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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미영 Oct 25. 2024

나 엄마랑 살아도 돼?

제 17회 동서문학상 수필부문 맥심상 수상작

감사하게도 이번 동서문학상 수필부문에 응모한 글이 당선 되었다.

엄마 사고 이후 벌써 3년에 가까운 시간이 되어가며 나의 시간을 제대로 갖지 못하고 있는데 이렇게 글이 당선 되고 나니 더더욱 글을 놓아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번에 응모한 부문은 수필부문이였으며 맥심상을 수상하였다. 

이혼, 그리고 참 많이 아팠던 아이, 그 이후의 모습들, 이혼 후 6년만에 아이가 던진 너무도 묵직한 그 한마디에 대한 이야기를 적었다. 





“양육권은 누가 가지시나요?” 

“아빠요.”

“친권은 누가 가지시나요?” 

“아빠요.” 

“양육권, 친권 모두 남편분이 단독으로 가지시는 걸로 합의되셨나요?” 

“네.”

“2018년 1월 26일, 이로써 두 분은 합의 이혼 되셨습니다.” 

탕! 탕! 탕! 

‘뭐? 이렇게 간단하게 몇 분 만에 이혼이 결정된다고?’

너무 허망한 것 아닌가 싶기도 했으나 순식간에 끝나 눈물 흘릴 틈도 없는 것이 오히려 구차하지 않아 다행스럽다는 생각도 들었다. 

판사의 짧은 말과 함께 울려 퍼진 판사봉 소리가 이제 돌이킬 수 없음을 선언하는 사형선고 같다는 느낌이 잠시 뇌리를 스쳤다. 이젠 정말 어쩔 수 없는 것일까?


가정법원 출석일, 법정은 생각과 달리 부산스러웠다. 이혼하려는 사람이 그렇게 많을 줄 몰랐다. 시간마다 배정된 사람들의 명단이 촘촘하게 적혀 있고 명단만큼의 사람이 긴 의자에 다닥다닥 붙어 앉아 꼭 봐야 한다는 시청각 자료에 눈을 고정하고 있었다.

그들 중에는 자기는 쿨한 사람이라는 듯 아무렇지 않게 서로 대화하는 이들도 있고, 옷이라도 스치면 물고 뜯을 것처럼 날카로운 표정으로 저 멀리 떨어져 있는 이들도 있고, 데면데면한 표정으로 약간의 거리를 둔 채 무표정하게 화면만 응시하는 이들도 있었다. 결혼의 마지막 장인 이혼을 위해 그 자리에 모인 그들은 때론 가깝게 때론 멀찍이 그렇게 각자가 살아왔을 법한 모습으로 마지막도 마무리하고 있는 듯했다.


시청각 자료 시청이 끝나고 안내자의 호명에 따라 판사, 서기, 보조인 앞에 서니 이름, 주민등록번호를 확인한 후 딱 2가지 질문을 했다. 

양육권과 친권 여부, 이 두 가지에 대해 대답을 하자마자 합의 이혼이 확정되었다. 판사의 그 말 한마디가 끝이 나고 보조인이 준 이혼확정서를 받고 법정에서 나오니 우리의 합의 이혼 절차는 끝나 있었다. 부부가 얼마간의 결혼 생활을 했고, 이혼까지 오는 과정에서 어떤 아픔과 진흙탕 싸움을 하며 마음고생을 했는지와 상관없이 이혼 확정까지는 3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성격 차이에서 시작한 우리 부부의 갈등은 여러 문제가 겹치며 감정이 쌓여 별거에 들어갔고 그 와중에 남편의 외도가 드러나 이혼을 선택하게 되었다. 이혼 수순을 밟던 중 생각지 못했던 상황이 벌어졌다.


“왜 내 돈으로 네가 생활하는데? 내 돈으로 내 아들 내가 키울 거야.”

남편은 이혼 조정 기간을 앞두고 이 말을 하고는 아이를 데리고 가버렸다. 황당했다. 5년 동안 목욕 한 번 시킨 적 없고 부성애가 있는지조차 의심스러운 사람이 아이를 키우겠다니…. 그러나 반대할 수가 없었다. 허리 디스크로 쓰러져 수술을 앞두고 있던 입장에서 내가 키우겠다고 할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어른들의 문제 때문에 여리고 약한 아이까지 힘들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내 목숨보다 귀한 아이였기 때문에 아이의 손을 내가 놓아버렸는지도 모른다. 더 힘들지 말라고, 더 괴롭지 말라고….


그렇게 4개월 넘는 이혼 조정 기간 동안 아이를 보지 못한 나는 매일 눈물로 보냈다. 며칠 남았나, 밤을 얼마나 지나야 우리 아이를 볼 수 있는 걸까, 날마다 오매불망 아이를 기다렸다. 울다 잠이 들며 너무 힘겨워 차라리 눈 뜨지 않길 바라기도 했다. 

그 시간들이 다 지나고 이혼 확정 후 2주마다 허락된 면접교섭일에 만나게 된 아들은 겨우 6살, 아무것도 모르는 이 아이는 엄마랑 살면 안 되느냐고 물었다. 아이가 태어나기 전에 이미 허리 수술을 한 번 했던 터라 재수술을 한 상태의 나는 이미 몸과 마음이 망가질 대로 망가져 있었고, 도저히 아이를 키울 힘도 여력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이가 다 이해할 수는 없겠지만, 최대한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설명을 해주었다. 더 이상 엄마랑 살고 싶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시간은 흘러 2년이 지나갔다. 2주마다 만나는 아이는 익숙해진 듯 보였다. 

그러다 코로나19가 시작되었고, 등교가 중단되어 집에만 있게 된 아이를 돌볼 사람이 없어 2주마다 만나던 아이를 매주 만나게 되었다. 별다르게 하는 것은 없었다. 어차피 어디 갈 수 있는 곳도 없었으며 특히 우리 아이는 더욱 조심해야 했기에 우리는 매주 주말 집에서 서로를 바라보며 시간을 보냈다. 

때론 그 시간이 지겨운 듯도 했지만, 우리 방식대로 행복한 시간이었다. 당연한 듯 일요일 저녁이 되면 “다음 주에 봐”라는 인사를 하며 웃으며 헤어질 수 있을 만큼 꽤 편해졌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여전히 아이가 돌아간 일요일 저녁은 마음 한구석 어딘가 아리고 밤새 잠들지 못했다. 이젠 혼자인 일상이 꽤 편하고 오히려 더 좋다고 느끼면서도 아이가 돌아가고 난 저녁이면 온 집안이 쓸쓸하고 무섭게 느껴지곤 했다. 


어느덧, 이혼한 지도 6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아이가 아빠와 살게 된 시간이 엄마인 나와 살았던 시간보다 더 길어져 버렸다. 여전히 주말마다 습관처럼 아이를 만나고, 매주 주말이면 뭘 먹을지 고민을 한다. 이제 사춘기가 올 시기가 되어 가는 아이에게 장난을 걸던 그때, 아이가 무거운 한마디를 던졌다. 


“엄마! 나, 엄마랑 살아도 돼?” 


심장이 ‘쿵’하고 내려앉았다. 사실은 가장 기다렸던 말이었다. 6년을 떨어져 살면서 날마다 날마다 기다렸던 말이다. 어쩌면 내가 먼저 해야 했던 말이기도 했다. 


“왜? 무슨 일 있었어?”

아이는 처음부터 나와 살고 싶었는데 엄마가 너무 아팠고, 힘들어 보여서 처음 물어본 후 더 이상 말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 뒤로 계속 내 눈치만 보고 있었나 보다. 나는 여전히 허리가 아프고, 다치신 외할머니도 돌봐야 하고, 경제력이 없다고 말을 하니, 아이다운 대답을 해준다.

“편의점 가서 아르바이트하면 안 돼?”

나랑 살고 싶은 것이었다. 아이는 어떻게든 나랑 살고 싶은 것이었다. 너무 슬프고 마음이 찢어지는 듯했다. 6살 그때처럼 울음을 꾹 참은 채 뒤돌아서지 않고 용기를 내 같이 살고 싶다고 본인 마음을 끝까지 보여주고 있었다. 그날 밤 한참 동안 우리는 서로를 안고 울었다. 


그래, 되돌아보니 이 아이는 그런 아이였다. 작게 태어났지만, 오히려 나보다 더 강인한 아이. 나를 더 강하게 만들기 위해 나에게 와준 것 같은 아이. 

임신 20주차였을 때, 아이는 내 뱃속에서 이미 아픈 상태였다. 소장에 결손이 있어 수술이 필요하다고 했다. 최선을 다해 버텼지만 35주가 되던 날 양수가 터지고 하혈을 했다. 의사는 35주밖에 되지 않아 아이가 태어나도 체중미달로 마취가 어려워 수술이 힘드니 하루라도 더 버티라 했다. 그렇게 결정된 게 3일 후 아침 8시, 첫 타임 수술이었다. 양수가 계속 쏟아지고 하혈을 하면서도 죽을힘을 다해 3일을 버텼다. 그런데 아침 6시, 수술을 2시간 앞두고 긴급상황이 발생했다. 바로 수술해야 했다.

보호자도 없는 상태에서 아이도, 나도 위험할 수 있다는 내용을 안내받은 후 목숨을 거는 심정으로 동의서에 직접 서명을 하고 긴급수술에 들어갔다. 제발 마지막이 아니기를 바라는 마음뿐이었다. 눈물이 쏟아졌다. 우리 아이는 온갖 난관을 뚫고 그렇게 태어났다. 다행히 아이와 나 모두 무사했지만 아이는 세상에 나온 후 3일 만에 6시간 동안 두 개로 절단된 소장을 접합하여 이어주는 봉합수술을 하고, 4일 뒤 심장 수술까지 받았다. 그렇게 45일을 신생아 중환자실에서 아무것도 먹지 못한 채 강하게 버텨냈다. 그걸로도 부족했는지 1주일 후 세포 바이러스 감염으로 한 달간 항바이러스제를 투여받으며 마취도 없이 십여 차례 가까이 위내시경까지 해야 했다. 바이러스제 투여를 위한 관 삽입 시술에서 마취가 깨지 않아 혼수상태에 빠지기도 했고, 흔히 아이들이 많이 하는 폐렴, 장염은 습관처럼 걸렸다. 미숙아에 소장, 심장 수술을 한 아이다 보니 그건 감수해야 할 일이었다. 

담당 의사는 면역결핍자에 가까우니 학교에 가기 전까지 보육 시설에 보내지 않는 게 좋다는 말까지 했다. 아이는 현재 국가 특례 지정 희귀난치병 보균자이며 틱과 발달 지연에 따른 치료도 몇 년을 받았다. 내가 디스크로 쓰러지기 전날까지도 나는 5살짜리 아이를 업고서 집안일을 했을 만큼, 내 몸과 마음을 다 바쳐 이 아이를 지키고 키웠다. 내가 살아가는 유일한 이유, 그건 아이였다.

그랬기에 이혼은 하더라도 아이는 포기할 수 없었다. 하지만 아이가 미성년자일 때 수술이 필요한 경우 친권자 모두의 동의가 필요하다는 그 말에 나는 친권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급박한 순간에 나 때문에 수술이 늦어져서 아이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는 건 도저히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차라리 친권을 포기하고서라도 아이가 무사하기를 바라는 것이 더 나았다. 그것이 목숨 같은 아이를 보낸 이유였다.


어린아이를 왜 엄마가 키우지 않느냐고, 왜 친권마저 다 포기했냐고 입에 담지 못할 모진 말로 내 가슴을 후벼파는 사람들도 많았다. 나는 일일이 답하지 않았다. 아이만 무사히 잘 자랄 수 있다면 친권이며 양육권이 무슨 소용인가 싶었다. 아이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포기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이가 함께 살고 싶다고 말을 한 것이다. 우리 포기하지 말자는 말로 들렸다. 나는 알면서도 애써 외면하려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내게 필요한 건 건강도, 경제력도 아니고 어쩌면 용기였는지도 모른다. 

돌이켜보면 편한 날이 없었다. 아이와 나 모두 힘든 시간과 상황을 계속 견디며 여기까지 온 것이었다. 왜 놓아버렸을까. 내가 먼저 다시 함께하자고 손을 내밀었어야 하는 것 아니었을까. 팔뚝보다 작았던 그때도 아이가 견뎌 줬는데 지금 와서 더 힘든 순간이 있을까. 함께 있다면 못 견딜 일은 없지 않을까.


그래, 이제는 내가 용기를 내야 할 차례이다. 이 아이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은 한마디밖에 남지 않았다. 난 그 말을 하루라도 더 빨리 이루기 위해 단 하루도 허투루 살 수가 없다.


“아들, 이제 엄마랑 같이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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