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식같은 여행에도 휴식이 필요하다.
무슨 일을 하던 최초의 기억은 이후 한 일보다는 더 깊이 각자의 인생에 각인이 되는 것 같다. 나는 출발부터 숙박, 그리고 귀국까지 온전한 나 홀로의 해외여행을 하기까지는 35년의 세월이 필요했나보다.
당시 내 나이 36세. 혼자만의 자유여행으로 홍콩을 택했다. 준비기간 일주일, 총 여행기간은 5박 6일. 5박 6일 일정 중 하루는 마카오여행도 포함이 되어 있었다. 최초 공항도착부터 귀국할 때까지의 방문할 장소와 세부 스케줄까지 모두 치밀하게 계획을 했다. 어차피 홀로 여행이었다. 무리한 계획으로 힘이 든다고 해도 불평할 사람도 없었고, 미친 듯이 돌아다닌다고 해도 뭐라고 할 사람도 없었다. 말 그대로 자유여행이었다.
홍콩공항에 도착해서 입국심사를 마치고 옥토퍼스카드부터 구입했다. 드디어 온전한 홀로 자유여행의 서막이 올랐다. 집에서 출발하여 공항을 거쳐 홍콩 숙소까지, 대략 4시간의 비행시간을 포함해 총 9시간 정도가 소요되었던 것 같다. 짧지 않은 이동거리와 시간이었지만 잠시 쉬는 시간도 아까워 도착 첫날 오후부터 강행군을 시작했다. 침사추이에 있는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짐만 던져놓고는 곧바로 나와서 내가 직접 계획한 일정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홍콩은 크게 구룡반도와 홍콩섬으로 나뉜다. 첫날은 구룡반도쪽에서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웡따이신 사원을 시작으로 몽콕의 각종 시장들과 공원, 아우마떼로 이동하여 야시장을 구경하고 다시 침사추이로 와서 스타의 거리에서 그 유명한 홍콩의 야경을 감상했다. 숙소에 돌아와서는 첫날부터 피곤함에 지쳐 꿈도 꾸지 않을만큼 숙면을 취했다. 숙소는 한국인이 운영하는 저렴한 민박집으로 했다. 아침식사가 한식으로 제공이 되기 때문에 아침에 무엇을 먹어야할까라는 걱정도 줄었고, 든든히 아침을 챙겨먹고 나면 그날의 일정을 산뜻하게 시작할 수 있었다.
홀로 홍콩여행 이틀째, 이날은 오전부터 란타우섬으로 이동해서 영화 '무간도'에도 잠시 나왔던 거대 불상이 있는 포린사원을 시작으로 다시 구룡반도를 거쳐, 홍콩섬으로 이동하여 리펄스베이, 스탠리 그리고 빅토리아피크의 주경과 야경까지, 정말 나를 위한 여행인지, 여행을 위한 여행인지 분간이 안 갈 정도로 미련하게 걷고 또 걸었다. 밤늦게 숙소에 돌아와서는 잠깐 내일 일정만 다시 체크하고는 파김치가 되어서 잠들 수밖에 없었다. 이튿날, 아침에 세수를 하는데 코피가 살짝 난다. 참으로 오랜만에 제대로 피곤했던 가보다.
여행 사흘째도 강행군을 계속 했다. 전날 홍콩섬의 주변을 보았다면, 이날은 홍콩섬의 중심부를 모두 둘러볼 계획이다. '중경삼림', '영웅본색', '첨밀밀' 등의 수많은 홍콩영화의 배경이 되었던 완차이, 코즈웨이베이, 센트럴 지역 등을 집중적으로 볼 생각이었다. 더구나 어제까지는 버스나 지하철의 대중교통을 어느 정도 이용했다면 오늘 보는 곳들은 대부분 도보로 이동하는 곳이다. 죽도록 걸을 각오를 하고 이른 아침 숙소를 나섰다. 스타페리를 타고 홍콩섬으로 넘어가, 골든 보히니아광장, 컨벤션센터, 센트럴플라자, 호프웰센터 등 홍콩의 전망이 좋은 빌딩이란 빌딩은 다 돌아보고, 타임스퀘어, 빅토리아공원등의 쇼핑몰과 홍콩시민들의 휴식처들도 빠지지 않고 들렀다. 심지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거의 160년을 한 결같이 12시 정각에 포를 쏘는 눈데이건까지 챙겨봤다. 걷고 보고, 또 걷고, 홀로 여행의 자유로움과 스스로의 엄격함으로 몸은 점점 지쳐가고 있었다. 간단히 점심을 먹고 홍콩공원을 들렀을 때는 이미 더 이상 걸을 수 없을 만큼 피곤한 지경이었다. 홀로 여행이었기에 오히려 주변에서 좀 쉬었다 가라는 충고나 의견이 없고 오히려 하나라도 더 봐야지 하는 욕심 아닌 욕심 뿐, 무념무상 속에서 스케줄대로만 무지하게 움직였던 것 같다.
홍콩공원의 산책로를 따라 도는데, 이대로 더 걷다가는 오후와 저녁 일정에 차질이 있을 것만 같았다. 홍콩에 발을 디딘지 사흘 만에 잠깐이라도 좋으니 쉬었다 가자는 스스로의 결심이 선다. 그러면서 주변을 돌아보니 눈에 들어오는 티하우스(Tea house). 흰색의 고풍스러운 건물로 홍콩공원의 녹음과도 잘 어울려 도보여행자들의 지친 몸을 쉬기에도 참 좋은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들어가서 메뉴판에 있는 차종류 하나를 제대로 읽어보지도 않고 시켰다. 굳이 차를 마시러 온 것은 아니라 간단히 간식도 먹고 차도 한잔 하면서 잠시만 쉬면되었기 때문에 차의 종류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수분 후, 주문한 딤섬 한 접시와 차가 나온다. 종업원이 유리잔에 뜨거운 물을 붓더니 건조된 꽃 하나를 조심스레 담근다. 딤섬 한 조각을 먹는 동안 그 꽃은 뜨거운 물속에서 새로운 생명을 얻은 듯 다시 화사하게 만개하기 시작한다. 마치 내 지친 몸이 다시 생기를 얻어 살아나는 것처럼.
오랜 여행 후, 작은 결심으로 마주하게 된 화차. 그 맛은 모양만큼이나 아름답고 신선했다. 온 몸의 피로가 아래로 내려가 스스르 발끝으로 빠져나가는 느낌. 정말 거짓말처럼 피곤이 풀리고 머리까지 맑아졌다. 티하우스에서 머문 시간은 불과 30~40분 정도였다. 하지만 강행군 속에서 찾아온 달콤한 휴식과 차 한 잔의 여유는 숙소에서 간밤에 취한 수면보다 더 상쾌한 그 무엇이었다. 남은 며칠의 홍콩과 마카오 여행을 계획대로 모두 무사히 마치고 귀국을 했다.
처음으로 모든 것을 홀로 했던 해외자유여행. 홍콩에서 보고 겪은 그 매 순간 순간이 아직도 내 소중한 앨범 속에 자리 잡고 있다. 간혹 꺼내보는 그 사진들 속에서, 떠나면서 가진 설레임과 기대, 바쁜 일정들 속에 가슴 벅찼던 풍경들, 힘들었던 순간 그리고 지쳐 쓰러지기 전에 가졌던 화차의 여유까지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아직도 어디를 여행갈 때는 철저하게 계획을 세우는 편이다. 오히려 처음 홍콩을 갔을 때보다 더 구체적이고 꼼꼼하게 여행의 계획을 수립한다. 막상 도착한 현지에서 비록 변동이 생기더라도 출발 전에는 내가 할 수 있는 한 늘 최선의 준비를 한다. 더구나 그것이 해외여행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그리고 그 빡빡한 일정 속에 커피 한 잔, 차 한 잔의 여유를 넣는 것도 빼먹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