닥치세요 캐리 라인 갈 거니까
내 취미는 게임이다. 나는 게임 중에서도 아는 사람들은 다 아는 바로 그 게임, 리그 오브 레전드(이하 롤)를 한다. 다른 게임은 안 하고 롤만 한다.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조금 설명해보자면, 롤은 5:5로 다섯 명이 한 팀으로 플레이하며 적의 기지(넥서스)를 파괴하면 승리하는 게임이다. 플레이어들은 자신들의 기지를 위해 탑 라인 한 명, 미드 라인 한 명, 정글러 한 명 그리고 바텀에 원딜(원거리 딜러)과 서포터가 간다. 여기서 내가 가는 라인은 미드와 원딜 즉, 몸은 약하고 딜은 강해서 이 판의 승패를 쥐고 흔들 수 있는 그러니까 플레이어가 겁나 잘해야만 하는 라인이다.
나는 주로 아는 사람들이랑 같이 플레이를 한다. 꽤 오랫동안 같이 플레이를 했지만 실제로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게임 친구들과. 그렇지만 그들이 로그인하지 않았을 땐 솔플을 할 때도 있다. 그리고 꼭 그때마다 시비가 털린다. 내 아이디는 누가 봐도 여성 유저의 아이디 같기 때문이다. 물론 내 입장에선 그들이 그따위로 생각하는 것이 그냥 어이가 없다. 아이디에 봉봉이나 미키나 뀨나 쪼같은 글자들이 들어간다고 해서 여자라고 생각하는 새끼들이 이상한 거 아닌가.
여자라는 사실을 눈치챈 그남들은 아무 말 없이 게임을 하고 있는 내게 말을 건다. 그 말들은 대체로 이렇다. 혜지야(여성 유저들을 조롱하려고 붙인 이름) 서포터나 해, 여자는 서포터나 해. 내가 캐리를 하고 있어도 그딴 말을 한다. 그 말을 들은 나는 가슴이 웅장해진다. 이 판을 어떻게 조져놓을까. 어떻게 해야 더 신나게 게임을 망칠 수 있을까. 열심히 던지고 있으면 그들은 쌍욕을 박거나 패드립을 친다. 여자니까 그런 말에 벌벌 떨 줄 아는 것이다. 그들은 모른다. 쌍욕이랑 패드립도 내가 더 잘할 수 있다는 것을.
게임에서 서포터의 역할은 중요하다. 서포터는 큰 그림을 볼 줄 알아야 한다. 우리 팀이 적에게 기습 공격을 당하지 않게 와드를 사서 시야를 밝혀야 한다. 무기를 사는 것도 안된다. 우리 딜러들을 보호해 줄 수 있는 아이템을 사야 한다. 혹시나 딜러들이 죽을 위기에 처하면 대신 죽을 줄도 알아야 한다. 희생해야 한다. 그리고 나는, 이런 서포터들의 모습을 현실에서도 아주 오랫동안 목격해 왔다. 그림자처럼 자신의 모습을 전면에 드러내지 않으면서 최선을 다 하는, 남자들을 위해 희생하는 여자들을. 그들도 이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다. 그러니까 나에게, 여성 유저에게, 여성에게 서포터나 하라는 말을 내뱉은 거겠지. 그래서 나는 서포터가 싫었다. 아주 좆같았다.
나는 서포터를 할 생각이 없다. 가끔 한 두 번, 라인 가는 게 지겨워서 서포터를 할 수도 있겠지만 그 또한 내가 하고 싶을 때 하는 것이지 니들이 강요할 수 없다. 나는 계속 미드나 원딜 같은 캐리 라인을 갈 것이다. 내가 라인을 서서 상대에게 지더라도, 나 때문에 게임이 망한다고 해도. 여자여서 못하는 게 아니라 어차피 게임이라는 건 한쪽은 지는 게 당연하니까. 그러니 내가 어디를 가던 상관 마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