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 오리진스(I Origins, 2014)
각자의 삶이 있어 각자의 밤이 찾아온다. 그날 밤도 마찬가지였다. 수요일이었나? 아니다. 아마 금요일이었을 거다. 작업을 하다가 도저히 정리가 안돼서 밖으로 나갔다. 떡진 머리를 숨길 검은색 모자에 아무거나 걸친 회색 티셔츠, 파란색 반바지 그리고 낡아버린 삼선 슬리퍼. 대문 앞에서 기지개를 한 번 피고 동네 거리를 걸었다. 밤이라 그런지 사람들은 듬성듬성 있었다. 나오는 나와 반대로 들어가는 사람들뿐이었다. 어디로 가야 할지 정하지 않았다. 그때 바람이 불었다. 묘했다. 은은하게 부는 바람은 마치 나를 꼬시려는 거 같았다. 바람이 부는 데로 따라 가보기로 했다.
바람은 쫒아 가보니 공원에 도착했다. 산책로가 있어 그 길을 따라 걸었다. 한 바퀴를 돌았다. 다시 한 바퀴를 돌았다. 평소 같으면 이제 다리에 신호가 올 텐데 그 날은 힘들지 않아 마지막으로 한 바퀴를 더 돌았다. 그리고 벤치에 앉았다. 폰을 꺼내 뉴스를 보려고 했다. 바보 같게도 폰을 집에 두고 와버렸다. 하는 수 없이 구름에 숨겨진 달을 찾아봤다. 보이지 않았다. 아마 저쯤에 있겠다 싶은 곳이 있었는데 구름을 치울 수 없어 저기 쯤 있겠지 라며 생각했다.
그러다 벤치에서 작은 미동이 느껴졌다. 얌전히 앉아있는 내가 만든 벤치의 움직임은 아니었다. 올린 고개를 급하게 내려 옆을 봤다. 한 여자가 앉아 있었다. 한 30만 원으로 다 살 수 있을 거 같은 정장 차림에 반곱슬이 들어간 긴 머리를 하고 있었다. 앞을 봤다. 반대쪽에 텅 빈 벤치 하나가 있었다. 굳이 왜 여기에 앉은 걸까. 불안한 호기심이 생겼다. 자리를 피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내가 바로 일어나 가버린다면 저 여자가 무안할 수도 있을 거 같았다. 속으로 60초만 세고 떠나기로 했다. 일, 이, 삼...... 숫자를 세면서 최대한 여유 있는 척을 했다. 살짝 눈을 돌려 그 여자를 봤다. 머리카락 때문에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가만히 앉아 있었다. 다만 오른손에 검지손가락은 거칠게 움직였다. 마치 담뱃재를 털듯이. 오십일, 오십이, 오십삼... 숫자를 다 세면 일어나서 할 필요 없는 기지개를 한 번 더 피기로 했다. 그래야 이 곳을 떠날 때 자연스러워 보일 거 같았다.
"저기요."
여자가 말했다. 설마 나를 부른 건 아니겠지. 끝나가는 숫자를 이어서 셌다.
"저기요."
벤치를 톡톡 치면서 여자가 다시 한번 더 말했다. 처음 들었다는 것처럼 고개를 돌려 여자를 봤다. 새하얀 얼굴의 여자. 어디선가 본 듯한 느낌이 들었다.
"제가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해서 그런데요. 한 번 들어봐 주실래요?"
라고 여자가 말하더니 내 대답을 듣지도 않고 말하기 시작했다. 자세히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직장상사에 대한 이야기였다. 여자는 화가 많이 났는지 상사 욕을 엄청했다. 사소한 것까지. 보통 이 정도로 싫어하면 그만큼 애정도 있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듣다 보니 여자의 얼굴에 없던 술기운이 있어 보였다. 난 여자를 얘기를 들어면서 나만의 이야기로 바꿔갔다. 그러다 감정이 이입이 되면서 여자의 상사 욕을 같이 했다. 그러다 대화의 화제가 우리 동네로 바뀌고 우린 같은 이 동네 토박이라는 걸 알 게 되었다. 대화는 생각보다 길어졌다. 체감상은 순식간이었다.
여자에 대해 좀 더 궁금한 점이 생겼다. 이름은 무엇인지, 몇 살인지, 무엇을 좋아하는지, 등등. 하지만 직장상사의 욕으로 시작된 이 대화가 그런 쪽으로 이어지는 게 좀 이질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물어보지 않았다. 그리고 그렇게 헤어졌다. 바레다 주려고 했는데 이것 또한 이질적인 행동이라 느껴져서 그냥 각자의 집으로 향했다. 뒤에서 여자의 발걸음 소리가 멈췄다. 뒤를 돌아보려다가 혹시 눈이라도 마주치면 전에 생각했던 이질적인 모든 것들을 해야 할 거 같아서 돌아보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와 항상 앉는 내 의자에 앉았다. 꿈이었나? 처음 보는 여자가 이렇게 낯설지 않게 느껴지다니. 아마 동네 사람이라서 그런가 싶었다. 며칠이 지났다. 보통 어제 먹은 음식도 까먹는데 그 여자는 잊히지 않았다.
이 날 밤에도 복잡한 머리를 부여잡고 밖으로 나왔다. 폰을 꺼내 날짜를 봤다. 일주일이 지난 금요일이었다. 대문 앞에서 기지개를 폈다. 그러자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전에도 경험한 묘한 바람이었다. 하지만 바람은 그때 그 공원과는 다른 방향으로 불고 있었다. 무시하고 공원으로 향했다. 그러자 바람이 조금 거칠어졌다. 하지만 나를 막을 수 없었다. 공원에 도착했다. 아무도 없었다. 시간이 시간인지라 당연하긴 했다. 산책로를 따라 걸었다. 한 바퀴를 돌았다. 다시 한 바퀴를 돌았다. 두 바퀴를 도니 다리에 신호가 왔다. 지난주에 앉았던 벤치를 봤다. 아무도 없었다. 그렇게 집으로 돌아왔다.
짧게나마 그 여자가 혹시 내 운명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었다. 운명이란 단어는 이상적인 단어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 때만 해도 운명은 바로 내 눈 앞에 있는 거 같았다.
이 영화의 연인 이안과 소피가 운명적으로 만날 때 나오는 음악 THE DØ - Dust it Off이 그 날의 기억을 상기시켜준다. 몽환적인 여자의 목소리로 무언가를 갈망하는 듯한 부름은 내게 "너는 그날처럼 바람을 따왔어야 했어. 그날처럼 한 바퀴를 더 돌아보지 그랬어."라고 말하는 거 같았다.
어쩌면 운명이란 꿈같은 걸지도 모른다. 단어의 뜻만 봐도 알 수 있다. 운명이란 인간을 포함한 모든 것을 지배하는 초인간적인 힘이다. 초인간적인 힘은 신의 능력을 뜻한다. 나는 신을 믿지 않는다. 고로 운명도 믿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운명이 없는 걸까? '증거의 부재는 부재의 증거가 되지 않는다'라는 파파기니아스 법칙이 있다. 이 법칙에 따르면 지금까지 내가 운명을 받아드린 적이 없다고 해서 운명이 없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운명은 존재한다. 이렇게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참으로 놀라운 반증이다.
나는 믿고 싶다. 증명된 것만 믿던 주인공 이안이 소피를 만나 증명할 수 없는 무언가를 믿기 시작한 것처럼. 그리고 기다린다. 그날의 바람이 다시 내게 불어주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