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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아미티스 Nov 06. 2023

프랑수아 트뤼포 <쥴 앤 짐>(2)

40년에 걸친 것치곤 다소 짧은 리뷰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로부터 2023년 현재에 이르러.     


네이버 블로그에 연재 중인 ‘파리의 동쪽’을 쓰다가, <쥴 앤 짐>의 촬영 장소 이야기를 꺼내게 되었다. 거기선 주로 파리 20구에 국한된 장소를 다루었는데, 쓰다 보니 문득, 이젠 영화를 다시 보면 그 장소가 어디인지, 적어도 파리라면 알 수 있으므로, 장소를 알아보는 재미로라도 영화를 다시 보고 싶어졌다. 20대에 보았던 영화를 수십 년이 지난 후에 다시 보면 어떨까도 궁금했다. 이번 회차에서 <쥴 앤 짐>을 고른 이유다. 파리의 장면은, 주로 20구 벨빌 공원 부근에서 촬영되어 더욱 친밀감이 느껴졌고, 2017년에 세상을 떠난 잔 모로의 젊은 시절 모습과 재회하는 약간의 뭉클함도 느껴졌지만, 20대에 가볍게 보았던 삼각형의 사랑놀이를 이젠 좀 더 깊어진 시선으로 보게 되었다는 차이가 있었다.      

    

쥘과, 그 사이에서 낳은 딸아이와 함께 살고 있는 카트린은, 전쟁이 끝나고 그들을 찾아온 짐에게 노래를 들려준다. 멜로디에 중독성이 있는, ‘인생의 소용돌이(Le Tourbillon de la vie)’라는 이 노래는 사실, 영화가 만들어지기 전에 이미 완성되어 있던 노래라고 한다. 우리말로 옮기면 좀 어색한 부분이 있긴 하지만, 내용 전달 차원에서 대략 투박하게나마 옮겨 본다.     


열 손가락에 반지를 끼고

손목엔 팔찌를 주렁주렁 끼고

그녀는 날 농락하는 목소리로 노래를 했네     


그녀의 오색 찬란한 눈에 난 홀딱 반해버렸고

갸름하고 창백한 얼굴은

내겐 치명적인 팜 파탈

내겐 치명적인 팜 파탈     


우린 서로 알게 됐고, 서로를 알아봤고

눈이 멀고, 또 멀었고

다시 만났고, 다시 뜨거워졌고

그러고는 헤어졌지     


우린 각자 인생의 소용돌이 속으로 다시 떠났지

이런, 이런, 이런, 어느 날 저녁 그녀를 다시 만났네

너무도 오랜만에 너무도 오랜만에      

(중략)     

서로 알게 되어 서로를 알아봤을 때

왜 눈이 멀었을까? 왜 눈이 멀었을까?

다시 만나서 뜨거워졌을 때

우린 왜 헤어졌을까?     


그런데 둘은 또다시 떠났지

인생의 소용돌이 속으로

우린 계속 돌고 돌았지

서로를 껴안고

서로를 껴안고     


노래 가사는 이 영화의 줄거리를 그대로 요약해 놓은 것과도 같다. 트뤼포는 혹시 원작소설 뿐 아니라 이 노래에서도 영감을 받은 것은 아니었을까. 이 노래는 1957년에, 이란 태생의 프랑스 화가, 작가이자 싱어송 라이터인 세르주 레즈바니라는 사람이 썼다. 그는 당시 잔 모로의 연인 장 루이 리샤르의 가장 친한 친구였는데, 처음엔 친구들끼리 한잔하면서 부르려고 만든 노래였다. 이 ‘친구들’의 면면이 좀 화려한데, 잔 모로, 프랑수아 트뤼포, 보리스 비앙 등 모두 프랑스의 문화예술계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사람들이다.      


1961년 <쥴 앤 짐> 촬영 당시, 트뤼포는 레즈바니에게, 두 남자 사이에서 주저하다가 둘 다 사랑하기로 하는 여자 이야기인 영화에 너무 잘 어울리는 이 노래를 써도 될지 물었다. 1961년에 출시된 음반에는 바시아크라는 예명을 썼다. 세르주 레즈바니는 세간의 관심을 피해 파리로부터 멀리 떨어진 남프랑스에서 조용히 사는 삶을 선호했고 이 사실은 2015년에서야 그의 자서전을 통해서 알려졌다.     


인생의 소용돌이에 빠진 사랑의 삼각형은 그 결말이 어찌 되었을까? 영화의 앤딩에 이르러, 쥘이 짐과 카트린의 장례를 마치고 느끼는 ‘안도감’은 이 영화의 중요한 정서다. 그의 ‘안심’은 어디서 비롯되었을까. 자신의 삶을 형벌로 만들었던 인물이 사라진 것, 끊임없이 괴로움을 안겨다 준, 소위 ‘사랑’으로부터 벗어나게 된 것. 그러니까 이젠 드디어 벗어나게 된 그 느낌. 옥죄어 있던 것이 벗겨진 느낌. 나도 어떤 사람의 죽음에서 그런 감정을 느껴 본 적이 있다. 죽어야 끝나는 것이 있다. 그건 내 의지를 벗어나는 어떤 것이다. 내 안에는 여전히, 나를 포함한 누군가가 죽어야 끝나는 감정이 남아 있다. 나 역시 오랜 시간 동안 나르시시스트의 먹이로 살아온 이력이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런 내게는 대단원에 일어난 사건이 전혀 충격적이지 않았다. 연극성 성격장애까지 갖춘 나르시시스트 카트린이라면 충분히 저지를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거짓말하는 남자의 눈에 뿌리겠다고 황산을 병에 담아 가지고 다니는 여자가 아니었나.


카트린은 아마도 내면에 깊은 상처나 결핍이 있고, 그 상처를 무기로 휘둘러 먹이를 잡아 먹어야 생존할 수 있는 문제적 인간이었다. 황산이 담긴 병이 그 상징이 되었을 것이다. 병이 깨지면 자기 자신도 다치게 되니까. 그러나 그녀가 생존의 길이라고 생각했던 그 길은 결국 파멸의 길이었다. 영화에서는 그녀가 가진 내면의 상처가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았다. 영화를 보지 않은 분들을 위해서 앤딩의 사건에 대해서는 함구하는 편이 낫겠다. 사람이 느낄 수 있는 수많은 감정의 결을 짚어주고, 헤집어 낱낱이 보여주는 것이 예술가의 역할이다. 카트린에게서 벗어나지 못하고 평생 끌려만 다니던 쥘의 안도감은, 여러 개의 기둥을 한데 모아주는, 성당 궁륭의 키스톤(keystone) 같은 것이었다. 인생이라는 거대한 지붕을 받치고 있던 이 수많은 감정의 기둥들. 이 기둥들은 서로 다른 높이로, 서로 다른 속도로 제멋대로 자라나서 그 지붕은 파도처럼 물결 친다.      

<쥴 앤 짐>의 일부 리뷰를 보고 든 생각이 있다. 도덕의 잣대로‘만’ 작품을 평가하는 것은, 예술 작품을 감상하거나 분석하는데 더 깊이 있는 시선을 갖는 일을 방해한다. 인간이 그러하듯이 예술 작품 또한 여러 층위와 차원을 달리하는 관점으로 바라보는 것이 우리의 삶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 등장인물이, 혹은 그 작품을 만든 이가 부도덕한 행위를 했다고 해서 작품 전체를 매도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영화를 포함한 모든 예술 작품은 도덕 교과서가 아니다. 문화계에서 일어났던 여러 가지 소란들이 생각난다. 도덕우선주의적 관점은 파시즘적이며, 일종의 분서갱유 같은 것이 아닐까. 죄는 미워하되 작품은 작품으로만 대할 수 있는 것은 성숙한 눈을 통해 가능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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