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외편 3] 심야의 변호사
나는 송무로 먹고사는 사람이다. 서초동 변호사 업계는 쥐똥만큼 작은 바닥에서 각양각색의 변호사들이 발가락 하나씩 내딛고 아슬아슬 젠가(Jenga)를 하는 형국인데, 아직까지도 다수가 이른바 ‘송무’에 종사한다.
‘송무’라고 하면 또 뭐 괜스레 거창한 일을 뜻하는 것 같아 보이지만 사실 알고 보면 별거 없다. ‘송사할 송’ 자와 ‘힘쓸 무’ 자를 써서 ‘訟務’라 하는데 ‘송사에 힘쓰는 것’, 그러니까 이 법원 저 법원 쫓아다니며 변호인 혹은 대리인으로서 각종 재판에 출석하고 변론하는 일을 말한다.
영화나 드라마를 보다 보면 나름의 법률 자문과 고증을 거쳤다는 작품조차 민사재판 중 ‘피고 변호인’이 등장하거나 형사재판 중 ‘피고 대리인’이 등장하고, 생전 변호사 찾을 일 없는 보통 사람이야 뭐... 어쩌면 당연하게도 ‘변호인’과 ‘대리인’을 별 구분 없이 섞어 쓰는데, 사실 변호사를 대리인으로 칭하는 경우와 변호인으로 칭하는 경우는 엄연한 차이가 있다. 형사재판의 피고인(이때 ‘피고’라 하지 않고 ‘피고인’이라 한다)을 위해 변론하는 변호사는 ‘변호인’이라 부르고, 그 외 민사, 가사, 행정 등 사건의 원고 내지 피고를 위해 변론하는 변호사는 ‘대리인’이라 부른다.
물론 이까짓 거... 대부분의 사람들에겐 알아봤자 이 몸이 죽고 죽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할 때까지 쓸모없는 TMI인지라 어떻게 부르든 찰떡같이 알아들으면 그만인데, 하필 이 바닥 사람들은 별 사소한 거에도 유난히 예민하게 구는 습성이 있다. 그러니 언젠가 변호사와 대화를 할 때 ‘변호인’과 ‘대리인’을 또박또박 구분해 사용한다면 깨알 같은 실무 지식의 우위를 뻐기려던 변호사의 속내를 뜨끔하게 할 수 있다.
여하튼 송무변은 '대리인' 내지 '변호인' 역할을 주업으로 삼는 변호사를 지칭하는 말로, 사람들이 ‘변호사’라고 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올리는 이미지에 부합하는, 어쩌면 가장 클래식한 타입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실상 송무판 변호사의 삶은 흡사 장돌뱅이와 같다.
요즘 세상에 변호사 사무실 간판만 내걸고 있어도 제 발로 찾아와 “아이고 선생님 내 좀 보소” 하는 마음씨 좋은 고객님은 결코 없다. 차라리 입을 와앙 벌린 채 드러누워 호박이 넝쿨째 굴러들어 오길 기대하는 게 나을 걸. 그래서 변호사고 자시고 간에 자반고등어 한 손 살 형편도 안 돼 손가락이나 쭙쭙 빨며 ‘어허 짜다’ 하는 신세를 면하려면 전국을 무대로 재판을 뛰어야 한다. 어디 그뿐인가, 재판 다니는 것과는 별개로 돈 될 법한 사건이 있다면 산 넘고 물 건너 하루에 한 번 연락선이 올까 말까 하는 깡촌 오지인들 마다하지 않고 찾아가 영업도 뛰어야 한다.
그렇게 왕복 몇 시간을 떠돌다 비로소 사무실에 돌아오면 오늘의 내 시간은 이미 증발해버린 지 오래이건만, 누군가가 책상에 고이 모셔놓은 서류 더미와 함께 오늘의 내 할 일은 처음부터 다시 시작되는 기이한 현상이 일주일에 적어도 두세 차례씩 반복된다.
사실 어느 직장이든지 ‘9 to 6’ 하면서 따박따박 월급 주는 데 없고, 워라밸이니 라퀄이니 오지고 지리게 챙겨주는 데 역시 없다. 자선 사업체도 어려운 우리 이웃한테나 자선하지 직원들에게 자선하는 건 결코 아니고, 곳곳에 ‘사장님이 미쳤어요’를 써붙여놓은 가게일지라도 그 사장님은 고객님한테나 미쳤지 직원들한테까지 미쳐서 다 퍼주시는 분은 결코 아니다(게다가 알고 보면 사장님은 처음부터 미친 적이 없기 때문에 고객님한테도 대책 없이 퍼준 적이 없다).
이런 사정은 월급쟁이 송무변도 마찬가지라서 꼬박꼬박 정시 출근 정시 퇴근해가지고는 좀처럼 주어진 일의 납기를 맞추기가 어렵고, 그러다 보니 마치 생활처럼 야근이 찾아오고, 그런 생활을 거듭할수록 텅 빈 사무실에 홀로 남은 장돌뱅이의 목은 점점 쇄골 밖으로 뽑혀 나와 거북이의 그것처럼 유려한 아치를 그리게 된다.
머리는 있지만 생각은 없는 채로, 뭔가에 홀린 듯이 그저 모니터 불빛을 따라 좌우, 위아래로 늘어진 모가지를 흔들다 보면 어느새 밤이 깊어지는데, 이쯤 되면 울컥 반에 서글픔 반인 묘한 기분이 든다. ‘이미 아무것도 안 한 채 죽어라 멍만 때려잡다 야밤이 되었지만 여전히 아무것도 하기 싫다’라든지, ‘그래도 이 시간에 자리 깔고 앉아 있는 거 누가 좀 봐주면 좋을 텐데 꼭 이럴 땐 아무도 없지’처럼 도대체 상대방이 누구인지 알 수 없는, 그러나 진하디 진한 원망 겸 서글픔이 밀려드는 것이다.
꿈, 희망, 청춘, 내일 같은 것 따위 깡그리 학교 앞 PC방에 쏟아붓고 살던 대학생 시절 어느 날엔가 변호사의 일상을 리얼하게 담았다는 TV 다큐를 본 적이 있는데, 희한하게도 이 양복쟁이들은 하루 종일 뭘 했는지 밥 먹듯이 야근을 해댔고 매일 이렇게 사느냐는 인터뷰엔 “허허 이제부터가 시작인데요 뭘”이라며 짐짓 피로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당시 나는 이미 ‘중증 공감 장애’ 등의 질환을 앓고 있었기 때문에 당연하게도 ‘거 세상 바쁜 척 혼자 다 하네’ 하는 식으로 고깝게 빈정댔으나, 그 시절에 비해 지금의 내 입장이 제법 바뀌고 보니 그때 그 변호사가 흐릿한 눈으로 내뱉은 멘트가 전부 연출된 것만은 아니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우리 모두는 어렸을 때부터 역지사지의 미덕을 배우지만, 실제로 내 입장이 완전히 남의 입장으로 변모하는 사태가 벌어지지 않는 한 글로 배운 역지사지 따위가 자연히 실천되지는 않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