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와 편집의 공간을 꿈꾸며
‘실력 없는 목수가 장비 탓한다‘는 속담도 있다지만 사실 좋은 장비 없이는 제대로 작업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하지만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환경 설정보다는 의지의 강인함과 노력의 정도가 모든 일의 성패를 판가름한다고 믿는 오류를 범한다. 사실 나 역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의지만 있다면 번드르르한 환경 따위는 큰 필요가 없다고 믿었다. 그런 탓에 개인의 공간을 꾸미는 데 무심했고 디자인은 그저 외연이라고만 생각했다.
이런 가치관은 집에서 책을 읽을 때 다음과 같은 겉모습 그리고 결과로 나타났다. 일단 침대에 올라가 허리 뒤로 대형 쿠션 베개를 넣는다. 그리고 책받침 용도로 무릎 위에 접은 이불이나 작은 베개를 올리고 책이나 아이패드를 열어 읽는다. 읽는 내용이 재미있고 이해가 되느냐가 관건이었기에 몇 년간 별 생각없이 이렇게 독서해 왔다. 그러다 보니 별도의 서재를 꾸며야겠다는 생각을 못했고 또 그러고 싶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사들이는 책은 쌓여가는데 놓아둘 공간은 없었고 그 결과는 아래와 같다.
그런데 공간의 결핍으로부터 오는 불편함과 부작용은 생각보다 컸다. 다시 말해 잘 꾸며진 공간이 주는 안락함을 누리지 못했고 못하고 배움에 대한 동기부여도 약해짐을 느꼈다. 자연히 언제부턴가 침대 위에서 책에 집중하기가 점점 힘들어졌다. 예전에는 2-3시간도 거뜬했지만 요즘은 1시간이면 졸음과 지루함이 몰려온다. PC앞으로 가면 결말은 뻔하다. ’야식을 곁들인 유튜브‘.
독서도 안 되는 마당에 글쓰기는 언감생심이었다. 그러다 보니 그저 읽기만 할 뿐 그 내용을 정리하거나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일을 그만두고 쉬고 있는데다가 특별한 기술이나 전문 자격증도 없는 내가 지적 활동마저 게을리 하면 장래의 전망은 암울하고 심각할 수도 있다는 위기의식이 생겼다. 널찍한 공간을 찾아 동네 카페로 가보지만 거기라고 집중이 쉽지는 않았다. 거기다 매번 발생하는 커피값이 있기에 지루하다고 다른 장소로 ’메뚜기‘ 뛰기도 곤란하다. 이런 일들이 반복되고 시간이 흐르면서 번듯한 서재 혹은 작업실을 꾸미고 싶다는 소망은 점점 커졌다. 대형 서점, 전자기기 매장 혹은 사무실 등을 방문할 때면 각종 설비와 디바이스, 가구에 한참동안 시선이 머물렀고 스스로 디자이너가 되어 서재의 구체적인 모습을 상상하는 날이 많아졌다.
가로 2미터 이상의 긴 화이트 책상 중앙에 27인치 모니터 아이맥(iMac)을 올려놓는다. 앞에 얇고 긴 키보드와 무선 마우스도 함께. 그리고 옆으로는 맥북 에어 혹은 지금 쓰고 있는 아이패드를 활짝 연 채로 놓아둔다. 멀티탭을 책상 위로 빼놓아 언제든 충전이 가능하도록 한다(요즘은 보조 배터리도 많이 나왔지만 나같은 옛날 애플 사용자는 아직도 충전기가 편하다). 독서할 때 눈 보호를 위해 은은하고도 밝은 조명과 화사한 외관을 갖춘 독서 스탠드도 하나 둔다. 책상의 위치는 기왕이면 햇살이 비치는 창 앞이면 더 좋겠다(눈부시면 블라인드를 내리면 된다). 높낮이 조절이 쉽고 허리와 엉덩이의 하중을 완충해주는 사무용 의자도 필요하다. 집중하려면 앉아있기 편해야 한다.
등 뒤로는 파스텔톤의 책꽂이를 세워놓는다. 300권 이상의 책을 정리해서 진열하려면 칸이 20개 이상은 필요할 것 같다. 역사, 경제, 마케팅, 자기 계발, 문학, 부동산, 심리학, 스포츠, 기업 경영 그리고 분야를 특정하기 어려운 다른 책들까지~~ 대부분 읽고 또 읽었던 책들인만큼 시간이 걸리더라도 직접 내 손으로 분류하고 정리하고 싶다. 분야별로 정리하는 게 가장 무난하지만 분야를 넘나드는(역사/경제, 스포츠/여행, 문학/지리, 마케팅/심리학 등) 책들을 키워드에 따라 정리할 수도 있다. 또 감명깊은 소감이나 새로운 지식을 남겨준 훌륭했던 나만의 ‘베스트’를 꼽아 ‘스페셜 에디션’으로 꾸며볼 수도 있겠다. 연말이 되면 시상식처럼 그 해의 최고의 책들을 꼽아(이를테면 2023 Collection) 12월 한 달 전시해 보는 건 또 어떨까~~
요즘 이렇게 서재의 모습을 상상하며 즐거워지기도 한다. 비록 여러 사정상 빠른 시일 내에 이룰 수 있는 소망은 아니지만 이제라도 공간의 중요성과 의미를 느끼게 됐으니 서재를 가질 때까지 많은 장소와 공간을 가보며 안목을 키울 생각이다. 조금 넓어서 사무실이나 모임 장소로도 사용할 수 있으면 더 좋다. 그 공간을 SNS에 올려 알리고도 싶고 여건이 허락하면 친한 사람들을 초대해 즐거운 자리도 만들고 싶다.
그런데 이외에도 잘 꾸며진 서재가 필요한 중요한 이유가 따로 있는데, 그것은 바로 체계적으로 지식을 정리하고 제대로 이해하기 위함이다. ‘에디톨로지’의 저자 김정운 교수는 본인의 서재에 꽂힌 수많은 책들 중 10퍼센트도 완독하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김 교수는 특정 개념의 정의 및 구체적 적용에 대한 질문에 거침없이 답하고 자신만의 해석을 방대하게 풀어낼 줄 안다. 이는 많은 정보를 한 곳에 모아놓은 공간 때문이다. 김 교수는 그 사이를 자유로이 날아다니며 능숙히 지식을 발췌하고 또 편집하며 끊임없이 다마고치처럼 이야기를 만들어간다.
나도 서재를 갖는다면 다양한 방법으로 지식을 편집하고 확장하고 싶다. 한 권의 책을 읽다가 해당 내용을 더 자세하게 담고 있거나 다른 관점에서 해석한 다른 책들이 있다면 즉시 찾아서 펴보고 비교하거나 참고할 수 있다. 더 자세한 내용을 원하면 즉시 인터넷을 검색하여 관련 텍스트나 영상을 찾아보면 된다. 이 과정에서 하나의 현상과 개념을 다양한 각도와 관점에서 조명해 볼 수 있고 더 구체적이고 실용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또한 그러면서 알게 된 내용들을 메모에 정리하면 태블릿과 스마트폰에 동기화되어 저장되고 다른 장소에 가더라도 기기만 휴대하면 연속적인 작업이 가능하다. 이 과정이 반복되면서 비로소 입체적인 배움이 가능해지고 나만의 고유한 이야기를 풀어낼 수 있게 된다. 그 어렵다는 책쓰기도 이렇게 하나하나 쌓아가면 가능할 것 같다.
이런 이유들로 인해 서재는 꼭 필요하지만 개인적인 사정 덕에 당장 꾸밀 수는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던 대로 시간 때우기 식의 독서만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장차 무엇을 하느냐와는 별개로 보다 능동적으로 움직여야겠다고 결심했다. 여러 대안을 모색한 끝에 얼마 전부터 유명 공유 오피스 이용권을 끊어 수시로 출입하고 있다. 두 달 정도 이용 중인데 수험생들이 이용하는 독서실처럼 답답하지 않으면서도 많은 사람들이 대화를 나누는 카페보다는 시끄럽지 않아, 개인적으로 매우 만족하고 있다. 비용을 내고 오는 곳인만큼 가능하면 읽기보다는 쓰기에 집중한다. 주위에 모두 일하는 사람들이라 집중도가 높아지는 점도 좋다. 콘센트도 부족하지 않은 탓에 아이패드 두 대를 사용하면서 책꽂이가 없는 데서 오는 아쉬움을 보충하고 있다.
물론 읽고 쓰고 생각하고 편집하는 것만으로 대단한 변화가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세상사의 많은 부분은 직접 경험을 통해야 깊게 배우고 이해할 수 있다. 인간관계, 사회생활, 부동산 투자 등은 직접 사람과 접촉하고 해당 지역에 가보아야만 실체를 알게 되고 원리를 이해할 수 있다. 안 읽고 안 써도 무난히 잘 살아갈 수 있으며, 성공한 사람들 중에 글재주가 전혀 없는 사람도 많다.
하지만 지금의 내게는 지금처럼 며칠 간격으로라도 ’유사 출근’하며 글을 쓰는 루틴이 나름 ‘존재의 이유’가 되었다. 집중하여 제대로 읽고 쓰며 조금이라도 일하는 습관을 들일 수 있어서 좋다. 옛날 사람같은 소리지만 독서와 글쓰기를 통해 능동적으로 생각하는 과정에서 현상을 이해하고 파악하는 통찰력도 조금은 좋아질 거라 믿는다. 그리고 나를 ‘읽고 쓰는 사람‘으로 브랜딩하기 위해서도 꾸준한 습작은 필요하다. 미래에 대한 부담감과 습작의 어려움 탓인지 요즘의 일상은 상당히 ’노잼‘이지만 한편으로는 매우 자유롭다. 어렵고 힘들더라도 원하는 일을 해나가는 과정이 진정한 ‘자율’이 아닐까 싶다. 자율이라는 왕관이 주는 무게가 만만치 않지만 현명하면서도 강인하게 견디어 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