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는 쉬고 아이들은 안 쉬는 날. 아빠는 뭘 할까?
아이 셋 아빠. 쉬는 날 '나' 관찰일기
징검다리 휴일이라서 연차를 썼다. 아내랑 데이트란 걸 해볼까 싶어서 아내에게 뭐 하고 싶은 게 없는지 물어보니 취미로 나가는 모임에서 선약이 있었다고 하신다. 막상 아내랑 뭘 한다고 해도 뭘 해야 할지 알아봐야 했다. 그래도 나 혼자서 뭔가를 결정하는 것에 비해 선택이 빠른 편이다. 서로의 시간과 취향의 교집합을 찾으면 되기 때문에 선택지가 많이 줄어드니까. 아이들이 있으면 그들에게 맞추는 것이 일반이고, 아내가 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거기에 맞추면 된다.
잠이 많지 않은 스타일이라서 늦잠을 자지 않는데 어제부터 몸 상태가 왠지 쳐지는 느낌이더니 오늘은 11시가 거의 다 되어서야 일어났다. 눈을 떠보니 이미 햇살과 온기가 집안 구석구석에 스며든 시간이다. 익숙하지만 아무도 없는 것이 낯선 공간 속에서 순간 무얼 해야 하나 하는 고민이 아직은 덜 깬 나의 뇌 깊은 곳에서 부팅됨이 느껴졌다.
오랜만에 온전히 내가 할 일 단독으로 결정을 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20대 초반부터 꽤 많은 사람들이 힘들어하기도 하는 혼자 놀기를 아주 편해하는 나였지만, 5인 단체 생활이 일상이 된 나에게 어느덧 낯선 것이 되어 있었나 보다. 불편한 느낌은 아니다. 빈 도화지를 나눠주고 자유 주제로 그림을 그리라고 하면 뭘 그려야 하나 하는 고민 같은 거랄까.
극과 극은 통한다고, 할 일이 없다는 것은 할 수 있는 일이 무한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머릿속을 스친 나의 하루를 채울 수 있는 일들은 이런 잡다한 것들이었다. 집에서 빈둥대기, 젤다의 전설 진도 빼기, 달리기 연습하기, 사놓고 안 읽은 책 보기, 영화관 가기, 잡다한 계획 펼쳐 놓기 (지키는 것은 별개다) 등등. 아무래도 가장 현명한 선택은 아이들과 같이 있을 때 하기 힘든 일이 아닐까. 아이들이 아침식사로 먹다 남긴 떡을 하나 입에 털어 넣고 오물거리며 일단 밖에 나가기로 했다.
화성행궁에 가기로 결정했다. 굳이 설명을 하자면 이유는 세 가지다. 첫째로, 요즘 웬만하면 주말마다 아이들과 어딘가를 가려고 노력을 하는데, 박물관 같은 곳을 가면 항상 아쉬웠던 부분이 나의 템포에 맞게 감상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아이들은 시각적인 감상만 하고 빠르게 지루해하기도 하고 두 돌이 안 된 막내를 우리 부부 중 하나는 잡으러 다녀야 하기 때문에 감상은 사실상 사치에 가깝다. 둘째는 어쩌다 정주행 한 알쓸신잡 때문이다. 이 프로그램 덕분에 역사나 세상 만물에는 스토리가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고, 그 스토리들에 대한 막연한 호기심이 생겼다. 마지막으로 수원은 나의 학창 시절이 묻어 있는 곳이라 향수가 있다.
외식마저도 아이들이 있으면 전략적이 된다. 자리가 많고, 움직임이 비교적 자유롭고, 음식이 빨리 나오는 곳을 고르게 된다. 오늘은 조용히 음식을 음미할 기회를 누리기로 했다. 기술의 힘을 빌려 맛집을 찾다 보니 수원 남문 쪽에 평양냉면집이 있었다. 왠지 모르지만 비싼 음식. 그런데 10000원에 먹을 수 있는 평장원이라는 곳을 발견했다. 나는 호불호가 갈리는 이 음식 마니아는 아니지만 아직 맛있게 먹어 본 적이 언젠가는 한 번 알아가보고 싶었다.
혼자 식당에 들어가서 유일하게 비어있는 4인석에 앉을 수 있었다. 운이 좋다는 느낌을 받는 순간 중의 하나는 내가 맛집에 들어가 앉고 나서 웨이팅이 생길 때이다. 오늘이 그랬다. 이 소소한 운빨의 힘마저 작용했는지는 몰라도 몇 번 안 먹어본 평양냉면 중에 가장 맛있게 먹을 수 있었다. 솔직하고 포장되지 않은 맛. 육수가 입 안을 적시는 순간 “바로 이 맛이야!”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탱글하고 은은히 고소한 탄수화물 향이 그득한 면과 한 점씩 올려진 ‘나는 소고기요’ ‘나는 돼지고기요’라고 자기소개를 확실히 하는 고기 조각들을 조화롭게 곁들여 먹고 나니 결론적으로는 맛있는 음식을 잘 먹었다는 감상이 남았다.
느긋한 걸음으로 화성행궁으로 향했다. 낮에 여유롭게 햇볕을 맞으며 걷는 것이 이렇게 좋은 일이었나. 새로운 욕심이 싹텄다. 낮에 해를 더 많이 받으면서 살 수는 없을까? 노동을 하지 않고 사는 것은 어려운 일일 것 같고, 낮에 쉬면서 밖에 돌아다니고 밤에 일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지 의식의 흐름대로 따라 걷다 보니 행궁에 도착했다.
매표소에서 입장권을 구매하고 들어섰는데 막연했다. 뭘 어떻게 봐야 할지 각이 나오지 않았고 그제야 나는 행궁이 뭔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혼자 둘러보기에는 마치 수박의 겉면만 보고 수박은 초록색에 줄이 있는 과일이라고 정의하는 것과 같이 끝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때 눈에 관광 안내소가 들어왔다. 운이 좋게도 15분 정도 있으면 시간대별로 있는 안내 가이드 프로그램이 있다고 해서 들어보기로 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지식은 화성행궁은 정조가 지었다는 것 정도였다. 가이드 분을 따라 보며 걸으며 얘기를 들으니 화성행궁이 지어진 이유와 목적, 그 안의 여러 공간의 의미와 용도 그리고 행궁이 대부분이 훼손되었으나 다시 복구되었던 슬프고도 놀라운 역사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뒤에 숨겨진 정조의 정치적, 인간적 이야기들이 매우 흥미로웠다. 학창 시절에 이런 역사에 대해 배울 때는 많은 이야기가 생략된 채로 배운다. 그래서 흥미를 갖지 못했던 것 같다. 정조가 화성행궁을 지은 것은 래미안은 삼성이 짓고 힐스테이트는 현대에서 지었다는 정도의 팩트를 아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안내 가이드를 들으려고 기다릴 때 엄마 두 명과 그 딸들 각각 한 명씩 같이 기다리고 있었다. 엿들을 생각은 없었으나 귀에는 덮개가 없는 관계로 듣게 되었다. 엄마들은 딸이 이 가이드를 꼭 들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아이들은 이미 학교에서 배운 내용인데 왜 꼭 이런 것까지 들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한다. 순간 그 나이대의 나로 돌아가져 버려서 공감해 버렸다. 나도 이제 와서 인생을 잘 살아내고 싶은 마음에 그 지혜를 역사나 인문학 같은 것에 관심이 겨우 생기고 있는데, 아이들에게는 지루한 학업의 연장일 수밖에 없기도 할 것이다. 그런 아이에게 엄마가 가이드를 들어야 이유를 얘기했다: 이번 너의 사회 점수가 너무나 처참했기 때문이야.
급 진지한 얘기이지만 교육은 너무너무너무 어렵다. 이제 갓 인생 1회 차를 시작한 존재에게 아직 1회 차의 반환점도 돌지 않은 부모라는 사람들이 중요하다고는 하지만 살로 와닿지 않는 모호한 가치를 알려주는 행위의 난이도는 특상급이 아닐까. 커다란 스테이크를 간장종지에 담으려 해 봤자 굴러 떨어지는 것이 자연스러운 결말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아주 운 좋게 그게 담긴 것을 어디서 보게 되면 나도 모르게 우리 아이가 어떻게든 똑같이 담아내기를 바라며 욕심을 낸다. 나 자신도 아직 온전히 담지 못했을지도 모르면서 말이다. 나도 그 욕심이 없다고 말 못 하겠다.
아이들과 외출을 하면 아이들을 돌보는데 신경이 쏠려 있어서 그 당시에는 잘 느끼지 못하는데 생각보다 빨리 체력이 소진되어서 뭔가 더 구경하려던 계획이 수정하고 행리단길 카페에 눌러앉아 아이스아메리카노를 쪽쪽 빨며 이 글을 썼다. 생존 체력과 일상 체력은 다른 걸 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자빠타임을(자유아빠타임이라는 말을 만들고 굳이 줄여도 본다) 종료하고 저녁 식사 시간에 맞춰 일상으로 복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