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 인 더 풀>
수영장에서 만난 보들레르의 알바트로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류연수 감독의 첫 장편 <보이 인 더 풀>
‘수영을 좋아하는 소녀가 물갈퀴 달린 소년을 만나 첫사랑에 빠진다.’
이것은 한국영화아카데미 공식 블로그의 2024년 졸업영화제 소개글에 나오는 구절이다. 그리고 이 영화를 멜로, 스포츠, 성장 드라마로 분류하고 있다. 어쩌면 나 자신이 이런 형식적인 분류에 몹시 취약하기 때문에 “아, 이 영화가 이런 종류의 영화구나!”라고 뒤늦게 생각하기도 했다. 그런데 나는 이 멜로, 스포츠, 성장 영화에서 난데없이 보들레르의 알바트로스를 보았다. 그러한 나의 입장에서는 소년의 발에 물갈퀴가 달려있다는 사실을 끝까지 숨기고 싶었는데 이미 이렇게 소개가 되어 버렸으니 어쩔 수 없다.
몇 년 전, 류연수 감독이 가톨릭 영화제에서 수상하며 주목을 끌었던 단편 <반신불수 가족>을 감상한 이후, 한국에도 우디 앨런을 능가할 감독이 등장할 것인가 하는 기대감이 한껏 높아져 있었던 터였다. 아버지의 와병으로 인한 한 가족의 고통스러운 상황을 유머러스하게, 그러나 결코 가볍지 않게 풀어나가는 기지가 돋보였던 작품이었다. 이번 작품은 류감독의 첫 장편으로, ‘보이 인 더 풀’이라는 제목과, 전반부에 펼쳐지는 이야기의 배경(중학생 수영부, 여름방학 성장기 등)에서 일본 영화 <워터 보이즈>나 <기쿠지로의 여름> 같은 영화들이 떠올랐지만, 후반으로 갈수록 이들과는 전혀 다른 결이 펼쳐졌다.
한 여학생이 여름방학날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하염없이 운다. 방학에 어디론가 멀리 떠나는 모양이다. 친구들은 집으로 놀러도 가고 전화도 한다고 위로한다. 여동생과 함께 엄마의 차를 타고 떠나는 소녀 석영. 어린 동생은 엄마에게 묻는다. ‘바다는?’ ‘아빠는?’
어느 시골, 1970년대 건축양식으로 지어진 양옥에 도착한 석영은 엄마에게 여기서 계속 사는 거냐고 묻자, 엄마는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고 답한다. 아빠는 언제 오냐니까 일이 바쁘다고 한다. 소녀가 짜증을 내니 엄마는 가서 짐이나 풀라고 소리 지른다. 어른들의 일은 왜 매사가 이 모양인가 싶은 석영은 바닷가 마을을 이리저리 혼자서 돌아다니다가 골목길 슈퍼 주인 아주머니를 만난다. 아주머니는 조여사댁 손녀가 이렇게 컸네 하며 아는 척을 한다. 조여사는 석영의 외할머니다. 얼마 전에 돌아가셨다. 그러니까 그 집은 할머니가 사시던 석영의 외가다.
동네에는 실내수영장이 하나 있다. 석영은 예전에 수영대회에 나가서 트로피까지 받은 경험이 있다. 아마도 수영연습은 소녀의 생활에 주요 활동 중 하나여서 방학에도 쉬지 않고 연습을 하려는 모양이다. 실내 수영장에 갔다가 우두커니 앉아 있는 어떤 남자애를 만난다. 바닷가를 거닐다가 물속으로 들어가 수영하는 소녀. 갑자기 쥐가 난 모양인지 허우적댄다. 인적 드문 해변에 갑자기 누군가 나타나 소녀를 구한다. 물밖으로 나가 정신 차려 보니 아까 수영장에서 본 남자애였다. 남자애는 수영장에서 청소일을 하는 할머니의 손자였고, 부모 없이 할머니와 단둘이 살고 있다. 둘은 조금씩 가까워지고, 어느 날, 사랑의 고백처럼 물갈퀴의 비밀을 터놓는 소년 우주. 이 비밀은 아무도 모르니 석영 혼자만 알고 있어야 한다고 했다.
중학교 수영팀 중 우주만 코치의 눈에 띄어 발탁되고, 평범한 수영선수인 석영은 수영을 그만둔다. 물갈퀴의 힘 덕분이었는지 우주의 기록은 나날이 좋아지고 고등학생이 되어서는 한국 신기록까지 경신하게 된다. 하지만 그만 석영 혼자만 알고 있던 그 비밀이 석영의 입을 통해 새어나갔다. 이후 후폭풍이 몰아치는데……
알바트로스란 새는 그 어떤 새보다 더 멀리 더 오래 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날개를 쭉 폈을 때 그 길이가 4미터 가까이 되는 새도 있다고 한다. 어떤 새는 두 달 안에 지구를 일주하며, 날개를 퍼덕이지 않은 채 6일 동안 활공을 할 수도 있다고 한다. 스스로 날갯짓을 하는 것이 아닌 바람의 힘으로만 날아서 수평비행에 특화된 날개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바람이 강하게 불면 더 잘 날 수 있어서 폭풍우에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19세기 프랑스의 시인 보들레르는 뱃사람들에게 잡혀 괴롭힘을 당하는 알바트로스를, 뛰어난 재능에도 평균적인 인간 사회에서 알아주지 않는 시인 자신의 운명과 동일시하며 시 한 수를 지었다.
알바트로스
자주, 뱃사람들은 장난 삼아
거대한 바다새 알바트로스를 잡는다
슬픈 심연 위를 미끄러지듯 달리는 배를
느릿느릿 뒤쫓는, 항해의 동반자
새들을 갑판 위로 내려놓자 이내
이 하늘의 제왕들은 어색하고 수줍은 몸짓으로
거대한 순백의 날개를 측은하게도
옆구리에 매달린 노처럼 내려놓는다
이 날개 달린 여행자는 얼마나 부자연스럽고 무기력한 지!
예전에 그토록 멋지던 그는 이제 우스꽝스럽고 추하기만 하네!
어떤 이는 담배 파이프로 부리를 찔러보고
어떤 이는 절룩거리며, 하늘을 날던 불구의 새를 흉내 내네
시인은 구름의 왕자를 닮아
폭풍우를 넘나들며 궁수도 아랑곳없었지만
몰이꾼들의 함성 속에 지상으로 유배되어
거대한 날개 때문에 걷지도 못하네
(번역. 길혜연)
뱃사람들에게 붙잡힌 알바트로스의 운명은 비극적이지만 물갈퀴 달린 소년의 후일담은 비극적이지만은 않다. 물갈퀴를 잃어버린 소년 우주는 물갈퀴 없이도 사는 법을 배운다. 물갈퀴를 제거해서 피가 흐르는 발에 붕대를 감고 수영장에 나타난 우주의 장면에서 난 속으로 울었다. 피가 흐르는 붕대를 감은 채 출발신호에 맞춰 물로 뛰어든 우주는 온 데 간데 없이 사라진다. 내 물갈퀴가 없어진 것만큼 슬펐고 거대한 날개가 꺾여 더 이상 하늘을 날 수 없는 알바트로스의 슬픔까지 가세했다. 알바트로스의 절망감에 감정이입된 저주받은 시인의 모습도 겹쳐졌다. 우주가 나중에 석영에게 말했듯이 물갈퀴는 어느 날 조금씩 사라진 것일까 아니면 석영이 억지로 없애 버린 것일까? 류감독의 감각적인 연출력이 돋보였던, 환상과 현실이 살을 마주 대고 있던 그 수영장 장면을 이 영화의 키스톤(keystone)으로 꼽고 싶다.
우주는 물갈퀴가 없어진 채로 소녀와 재회한다. 우주와 함께 왔었던 수족관을 다시 찾은 석영은 수족관 수조 내부에서 잠수복을 입은 사내와 마주치고 사내는 자꾸 석영을 따라온다.
저절로 사라졌건, 일부러 없앴건, 물갈퀴가 사라진 삶, 누가 이 삶을 초라하고 못난, 실패한 삶이라고 손가락질할 것인가. 물갈퀴가 영원할 줄로 만 아는 것이 무지에서 비롯된 착각이라면? 한때 빛났던 물갈퀴를 추억하는 건 초라한 것도 실패한 것도 아니다. 지혜는 삶의 총체성을 볼 줄 알게 되면서 생겨난다. 재회한 석영과 우주에게는 후일담이 또 펼쳐질 것이라는 걸 우리는 안다. 그들은 모두 청춘이니까 안심이다. 류감독의 다음 작품도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