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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정을 잊어버리셨나요?
by
어설퍼도 꾸준히
May 17. 2020
나는 어쩌다 긴 생머리를 소원하게 되었을까.
가질 수 없는 것은 포기할 줄 알아야 하는데.
지난주 금요일
나는 벼르고 별렀던 거사를 치렀다.
일 년에 세 번
나는 미용실에 간다.
타고난 풍성하고 억세며 곱슬곱슬한 모발,
몹시도 빨리 자라는 스피디한 속도.
나는 미용실에 죄인의 마음으로 찾아간다.
미용실에 가서 내가 원하는 것은 단 하나,
가볍게 쭉쭉 뻗은 생머리.
남들보다 곱절은 많은 머리숱과
쉬이 펴지지 않는 고집 센 곱슬머리는
미용실에서 그리 환영받는 존재가 아니다.
다른
손님보다 강도 높은 노동으
로 인하여
연방 한숨을 쉬는 미용사분들께
늘 눈치가 보이고 죄송한 마음이다.
물론 나라고 쉬운 것은 아니다.
네 시간가량을 가만히 앉아 있는 것도 꽤나 힘든 일이다.
가끔 놀랄 만큼 뜨거운 고데기와 목덜미의 조우 역시
결코 반갑지 않
다.
그러나 이런 눈치와 인내와 적잖은 가격을 치르고서도
미용실을 포기할 수는 없다.
미용실에서 나오는 발걸음은 너무나도 가볍다.
머리를 손질했을 뿐인데
몸무게도, 마음의 짐도 절반으로 줄어든 기분이다.
실로 듬뿍듬뿍 쳐낸 숱과 길이 덕에
내 일상은 한결
가벼워
진다.
머리를 감을 때
샤워기를 가볍게 놀려도 금세 머리가 적셔지며,
-평소에는 머릿속까지 물에 적시기 위해서
머리를 갈래갈래 가르마타가며 물을 묻히는 스킬이 필요하다-
샴푸도 두 번의 펌프질만에 금세 풍성하게 거품이 난다.
무엇보다도 남편처럼 선풍기 앞에서 대강 말려도
내 머리는 '엘~라스틴' 그 자체다.
한 달쯤 지나면서부터
새로 자란 머리카락들의 존재감이 느껴진다.
점차 샤워시간이 길어진다.
머리를 물에 적시는 것만 해도 쉽지 않다.
머리를 이리 절리 갈라가며 물을 묻히고,
펌핑 세 번의 샴푸, 두 번의
컨디셔너 후
꼼꼼히 헹군다.
깨끗해진 머리칼을 손으로 꼬옥 쥐어짠다.
촬촬촬.
과장을 조금 보태 바가지로 물을 퍼붓는 소리가 난다.
손으로 1차, 수건으로 2차 물기를 빼낸 머리에
-수건에서 물을 짜내면 물이 뚝뚝 떨어질 지경이다-
에센스를 꼼꼼히 머리에 바르고 드라이기를 꺼낸다.
선풍기는 폭탄머리의 지름길이므로 사용할 수 없다.
위에서 아래를 향한 드라이기만 왔다 갔다 할 뿐,
머리카락은 최대한 가만히 말린다.
탈탈 털어 말려도 한참이 걸릴 머리칼인데,
붕붕 뜨는 것을
막아보고자
가만
가만
말리려니
팔이 저리다.
마지막으로 잠자는 동안 조금이라도 더 머리칼을 가라앉히기 위해
머리를 가지런히 만들어서 눕는다.
자다가 중간중간 손으로 머리를 다시 빗어 가지런히 만들고
조금 전과는 다른 방향으로 눕는다.
고르게 머리를 눌러줘야 다음 날 아침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을 수 있다.
장마철이 되면 곱슬이 더 아우성을 치기 때문에
이마저도 무용지물이다.
이 때는 어쩔 수 없이 두껍고 튼튼한 고무줄로 머리칼을 꽁꽁 묶는다.
그래도 이놈의 잔머리들은 성질을 죽일 줄 모르고 구불거린다.
매직한 지 일주일째, 대충 머리를 묶고 세수를 하려는데
거울 속 내 머리가 너무나 마음에 든다.
티 나지 않는 자연스러움, 이것은 전지현이다.
한참을 거울을 들여다보며 머리를 이리저리 보았다.
윤기가 차르르 흐르는 비단결 같은 생머리.
너무나 만족스럽다.
그리고 곧 한숨을 쉬었다.
생머리들은 좋겠다. 걔네는 맨날 이럴 거 아니야.
그러게 폭탄머리로 살라니까.
남편이 한 마디 한다.
헤그리드도 괜찮단다.
나는 왜 내가 갖지 못하는 것에 대해 이다지도 집착하는가.
삼십 중반을 살아오면서
불가능함을 알면서도 소원했던 것들은 세 가지다.
첫째, 전지현 저리 가라까지는 아니어도 주기적 매직이 필요 없는 생머리.
둘째, 기다란 허리를 주셨으면 기다란 다리까지 주셨어야죠, 싶은 길고 가느다란 다리.
셋째, 다리에만 몰릴게 아니라 위쪽에도 좀 몰렸으면 싶은 눈 씻고 찾아봐도 내게는 없는 풍성한 볼륨.
정말 오래 걸렸지만 가느다란 다리와 풍성한 볼륨은 포기했다.
나올 데는 나오고 들어갈 데는 들어가는
아름다운 라인을 위해 한여름에도 포기할 수 없었던 두툼한 속옷은
정말 답답했고, 더웠고, 때로는 멍들게 하고 때로는
소화를 방해했다.
직장을 다니면서 속옷이 아니어도 내 가슴을 짓누르는 상황을 자주 접하게되자
'
뽕
'
을 자연스레
포기했다.
나도 숨은 쉬어야겠기에.
기다랗고 가느다란 다리는 아직도 너무 소원하긴 하지만
이제는 어쩌겠냐고 체념한 상태다.
가끔 전신 거울을 보고 이게 진정 사람의 비율인가 싶어 놀라긴 하지만 어쩌랴.
남편이 해를 못 봐 허여멀건하고 투실투실한 다리를 보고
치즈순이라고 놀리긴 하지만 어쩌랴.
튼튼한 다리만큼 내 건강도 좋을 거라며 위로할 줄 알게 되었다.
포기하고 나니
치즈순이라는 별명이 귀엽기도 하다.
그렇지만 찰랑이는 생머리만큼은 포기가 잘 안된다.
포기하고 싶은데 정말 포기가 안된다.
괴롭다.
치즈순이처럼 맘에드는 별명도 받지 못했다.
어쩌다 나는 내게는 불가능한 긴 생머리에 목을 매게 되었을까.
긴 생머리에 대한 로망이 가득 담긴 노래들 때문이었을까.
신데렐라류의 영화와 드라마에서
억척스러운 여주인공이 드디어 왕자님을 만날 때
파마머리가 긴 생머리로 탈바꿈하기 때문일까.
가녀린 여주인공은 긴 생머리일 때, 그녀를 시기하는 악녀는 파마머리였기 때문일까.
그도 아니면 나 혼자 의식하는 보이지 않는 눈 때문일까.
어쩌다 나는 괴로워하면서도 찰랑이는 머릿결을 포기하지 못했을까.
길고 날씬한 다리와 풍성한 볼륨을 하나씩 포기했을 때,
나는 하나씩 자유를 얻었다.
더 이상 내 다리가 너무 두꺼워서 보기 흉할까 걱정하는 마음을 버렸고,
가슴을 짓누르던 두껍고 때로는 뾰족하기까지 한 속옷과 함께 갑갑함을 버렸다.
앞으로 내가 생머리에 대한 로망을 버리게 되면
길고 지루한 머리칼을 위한 시간 대신 해방감을 얻을 수 있을까.
남편에게 치즈순이를 이을 별명을 만들어달라고 해야겠다.
폭탄머리, 헤그리드가 아니라.
이미지 출처
그녀(FC160849),
최문석
(저작물 80 건), 공유마당, 자유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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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용실
포기
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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