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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이진 Jan 08. 2021

8. 나의 반려인형에게

더 이상 낡지 않기로 해

"어휴, 이제 좀 보내줘야 되겠다." 엄마가 말했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뭐를 보내느냐고 되물었다. 그러자 엄마는 "저거 말이야, 저거. 여기저기 찢어진 것 좀 봐. 이젠 갈 때가 됐어."라고 했다. 나는 엄마에게 어디로 보내야 하느냐고 물었다. 엄마는 쓰레기통이라고 말했고, 그 말에 나는 절대 안 된다며 인형을 끌어안았다.


내 기억이 맞다면 이 인형은 약 5년 전에 우리 집에 왔다. 친구 R과 코엑스에 있는 'BUTTER'라는 패스트 리빙샵에 갔다. 무언가를 살 생각은 없었다. 원래 그런 곳은 살게 없어도 괜히 들어갔다가 무언가를 손에 들고 나오게 되는 법이었다. 그곳은 온갖 물건이 많았다. 펜, 노트, 컵, 계산기, 베개, 슬리퍼 그리고 인형. R은 이곳 트레이드 마크는 브로콜리 인형이라며 초록색 무언가를 보여주었다. 브로콜리 인형을 본 내 반응은 이랬다. "음 그렇군." 끝이었다. 나는 유치원을 졸업한 이후 인형 같은 것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여러 채소 인형 속에 파묻힌 곰인형 몇 마리가 있었다. 나는 그중 하나를 들면서, 인형을 하나 산다면 얘로 하겠다고 했고, 정신을 차리니 어느새 계산이 끝나 있었다.


인형은 그저 인형이었다. 처음엔 그랬다. 인형을 가리키며 이 시커먼건 뭐냐는 아빠의 말에 뭐 어디가 어떠냐며 받아쳤고, 얼굴에 갖다 대지 말라는 엄마의 말에 한 번 더 갖다 댔을 뿐이었다. 아런 나를 보며 동생은 누나가 미쳤나 보다고 했고 나에게 그런 말은, 남의 시선은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그럴수록 인형에게 의지하는 일들이 많아졌다. 인형은 내 팔뚝만 한 크기였지만 푹신한 점이 있었다. 점점 다른 사람들 앞에서 내가 받는 스트레스를 일일이 드러낼 수 없다는 걸 깨닫자 인형 앞에서 화를 내거나 울었다. 꼭 껴안고 잠을 잤고 일어나 보면 그 시커먼 것에 침이 잔뜩 묻어있었다. 그리고 내가 많이 애정 한 만큼, 그만큼 인형은 낡아갔다.


언젠가부터 인형이 있던 자리엔 솜뭉치가 떨어져 있었다. 여기저기가 찢어지고 까맣던 색깔은 어느새 누런 빛을 뗬다. 나는 처음 인형이 찢어졌을 때 똑같이 생긴 인형을 하나 더 사야겠다고 결심했지만 그 어디에서도 구하지 못했다. 인터넷 여기저기를 뒤져 비슷하게 생긴 인형을 샀지만 걘 손에 하트가 붙어있었다. 엄연히 얘와 달랐고 내 마음도 그랬다.


처음부터 만 원도 되지 않았던 인형이니 좋은 실을 썼을 리 없다는 걸 안다. 사람도 나이가 들수록 늙으니까 인형이 낡은 것도 당연하다. 하지만 억지를 자주 부리는 나는 그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다. 그러니 더 이상 낡지 않기로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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