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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enneth Jan 03. 2019

도넛 맛집 앞에서 결혼사진 찍기

미국의 결혼식 이야기

미국은 인종, 문화의 집합소이다. 

멜팅팟이라는 말이 과거에 한참 유행했었는데 왠지 요즈음은 잘 쓰지 않는 말이 되어버렸다. 그도 그럴 것이 멀리서 보면 큰 용광로에 다 같이 녹아들어 있는 것 같지만, 막상 그 안에 있으면서 보면, 녹아서 섞인 부분보다 녹지 않고 같이 붙어만 있거나 심지어 완전히 따로 떨어져 있는 부분들이 훨씬 많다는 걸 알게 되기 때문이다. 고유한 인종과 문화는 그 구성원들을 서로를 끌어드리는 묘한 힘이 있다. 그냥 녹아서 섞여버리기엔 그 알맹이가 콩알같이 너무 단단하다. 그래서 결혼식들을 보면 신부나 신랑의 의외로 다양한 문화가 표현되는데, 유태인 전통이 가미된 결혼이나, 그릭 웨딩, 인도식 화려한 결혼, 중국의 붉은 드레스는 늘 볼 수 있는 결혼의 풍경이다. 하지만 15년이 넘게 시카고에서 웨딩드레스를 디자인하는 나의 눈길을 끄는 건 이러한 문화적 차이는 아니다.

미국인들에게도 결혼은 신부들의 것이다. 서로 다른 주에 사는 부모를 둔 남녀가 만나서 결혼식을 하면 의레 신부의 부모 쪽 타운에서 결혼식을 하기 마련이다. 물론 데스티네이션 웨딩이라는 절충안도 있겠지만... 아무튼 그래서 그런가 (여성이 남성들보다 일반적으론 더 섬세하다는 전제하에) 이들의 결혼식에는 종종 이들의 가치관이나 자신의 삶에 대한 애정이 묻어나는 것을 보게 된다. 우리나라 결혼식에서는 아직도 좀처럼 보기 힘든 그런 것들 말이다.


도넛 맛집 앞에서 결혼사진 찍기
나와 내 와이프가 디자인하는 드레스들은 다른 도시들에서도 팔리고 있지만, 우리가 들여다볼 수 있는 결혼은 주로 시카고에서 살았거나 현재 시카고에 직장을 둔 여성들의 결혼식들이다. 대부분의 결혼식은 한국에서처럼 비용도 많이 들고 준비 과정도 길다. 여기도 소위 말하는 스몰웨딩을 많이 하지만 차이라고 하면 여기는 늘 있었던 문화이라고나 할까? 그래서 그것에 따로 특별한 의미가 부여되지는 않는 것 같다. 그래서 작고 소소한 웨딩은 진정성이 담긴 웨딩이라는 공식은 여기에는 없다고 할 수 있다. 호텔 웨딩, 교회 웨딩, 고급식당을 통째로 빌려서 하는 웨딩 등 어쩌면 사치스럽다고 할 웨딩들에도 미국의 신부들은 진정성을 담기 위해 (보여지는 것 말고 자신과 자신의 가족과 하객들을 위한) 노력하는 모습을 보면 이 사람들은 결혼식의 의미를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든다. 한 5년 정도 되었을까? 우리 디자인 중에 가장 독특한 색상을 가진, 우린 그 색을 플래티넘 블루라고 불렀는데, 디자인을 선택한 신부가 있었다. 그녀의 결혼식 베뉴는 시카고 메그니피션트 마일이라고 불리는 미시건 애비뉴 북쪽 끝에 있는 드레이크 호텔이었는데 도시적이고 멋진 결혼식을 올리기엔 적합한 장소였다. 그리고 결혼식이 끝나고 몇 주 후, 종종 우리한테 감사카드와 사진을 보내오는 다른 신부들처럼 그녀에게서도 사진이 왔다. 그 사진들 중 첫 번째 사진은 바로 아래와 같은 사진. 시카고에서 로컬들이 즐겨찾는 Doughnut Vault라는 작은 도넛 가게 앞에서 찍은 사진이다.

Pen/Carlson Photography

이유는 물어보질 않았으니 모른다. 결혼식이 있는 호텔에서 차로 5-6분 거리 정도밖에 안되니 힘들게 찾아온 건 아니겠지만, 작은 도넛 가게에 굳이 와서 사진 한 장을 찍고 간 걸 보면 뭔가 사연이 있을 법도 하다. 직장 생활을 같이 하면서 늘 여기서 도넛 하나를 사서 먹는 잠깐 데이트를 했을 수도 있고, 아니 좀 극단적 가정을 해보면 둘이 따로 아침에 도넛을 사러 왔다가 처음 만났을지도 모르는 일. 이유야 어찌 되었든, 나는 이 사진이 내가 소장?한 수백 장의 웨딩 사진들 중 가장 아름다운 웨딩 사진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진정성이나 낭만을 경제적 여유의 부재가 결정한다면 그것도 좀 슬픈 일이다. 

세상이 불공평하다고 푸념할 수도 있겠지만, 이 나라에서 경제적 여유는 종종 사치가 아닌, 삶의 진정성이나 낭만을 찾고 가꾸는 도구로만 사용된다. 진정성, 낭만, 이런 단어들이 종종 경제적 여유가 없는 사람의 소소한 취향 정도로 여겨지는 우리네 문화와는 좀 거리가 있어 보인다. 그래서 이들에게 많은 경우 과시나 허세가 들어갈 자리는 우리나라보다는 훨씬 좁은 게 사실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사람 사는 곳은 다 같고, 여기서도 허세에 쩔은 웨딩은 쉽게 볼 수 있다. 우리가 하는 디자인의 특성 상 이런 부류의 사람들을 거의 만날 일이 없다는 건 어떻게 보면 나와 내 와이프한테는 축복과도 같은 일 일지도 모른다. 보여지는 웨딩이 아닌 (그 웨딩이 작든 크든 간에) 나의 가장 소중한 사람과 새로운 출발을 하는, 그래서 그동안 의미 있었던 것들을 하나씩 꺼내 놓거나 다시 간직할 수 있도록 새로 담기 시작하는 그런 날로써의 결혼식. 우리도 결혼식의 규모에 상관없이 이런 소소한 진정성을 담기 시작한다면 언젠가는 하고 싶고 또 가보고 싶은 웨딩이 많은 그런 문화가 정착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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