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버닝 그리고 평론에 대한 개인적 의견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영화를 아직 보시지 않은 분은 읽지 마시길 바랍니다.)
버닝은 미스터리 영화가 아니다.
버닝을 보고 나서 난 이 영화가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가 그 사회에 적응하거나 순응하지 못한 자들을 얼마나 평범한 모습으로 제거하고 또 쉽게 기억에서 지워버리는가를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정말 어두운 영화라고 이해했다. 그래서 평론가들의 평론이나 감독의 인터뷰를 검색해보았는데 그런 얘기가 없다... 이창동 감독님은 감독으로서 영화를 다 풀어서 설명하거나 감상자의 결론을 유도할 수 없으니 (그러려면 영화를 왜 만드나) 그렇다 치더라도 대부분의 평론가들이 마치 이 영화를 이런 일이 있었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라는 식의 교묘히 장치를 내장한 미스터리 영화로 평가하는 것에 전혀 동의를 할 수 없었다.
내가 보기에는 이 영화의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요소는 우물과 해미의 죽음이다.
해미는 영화 초반부에 종수에게 자신이 우물에 빠졌었고 긴 시간을 두려움에 떨었다고 종수에게 얘기한다. 하지만 종수도, 마을 이장도, 심지어는 해미의 가족에게도 우물에 대한 기억은 없다. 해미가 아무리 그때의 상황을 정확하게 기억한들 이미 우물은 우리 사회에서 존재하지 않는 상상력의 산물이 되어버린 것이다. 하지만 종수에게 갑자기 나타난 종수의 엄마는, 종수의 질문에 너무 확신의 찬 목소리로 "우물이 있었지"라고 대답한다. 우물의 위치까지 정확하게 기억하는 엄마. 하지만 관객이 그리고 우리 사회가 이 말을 믿기엔 해미만큼 아니 어쩌면 해미보다 더 신용(?)이 없는게 종수의 엄마이다. 해미가 살해되었다는 걸 알았을 때 종수는 우물이 있었다고 말하는 자신의 엄마의 모습과 자신이 오버랩된다는 사실을 직관적으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해미는 밴에 의해 살해된다.
그리고 영화에는 그렇게 되었다는 많은 증거(?)들이 나열된다. 하지만 벤은 한 번도 자기가 그랬다고 얘기한 적이 없고 모든 게 평화롭다. 마치 벤이 해미의 시신을 가라앉혔을지 모르는, 벤이 차분하게 쳐다보는 그 마을 저수지의 평온한 모습처럼. 이러한 피할 수 없는 현실은 하지만 해미의 우물처럼 많은 사람들 그리고 관객들에게 의심을 사기 시작한다. 벤은 좀 노는 오빠일 뿐 좀 놀다 버리는 여자들을 죽일 필요까진 없는 잘 나가는 사람이잖아. 고양이는 정말 없었을지도? 마지막에 나온 고양이가 어쩌다 종수한테 온 거지, 이름을 불러서가 아니라. 싸구려 손목시계가 있는 게 뭐 어째서 그럴 수도 있지, 이쁘게 생긴 칼을 수집할 수 있는 것처럼. 그러고 나서 우리는 두 가지 해미를 보게 된다. 종수를 제외한 모든 사람에게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영화 속에서의 해미. 그리고 죽지 않은, 아니 살해당할 이유가 없으므로 살해당하지 않아야 하는 관객 속에서의 해미. 해미는 우물이다.
종수는 직관적으로 해미의 죽음을 이해한다. 어린 시절에는 우연히 자기가 발견해서 구해준 해미. 하지만 이번에는 다르다. 그냥 발견해서 구해주기에는 사회가 그리고 해미가 종수에게는 벅차고 또 복잡하다. 종수에게는 자신을 그대로 받아들여준 해미에 대한 사랑의 감정과 벤에 대한 애써 눌러버린 질투가 해미가 우물에 빠진 상황을 그대로 내버려 두게 만드는 이유였을까? 아니면 그냥 무기력함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해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도 모른다는 직감한 종수는 벤을 미행하고 벤의 모든 것을 들여다보려 한다. 종수는 이미 더 이상 해미를 구하기 위해 달려와줄 그 누구도 없다는 사실을 그의 무기력한 삶을 통해서 알고 있는터. 작은 픽업트럭 하나에 의지해 절대 해결할 수 없는 일을 해보려고 발버둥 친다.
왜 종수는 벤을 죽여야 했을까? 종수에게는 벤은 그가 살고 있는 사회일지도 모른다. 종수 자신의 무력한 삶까지는 그렇다 치자. 해미같이 순수하고 착한 아이가 우물에 빠졌는데 아무도 달려오질 않는다. 아니 그런 우물은 없다고들 한다. 그의 사회에서 여전히 철부지 어린아이인 종수에게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다. 하지만 종수는 확신한다. 우물은 있었고 해미는 벤에 의해 살해되었다고. 그가 확신한 순간 그에게 주저함은 있을 수 없다. 그의 분노는 칼끝이 돼서 벤의 복부를 찌른다. 그것은 복수도 아니고 미움도 아니다. 종수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어두운 사회에 대한 조용하고 짧은, 그래서 또 곧 잊힐 짧디 짧은 절규이다.
이런 나의 확신에 대해 당신이 뭘 안다고 확신질이야 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 사회가 우물의 존재를 잊어버리고 해미의 존재를 잊어버릴 거라는 것은 절대로 변하지 않는 현실이고 받아들여야 하는 확신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가 젊은이의 절망과 무기력함을 얘기하고 있다고 한다. 이창동 감독도 그런 얘기를 한 걸로 기억한다. 그렇다. 하지만 이 영화가 진짜로 보여주고자 한 또는 결과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우리 사회의 선택적 의도적 기억상실증이다. 우물과 벤의 살인을 감성적으로 의심하거나 지적으로 인정하지 않거나 스타일리시하게 비아냥거리는 순간 이영화의 존재 가치는 제로가 된다. 그러므로 종수가 벤을 죽여야 했듯이, 벤도 해미를 죽인 것이어야만 하는 것이다.
예술작품의 해석은 그것을 감상하는 자의 몫이다. 그러므로 정답은 없다. 하지만 분명 잘못 이해하는 오류는 발생한다. 내 생각에 평론가들의 역할은 거창한 수사로 자신의 전문지식을 과시하며 알아듣기 어려운 내용을 난사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오류가 발생할 경우 논리적인 설득력과 평범한 언어로 이러한 오류를 수정해 나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많은 평론가들의 이 영화에 대한 평론에 크게 실망할 수밖에 없다. 평론가들 조차 우물의, 고양이의, 살인의 존재를 의심하는데 집중하고 또 그 의심에 즐거워까지 한다면 이 작품은 우리 사회에서 존재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재미있는 영화들은 차고 넘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