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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아미티스 Jul 17. 2024

지루하고 아름다운 영화

<프렌치 수프> by  트란 안 홍

    

트란 안 홍 감독의 영화는 지루하고 아름다워서 졸면서 보기 일쑤다. 졸면서 보는 영화의 장점은, 화집을 보거나 음악을 들을 때처럼 두고두고 반복해서 보게 된다는 점이다. 그러면 볼 때마다 다른 것을 발견하는 재미가 있다. 이번에도 예외 없이 중간에 졸았고, 그래서 어쩌면 중요한 장면을 놓쳤을 수도 있다.      


쥘리에트 비노슈와 브누아 마지멜의 조합은, 오래전 프랑스 영화제 상영작 <세기의 아이들>(1999)을 번역했던 일을 기억나게 해 주었다. 두 사람은 각각 조르주 상드와 알프레드 드 뮈세로 출연했었다. 25년의 세월은 이 커플에게 인생의 ‘가을’을 선사했고, 두 사람의 나이는 10년이나 차이 나는데, 연상인 쥘리에트가 더 어려 보였다.      


원작 소설은, 18세기의 저명한 역사학자이자 ‘못 말리는 식도락가’인 마르셀 루프라는 작가의 작품이다. 주인공인 도댕과 외제니는 허구의 인물이지만, 19세기의 실존 인물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영화를 보는 내내 <바베트의 만찬>(1987)도 생각났다. 영화가 개봉되던 해, 파리의 한 상영관에서 보았는데, 덴마크 영화라서 프랑스어 자막을 읽느라 고단했던 기억이 있다. 프랑스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때라서 자막 읽기도 힘에 겨웠던 것이다.      


영화는 도댕과 외제니의 요리 장면을 진심을 다해 보여 준다. 중간중간 그들의 레시피를 적어 놓고 싶은 충동을 느낄 정도였다. 보기에도 묵직한 동으로 만든 조리 기구, 대형 솥, 프라이팬, 작은 소스 냄비와 나무로 만든 국자, 뒤집개 그리고 석탄이나 장작으로 불을 지피는 대형 화로를 가지고, 정원의 텃밭에서 갓 따온 신선한 야채, 품질 좋아 보이는 고기와 생선, 동네 사냥꾼이 잡아 온 꿩이나 맷새를 요리한다.      


출처: 네이버 영화 스틸컷


요리하는 것을 싫어하지 않아서 때로는 요리하는 행위에서 마음의 평화를 얻기도 하는 나는, 맛있는 음식 먹는 것을 좋아하지만 먹방은 보지 않는다. 먹방으로 성공한 어떤 유튜버가 엄청난 양의 음식을 먹어치우는 것을 보고, 포르노를 볼 때와 똑같은 역겨움을 느꼈기 때문이다. 물론 적당한 수준의 맛집 소개 정도는 정보 수집 차원에서 보기도 하지만, 한계를 초월하는 욕망과 그 해소는 아무래도 역겹다. 식욕이 됐든 성욕이 됐든 그렇다. 수면욕은 좀 예외일까? 너무 많이 자는 사람을 보면 걱정스러움이 앞서지 역겨움을 느끼지는 않는다.       

두 사람은 20년간 완벽한 호흡을 맞춘 요리사들이다. 도댕은 미식계의 나폴레옹이라고까지 불리는 인물이다. 하루 중 많은 시간을 함께한 외제니에게 도댕은 여러 차례 청혼했으나 번번이 거절당했다. 하지만 도댕은 때로 한밤중에 외제니의 방을 방문했다.     


- 당신과 함께하지 않았던 밤이 어땠는지 알아요?     

 

외제니는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빙그레 웃으며 물었다.      


- 몰라요. 얘기해 줘요.      

- 침대에 누워서 상상하는 거예요. 내 방으로 오는 당신을. 당신이 조용히 방에서 나와 계단을 오르는 모습을. 20년 동안 딱 두 번이었어요. 그 상상 끝에 실제로 당신이 문을 열었던 것이.      


이렇게 말하는 외제니는, 사랑에 달뜬 여인의 표정을 보이다가 이내, 그 사랑의 덧없음까지도 알고 있는 얼굴을 한 성숙한 사람이었다. 이런 복합적이고 입체적인 표정을 지을 수 있는 배우라서, 나는 쥘리에트 비노슈를 좋아한다.  사랑의 덧없음에 대해서라면, 임윤찬 피아니스트가 쇼팽 에튀드 작품 번호 25번 제7번에 대해 남긴 코멘트가 마음 깊이 와닿는다.     


"젊은 시절에 대한 회한으로 아픈 상처를 간직한 채 홀로 사는 노인이 있습니다. 연인을 떠올리며 아픔을 잊으려고 하지만 연인의 기억은 점점 희미해져 결국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게 되는 장면이 떠오릅니다. (...) 에튀드의 전곡이 다 어렵지만 그중에서도 작품 번호 25번 제7번이 가장 까다로우면서도 연주의 즐거움을 줍니다. 첫 음부터 마지막 음까지 이어지는데, 첫 두 마디에 저의 감정을 표현해 보고 싶었습니다. 두 마디를 일곱 시간 연습했어요. "       


약관에 올드 소울을 지닌 이 피아니스트에게 빠져들지 않기란 어려운 일이다.      


청혼을 거절당하면서도 여전히 자신의 곁을 지키는 도댕에게 외제니는 어느 날 또 물었다.     


- 당신은 어떻게 20년 동안이나 나를 한결같이 대해 주었죠?

- 어거스틴 성인께서 말씀하셨지. 행복은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끊임없이 열망하는 거라고.     


병으로 외제니를 앞세우고 괴로워하던 도댕도 결국은 옛사랑에 대한 기억이 희미해져 가는 것에는 속수무책이었을까?     

이 영화는 요리로 사람의 오감을 현혹했지만, 결국은 사랑에 관한 영화다. 

프렌치 수프의 원제목은 『도댕 부팡의 열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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