워커즈 베이커를 써야하고, 장거리 운전을 할때는 티탄 안경을 쓴다. 안경의 기능적인 부분을 넘어 그렇게 써야 내가 안심이 되고 어쩐지 더 잘 된다. 그냥 기분이 그렇다. 이 무형의 것을 시각화하여 내가 해보지 못한 방법으로 담아내보고 싶다.
각인패턴을 새기고 싶다. 오래된 브랜드는 저마다의 패턴스타일이 있다. 해가 구름사이로 떠오르며 햇살이 뻗어나가는 패턴, 꽃과 잎이 피어나는 패턴, 마름모가 오프셋 된 패턴 등 다양하다. 정확히 의미를 알 수는 없지만 작은 디테일로 안경 전체에 아우라가 뿜어나게 한다. 가장 처음 티타늄 선글라스를 만들때 얼굴에 그늘을 드리우는 의미로 기와무늬가 쌓여있는 모습을 따서 다리와 엔드피스에 새긴적이 있다. 이번엔 조금 더 토템의 역할을 담기 위한 무언가를 넣고 싶다.
하금테. 안경디자이너라고 말하면서 그토록 좋아하던 하금테를 그려본적도 만들어본적도 없는 것 같다. 사실 정확히 2년 전부터 곧 하금테의 유행이 올 것이라 짐작은 했지만 그때는 내 촉을 뒷받침해 줄 근거가 없었다. 지금은 다르다. 레트로 스타일이 유행하면서 이른바 대디핏(Daddy fit)이 트렌드다. 보통 박시한 큰 사이즈의 자켓 스타일링에서 쓰는 용어지만 안경에서 통용된다고 본다. 오래전 영국 신사들이 착용할 법한 브리티시 스타일을 지향하는 커틀러앤그로스가 그 대표적인 예다. 이게 지금에서 중요한 것은, 트렌드를 따라가는게 아니라 대디핏 혹은 하금테를 보는 사람들이 그것을 갖고 싶은 감정이 드는 시기가 된 것이다.
결국 하금테를 만들기로 했다. 그래, 나도 답정너였다.
정성택
이 글의 안경 사진은 아이웨어편집샵 핫선글라스의 상세페이지에서 가져온 사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