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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야 Sep 08. 2022

<나 오늘 머리카락을 잘랐습니다>

사랑하는 언니에게

 

언니! 나 오늘 머리카락을 잘랐습니다. 매일 아침 소중히 끌어올려 쪽 집던 내 머리카락이요.

 

 언니! 기억납니까? 언젠가 어린 나를 앉혀놓고 말했지요. 부모가 주신 몸을 지킨다고 머리카락을 자르지 않는 것은 참 덧없는 말이라고요. 나의 몸을 상처 내는 것은 머리카락을 자르는 가위가 아니라 여자를 밟고 서 있는 저 사람들이라고요. 그리고 언니는 바로 머리카락을 움켜쥐었습니다. 자약한 얼굴로 순식간에 단발이 되었지요. 나는 무서웠습니다. 바닥으로 뚝 떨어진 머리카락을 보고 덜덜 떨었습니다. 부드럽게 찰랑이던 머리카락이 언니의 찬란한 청춘처럼 보였습니다. 이제 곧 저만큼이나 초라해져서 바닥을 뒹굴 것 같았습니다.


 단발이 된 후 언니는 온갖 모욕을 견뎌야 했습니다. 사람들은 언니가 무슨 말을 해도 아니, 아무 말을 하지 않아도 망측하다고 욕했습니다. 남편에게 맞고 있는 옆집 아주머니를 도와준 그날부터는 이웃들도 인사를 잘 받아주지 않았습니다. 어린 나는 이게 다 언니의 잘린 머리카락 때문이라고 원망했습니다. 언니에게 줄 수 있을까 내 머리카락을 하도 뽑아대어 뒤통수에 작은 땜빵도 생겼습니다.


 사춘기에 들어섰을 때는 언니가 못나 보였습니다. 모르는 노인이 재수 없다고 뺨을 때렸던 날에도 언니는 부은 얼굴을 감추지 않았습니다. 꼿꼿이 허리를 펴고 학교에 갔습니다. 도움 청할 사내 하나 없는 것이 얼마나 미련해 보이던지. 어디 묶여있지도 않은 여성들을 해방해야 한다고 말하는 언니가 미쳤다고 생각했습니다.



 수년이 지나 대로에는 단발 여성이 심심찮게 보이게 되었지요. 나는 여성으로 누릴 수 있는 아름다움을 지키려고 노력했습니다. 매 순간 어여쁘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아침, 저녁마다 머리카락을 오래도록 빗었습니다. 윤기 나게 기름칠하고 정숙해 보이도록 힘주어 묶었습니다.

 

 어느 날 골목을 걷는데 처음 보는 사내아이가 내 엉덩이를 움켜쥐고 도망갔습니다. 정혼자에게 말하니 내가 너무 예쁜 처녀여서 그렇다고 합니다. 사장은 사무실에 나를 홀로 불러내어 내 머리카락을 자기 코에 들이밀고는 짐승처럼 냄새를 맡았습니다. 지켜보던 동료는 윗선이 되고 싶다면 그냥 조용하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제 막 들어온 남자 신입이 내 윗선이 되었습니다. 그 사람은 머리를 잘 정돈하지 않는데도요. 사장이 말하길, 여성은 불완전한 몸으로 태어나서 남성보다 배움도 늦고 힘도 제대로 못 쓰기 때문이랍니다. 아버지는 머리카락을 빗고 있는 내게 겉치레만 한다고 화를 냈습니다. 다음날에는 내 머리가 헤픈 여자처럼 헝클어져 있어 창피하다고 했습니다.



 언니! 옆집 아주머니가 주정뱅이 남편에게 발가벗겨진 채 맞아 죽었습니다. 예전에 언니가 도와준 그 아주머니요. 임신한 아내가 굼뜨게 밥을 차려서라네요. 마지막으로 본 아주머니의 몸은 사장 말처럼 불완전해 보이지 않았습니다. 여느 인간과 다를 바 없이 완전했고, 심지어 생명까지 품은 완벽한 몸이었습니다. 아주머니의 몸을 불완전하게 만드는 것은 남편에게 맞아 생긴 흉터와 시퍼런 멍이었습니다.

 

 다행히 아주머니 배 속의 아가는 살았습니다. 계집아이입니다. 오늘 아주머니의 딸을 안아봤습니다. 갓 태어난 젖먹이는 사내인지 계집인지 구별이 안 갔습니다. 그저 엄청 따뜻했습니다. 우렁차게 울었습니다.

나는 오늘 아가의 온기가 남은 손으로 가위를 들었습니다. 이 작은 생명에게 머리카락을 빗는 것 말고도 할 수 있는 일이 많다는 걸 알려주고 싶었습니다. 언니가 나를 앞에 앉혀놓고 머리카락을 자르던 그날처럼요.




 종이를 밝혀주던 달빛이 점점 새벽의 해와 섞이고 있습니다. 내일 나는 단발의 모습으로 거리에 나갈 겁니다. 못생겼다고 침을 뱉을까요? 멍청하다고 빈정거릴까요? 기분 나쁘다고 뺨을 때릴까요? 아, 이제는 두렵지 않습니다! 적어도 모르는 이에게 엉덩이를 잡히지는 않겠지요. 아가가 살아갈 세상에서는 직업 부인들도 남성만큼 돈을 벌고, 완전한 여성의 몸에 상처가 남을 일이 없겠지요. 여성의 단발은 운동이 아닌 취미가 되겠지요.

 


언니! 나는 오늘 머리카락을 잘랐습니다. 상쾌합니다. 잘린 머리카락보다 다시 자라날 머리카락을 생각하며 아침을 맞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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