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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화소년 May 20. 2023

형님들 저희는 결국 만났습니다.

재회한 오세근과 김선형, 엇갈린 이상민과 서장훈

 2007년 5월 당시 프로농구 FA(자유계약) 선수 중 최대어였던 서울 삼성의 서장훈은 전주 KCC로 전격 이적하며 변화를 택했다. 33세(이하 만 나이)라는 적지 않는 나이에 전성기를 지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장훈을 원하는 팀들은 많았지만, 서장훈은 연세대 2년 선배 이상민과 선수 생활의 말년을 함께 하고 싶다는 이유로 KCC를 택했다. 이상민이 대학 4학년이던 1994년 이후 13년간 헤어졌었던 두 스타의 ‘투샷’을 다시 보게 될 거라는 기대에 농구대잔치의 기억을 간직한 많은 팬들은 한껏 열광하며 돌아올 가을을 기다렸다.


KCC와 계약 체결 직후. 이때까지만 해도 서장훈은 ‘상민이형’이 나 때문에 떠날 줄은 몰랐다.



하지만 불과 며칠 뒤 삼성이 서장훈의 보상선수로 이상민을 택하면서 서장훈의 꿈과 팬들의 기대는 산산조각이 나고 만다. 10년간 뛰었던 KCC를 본인 의사와 상관없이 떠나게 된 이상민은 큰 충격을 받아 은퇴까지 생각했고, 한동안 집에서 칩거하며 관계자들과의 대화도 거부했었다.  서장훈 역시 자신의 선택이 가져온 예기치 못한 결과에 크게 당황해 한동안 힘들어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서로 엇갈린 길을 가게 되었고, 선수 생활 동안 다시는 만나지 못했다.


우여곡절 끝에 삼성과 계약했지만 이상민은 끝내 복잡하고 서운한 속내를 숨기지 못했다.


FA선수가 팀을 옮길 경우 새 소속팀은 원 소속팀에 보상 선수 및 보상금을 관련 규정에 따라 지급해야 한다. 진정한 의미의 FA를 가로막는 규정이라는 비판이 많지만, 선수 풀이 좁고 팀간 전력차가 큰 한국 프로스포츠 시장에서 리그의 평준화를 위해 어느정도 불가피하기도 한 제도라는 의견도 있다


물론 프로 세계의 냉정함을 받아들인 두 사람은 다시 힘을 내어 일어섰다. 이후 이상민은 3년을 더 뛰며 새 소속팀 삼성을 2차례나 준우승으로 이끄는 소기의 성과를 거두었다.서장훈은 6년을 더 뛰며 여러 차례 소속팀을 옮겼고 중간에 이혼이라는 개인사까지 겹치며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마지막 순간 부산 ΚΤ에서 의미있는 1년을 보내며 나름 명예롭게 은퇴한다.


함께하지 못했지만 서로에 대한 그리움과 애틋함은 여전했다.









이상민과 서장훈의 인연이 안타깝게 엇갈리던 2007년, 중앙대 농구부에 입학한 1987년생 오세근( 200cm, 센터)과 1988년생 김선형(187cm, 가드)은 대학 농구 무대에 도전장을 던지며 화려하게 데뷔했다. 당시 이미 윤호영, 강병현(이상 4학년)을 비롯한 대학 최고의 스타들이 건재하던 중앙대는 둘의 입학을 계기로 더욱 높이 날고 빠르게 달리기 시작한다. 대학 무대 52연승이라는 충격과 공포의 기록도 이 시기에 세워졌다.


선배들이 졸업해 나가도 중앙대의 전성 시대는 끝나지 않았다. 오히려 오세근과 김선형은 그들만의 신화를 새로 쓰며 연승을 이어갔고, 대학농구리그 원년이던 2010년엔 중앙대를 초대 챔피언으로 이끌었다. 리바운드를 잡은 오세근으로부터 시작된 속공을 김선형이 덩크슛으로 마무리하는 장면은 당시 중앙대를 상징하는 ‘시그니처’였다.


https://youtube.com/watch?v=SLKqTlT4H8I&feature=share


이미 검증이 끝난 두 선수는 프로에서도 즉시 ‘득템’하고픈 신인 수위를 다투었다. 2011년 1월 열린 프로농구 신인 드래프트에서 오세근은 전체 1순위로 안양 KGC에, 김선형은 2순위로 서울 SK에 지명되었다. 그리고 둘은 즉시 주전으로 뛰며 프로 무대를 휘젓기 시작했다. 오세근이 2011-12 시즌 신인왕을 차지하고 KGC를 우승으로 이끌며 ‘장군’을 부르자, 김선형도 곧바로 2012-13시즌 정규리그 MVP에 등극했고 SK를 준우승으로 이끌며 ‘멍군’으로 화답했다. 이후로도 둘은 정상의 기량을 선보이며 팀에 수차례의 우승을 가져다주었고, 개인적으로도 번갈아가며 MVP에 오르며 최고 선수에 등극했다.


역대급이라 불렸던 2023년 프로농구 챔피언 결정전. 10년이 넘었지만 오세근과 김선형은 여전히 팀의 에이스였다.


 이에 따라 중위권을 전전하던 두 선수의 소속팀 KGC와 SK의 위상도 크게 올라가기 시작했다. 특히나 2022~2023년에 걸쳐 KGC와 SK는 연속으로 챔피언 결정전에서 대결하며 그동안 특별한 라이벌의 스토리가 없었던 프로농구에 새로운 라이벌리를 형성하며 팬들을 열광시켰다. 2022년에는 SK가, 2023년엔 KGC가 우승을 가져갔다. 특히 2023년 챔피언 결정전은 매 경기 명승부를 연출하며 14년만의 7차전 및 최초의 7차전 연장 승부 등으로 큰 화제를 모았다(1차전을 제외하고 전경기가 매진되었다).


https://n.news.naver.com/sports/basketball/article/421/0006797293








2023년 5월 18일 많은 농구 관계자들과 팬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FA신분이었던 오세근이 KGC와의 12년 동행을 뒤로 하고 이적을 감행했는데 그 팀이 서울 SK였던 것이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격렬하게 싸우던 상대팀이 이제 오세근의 ’홈 스윗 홈‘이 되었다는 소식에 많은 팬들은 충격에 빠졌다. 주된 이유는 KGC의 성의없는 협상 태도였지만(KGC는 이전에도 주요 FA선수들을 놓치며 팬들로부터 많은 질타를 받은 바 있다), 오랜 절친 김선형과 선수생활의 마지막을 함께 하고픈 오세근의 ‘로망’도 이번 이적에 한몫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둘은 13년만에 다시 같은 유니폼을 입고 프로에서는 처음으로 동료가 되어 한 곳을 바라보게 되었다(물론 국가대표로는 10년간 함께 뛰었다).


https://n.news.naver.com/sports/basketball/article/469/0000740077



냉정하고도 각박한 승부의 세계에서 뛰는 동안 선수들은 감정적인 소회를 표할 틈도 없이 팀의 우승과 개인의 성장을 위해 싸우고 달린다. 하지만 그 선수들에게도 가슴 깊이 간직한 로망이 있고 아픈 손가락이 있으며 이루지 못한 꿈이 있다.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아 안정적인 입지가 구축되고 선수생활의 황혼을 향해 달려갈 때쯤이면 선수들은 조금씩 추억을 떠올리게 되고 못다한 소원 하나쯤은 성취하고 싶어진다. 그리고 가장 흔히 갖는 로망 중 하나가 절친과 적이 아닌 동료로 만나 뛰는 그림이다.


풋풋했던 그때는 두 사람의 마음 한 구석에 늘 자리하고 있었다.


이루어지는 과정이 매끄럽지만은 않았지만 2023년 오세근과 김선형의 ’행복 회로‘는 코딩대로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이상민과 서장훈이 안타까움을 뒤로 하고 헤어진 16년 전 그해 초여름을 생생히 기억하는 입장에서 이번 사건을 지켜보며 팬으로서 감회가 남달랐다. 개인적으로 ‘하늘이 점지한다’는 워딩으로 대표되는 샤머니즘을 잘 믿지 않는데, 이번 경우를 보며 정말 인연은 운명이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더구나 기가 막히게도 이상민과 서장훈이 엇갈리던 그 해 오세근과 김선형은 만났다! 오세근이 이번에 우승을 하지 못했더라면, KGC에서 성의있게 진심으로 협상에 임했더라면, 김선형이 SK가 아닌 딴 팀 소속이었다면, 무엇보다 두 선수가 아직도 최고의 위치에 있지 않았더라면 이 낭만적인 재회는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껏 적이었지만 이제 동료가 되는 두 사람.


이번 이적을 두고 오랜 인삼공사 팬은 물론이고 수많은 농구팬들의 실망과 반발이 대단하다. 하지만 돌고돌아 만난 두 선수의 ‘행복 농구’가 오래도록 이어지길 바라는 마음은 모두가 같을 거라 생각한다. 또한 팬의 입장에서 더욱 수준높은 팀 SK의 농구가 기대된다.  오세근의 스크린과 정확한 점퍼, 김선형의 현란한 드리블과 속공을 잠실학생체육관에서 볼 다음 가을이 벌써부터 설레고 기다려진다.



T.M.I :  이번 이적의 이모저모


1. 2007년에 동생인 서장훈이 옮겨갔다면 2023년엔 형인 오세근이 움직였다(오세근이 1년 유급했으며 원래 중학생 때부터 서로를 알고 있었던지라 김선형은 오세근을 형이라 부른다).

2. 이적 시점에서 가드인 이상민과 김선형은 모두 35세로 나이가 같다.

3. 당시 이상민과 서장훈은 기량이 하락세였지만, 현재 오세근과 김선형은 아직도 해당 포지션에서 리그 정상에 군림하고 있다. 오세근은 이번 챔피언 결정전 MVP이며 김선형은 올시즌 정규리그 MVP이다.

4. 이상민과 서장훈은 자신들의 뜻과는 상관없이 헤어졌으나 오세근과 김선형은 원하는 바를 자력으로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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