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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계형변호사 Jul 13. 2020

말로 합시다.

[번외편 4] 미소 속에 비친 고객님 얼굴(feat. 염화시중)



"어느 날, 석가모니가 영산회(靈山會)에서 법좌에 올라 연꽃 한 가지를 들고 말없이 대중을 둘러보았다. 아무도 그 뜻을 몰랐으나 오직 마하가섭만이 그 뜻을 깨닫고 미소로써 답했다."


'염화미소 [拈華微笑]' 혹은 '염화시중의 미소'란 이 고사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그러니까 방점은 '미소'에 있는 게 아니라 서로 말없이도 속 뜻을 알아차리는 그 어떤... 대통찰의 관계에 찍혀 있다고 할까.




우리 고객님 중에 성 사장이라는 이가 있었다. 자그마한 유통업체를 운영하는 그는 어째서인지 수시로 송사에 휘말렸고, 단기간에 우리 회사 방문 빈도가 급성장하여 금세 단골이 됐다.


민사와 형사를 아울러가며 원고와 피고, 피의자와 피고인, 거기다 때로는 증인 내지 참고인까지, 한 몸으로 동시에 최소 네다섯개 배역쯤 껌으로 소화하는 그를 보고 회사 사람들은 모두 경탄과 함께 다소간의 숭배 의식을 가졌다. 만약 소송전에 철인 6종 경기가 있었다면 이 사람은 누워서 역주행을 해도 우승이고, 올림픽이 열렸다면 5관왕 정도는 기본이라 목에서 금덩이가 떨어질 날이 없었을 거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성 사장은 이 바닥 일로는 나름의 전문가였던지라 어지간해서는 변호사를 찾을 일이 없을 법도 한데 의외로 툭하면 우리 회사를 찾았다. 원숙한 경험과 대범한 성격이 마치 일신시담(一身是膽)의 조자룡 같던 성 사장이지만 그에게는 결정적인 약점이 하나 있었다.


성 사장은 말 주변이 없었다. 머릿속에 이런저런 생각은 가득한데 그 꽉 찬 콘텐츠를 말로 풀어서 세상 밖으로 내어놓는 일에 유난히 취약했다. 게다가 성격이 급하기로는 눈먼 토끼 꽁무니에 붙은 호랑이 같은지라 항상 말 보다 생각이 앞섰고, 바람처럼 날아다니는 생각을 따라잡지 못한 말은 대충 중간에서 널브러져 있기 일쑤였다.


그날도 성 사장은 거래처로부터 물품대금을 제때 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피소당해 꼬깃꼬깃한 소장을 쥐고 나를 찾아왔다. 고요한 회의실에서 가만히 그의 표정을 살펴보니 이미 머릿속에 온갖 생각이 넘실거리는 중이라 톡 하는 순간 격분의 대홍수가 터질게 분명했다. 나는 한껏 심호흡을 하고 방아쇠를 당겼다.


"자주 뵙네요? 오늘은 어쩌다"까지만 말했는데도 나는 성 사장이 뿜어내는 대홍수를 온 얼굴로 때려 맞았다.


"변호사님, 이거 봐 이거. 이거 아니거든 이거. 그지?"


"아니, 얘네들 하는 소리가 이거 이거 말도 안 되는 거거든. 내 말 무슨 뜻인지 알죠?"


"내가 지금까지 지들한테 해준 게 얼만데. 내가 그동안 해준 거 알죠?"


"나는 그러니까 이런 말을 하고 싶은 거야. 내가 뭔 말하려는지 알죠?"


"억울한 걸로 치면 내가 제일 억울한 사람이지. 내 말 이해하죠?"


"...... 저기 내 말 듣고 있어요?"



...... 넵.


아까부터 듣고 있었는데요. 아직 아무 말도 안 하셨는데요...


우리 고객님은 대체 누구랑 얘기하시길래... 또 나만 못 알아들었다.


그냥 씨익 미소를 지어 보이며 알아들은 척할까도 잠시 생각했지만, 어차피 우리 고객님은 석가모니가 아니고 나는 마하가섭이 아니다. 그러니까 성 사장이 소장을 들고 말없이 나를 내려다보더라도, 내가 그에 화답해 실실 미소를 짓더라도, 우리 사이엔 깨달음이 통할 리 없다.


하지만, 성 사장은 저런 식으로 대략 2시간에 걸쳐 내게 염화시중의 깨우침을 강요하셨다. 물론 우매한 나는 고객님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고,  마음속으로 대자대비한 부처님께 다급한 헬프를 10번도 넘게 쳤으나 부처님은 부재중이셨다.


뒤통수에 약간의 땀방울이 맺힌 채로 동공이 한껏 확대되어 멍하니 앉은 나를 보던 성 사장은 제풀에 지쳤는지, "쓰읍... 거 우리 변호사님은 사람 말을 잘 이해를 못 하시는 거 같애..."라며 찜찜한 표정을 지어 보이다 담배 한 대 피고 다시 얘기하자며 회의실을 나섰다.


... 아니 사람이 말을 해야 이해를 잘하든가 못하든가 하지요...


끽연하러 가신 성 사장을 기다리며 나는 2라운드부터는 역할을 바꿔서 내가 석가모니 역을 맡겠다 다짐했다.


"사장님, 이거 이런 게 아니잖아요. 그쵸?"


"아니, 얘네들 하는 소리가 이거 이거 말도 안 되는 거네요. 제 말 무슨 뜻인지 아시죠?"


"그러니까 저는 이렇게 대응하시라는 거예요. 제가 뭔 말하려는지 아시죠?"


"이 사건은 적절히 잘 대응하면 되겠습니다. 제 말씀 이해하시죠?"


"저기 고객님? 내 말 듣고 있어요? 눈이 풀리신 거 같은데?"


... 말로 합시다. 우리 따위가 미소 지어봤자 염화미소 근처나 가겠나요 어디...



<말 안 하면 뭔 말인지 어떻게 알아요... 궁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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