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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enneth Jan 03. 2019

우리 안에도 Lazzaro가 있을까?

영화 랏자로 펠리체와 로베르토 베니니에 대한 생각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영화를 아직 보시지 않은 분은 읽지 마시길 바랍니다.)


랏자로 펠리체 (Lazzaro Felice), 넷플릭스가 배급한 이 영화의 영어 제목은 Happy as Lazzaro이다. 뉴욕 타임스에서 "이 현대의 우화는 그 즉시 고전(instant classic)이다."라는 제목으로 극찬을 하는 등, 칸느 영화제뿐 아니라, 많은 평론가들이 영화가 가진 알레고리 그리고 관객들에게 던져주는 메시지에 주목했다. 랏자로 펠리체는 감독인 앨리스 로바커 (Alice Rohrwacher)가 한 인터뷰에서 이야기했듯이,  인간 본연의 모습들이 그래도 어느 정도는 반복될 수 있었던 과거로부터, 그 순환이 깨어진 채로 현재로 옮겨온 우리네 삶의 모습을, 과거에 대한 향수는 걷어내어 버리고 사실주의적인 색채로 그리고 있는 영화이다.    


이 가슴 시리도록 순박한 청년이 왜 나로 하여금 한동안 잊고 있던 이탈리아의 감독, 로베르토 베니니를 떠올리게 했을까?

물론 첫 번째 이유는 로베르토 베니니의 아내이자 내가 본 그의 모든 영화에 출연한 Nicoletta Braschi가 이 영화에서 Marchesa Alfonsina De Luna라는 담배 농장주로 등장하기 때문일 것이지만, 단순히 그녀의 모습이나 이탈리아 마을의 모습 또는 언어에서 로베르토 베니니의 영화들이 떠오르지는 않았을 터이다. 아직 범하여지지 않은, 그래서 순수함을 간직하고 있다는 암시가 들어있는, 인비올라타(Inviolata)라는 이름을 가진 작은 마을, 이 마을 사람들은 농장주의 노동착취 아래 가난하게 살지만, 나름 시골 마을의 안정감과 평온함 그리고 무엇보다도 세대를 잇는 순환의 고리가 아직은 끊어지지 않은 채 살아가고 있다. 랏자로는 이 순박한 사람들 사이에서 조차 특별할 정도로 선함을 간직한 젊은 청년이다. 이 성스럽기까지 한 선함은 자본의 착취, 착취당하는 자들에 대한 경멸이나 무시조차 닿는 순간 바로 눈 녹듯 사라져 버리게 한다. 기적을 행하지도 않고, 믿음을 설파하지도 않고, 원죄를 논하지 않으면서 역설적으로 가장 종교적인 사랑과 용서의 모습으로 마을 사람들, 그리고 여주인공 안토니아의 앞에 서 있는 것이다. 로베르토 베니니가 영화 Life Is Beautiful에서 그려냈던 Guido Orefice, 영화 Pinocchio에서 보여주고자 했던 (그리고 디즈니의 피노키오를 사랑하는 많은 미국인들에게 평생 들을 욕을 한꺼번에 다 먹었던) 피노키오의 모습이 우리의 현실 속에서 가장 차분하고 조용하게 그러나 가장 아프게 서 있는 것이다.  


내가 로베르토 베니니의 영화를 사랑하는 이유는 그의 유머감각의 이면에는 가장 순수한 형태로의 인간 본연의 모습에 대한 집요한 애착이 있기 때문이다. 이 애착이 때로는 어떤 이들한테는 멍청함으로 때로는 귀찮음으로 다가오기도 하지만, 랏자로가 시간의 차이를 뛰어넘어 안토니아의 곁에서 그녀의 얼마 남지 않은 희망의 불빛을 살려주듯이, 현실이라는 어두운 그림 안에서 유일한 희망의 밝은 빛처럼 존재하는 이 원초적이라 할 정도로 단순한 선함은 어쩌면 지속적으로 그것을 보는 사람들의 가슴속에서 작은 랏자로가 존재하는 기적을 일으키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랏자로와 구이도의 죽음은 두 영화에서 피할 수 없는 숙명과 같은 것이다.

죽음의 끝에서 물리적 시간을 뛰어넘어 다시 돌아온 랏자로는 이 영화의 말미에서 자신과 마을 사람들을 착취하던 농장주의 아들과 딸이 재산 모두를 은행에게 빼앗겼다는 이야기를 듣고 은행으로 향한다. 그에게는 착취나 악행이라는 것의 의도를 가져본 적도 느껴본 적도 없기에, 그에게 농장주의 아들은 은행에서 가져간 돈을 돌려주어야 하는 친구이고 형제일 뿐이다. Life Is Beautiful의 주인공 구이도 역시 가족을 살리기 위해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바치지만 그 역시 그 자신의 선함으로 인해 자신의 삶을 앗아가는 사람 또는 시스템의 악한 면을 보지 못한다. 구이도의 목숨을 앗아간 나치를 비난하는 우리들이 어쩌면 랏자로를 때려죽인 은행 안의 지극히 평범한 시민들은 아닐까? 구이도를 죽음으로 몰아간 2차 대전과 랏자로를 죽음으로 몰아간 현대사회의 지극히 평범한 무관심과 경멸, 이 두 가지의 간극이 우리가 생각한 만큼 크지는 않을 수도 있다는 걸 앨리스 로바커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서 보여주고 있는 듯하다.   


랏자로가 은행에서 숨을 거두는 순간, 그가 처음 절벽에서 추락했을 때 그를 잡아먹으려 했던 늑대가 다시 등장한다. 절벽 아래에서의 첫번째 대면에서는 늑대가 한 번도 맡아보지 못했던 인간의 선량함의 냄새가 늑대로 하여금 랏자로의 부활을 막지 않게 했지만, 또다시 늑대가 나타났을 때는 평범한 시민들에게 걷어차여 숨진 랏자로의 영혼은 그 늑대와 마침내 하나가 되어 떠나간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것은 어쩌면 이 영화를 통해 감독이 던지는, 현대 사회가 만들어 놓은 이 단선적이고 비인간적인 사회에 지금 필요한 것이 원초적 선함인가 아니면 반기를 드는 저항인가라는 질문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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