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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서리 Apr 15. 2021

여담(女談)이 여담(餘談)이 되지 않도록

지역 여성들의 이야기를 듣고, 전달합니다

  우리 학과가 30주년이라고 했다. 그걸 기념해서 매년 하던 학술제를 꽤 크게 한다고도 했다. 4학년이던 나는 행사에 별 관심이 없었지만, 당시 학생회장이었던 동기의 부탁으로 자리를 채워주기로 약속했다. 당일이 되자 나는 이미 졸업한 친구를 동문이라고 놀려대며 행사 장소에 도착했다. 학과장님의 축사, 재학생들의 축하 공연, 기념 영상 상영, 돌아가면서 진행되는 동문들의 자기소개. 행사는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그런데 그 평화로운 행사가 내 눈엔 어딘가 이상해 보였다. ‘왜 마이크를 든 저 수많은 사람들 중에 여자는 없지?’


  더 이상한 점은 한 교수님이 짚어주었다. 마이크를 든 여성 교수님 한분은 우리 학과의 30년 역사 중, 여성 학생회장은 딱 두 번 있었다고 말했다. 남성들이 스물여덟 번 회장할 동안. 게다가 회장, 부회장이 모두 여성인 경우는 그 해가 처음이라고 덧붙였다.


  내가 4년 동안 몸담은 우리 학과는 내가 입학했을 때부터 졸업할 때까지 여학생의 비율이 현저히 높았다. 보통 한 학년에 여학생이 3분의 2를 웃돌았으니 여초 학과로 불려도 무방했다. 그런데 왜 학술제에는 남성이 대부분이었을까. 내가 본 그 많은 여성들은 다 어디로 간 걸까. 사실 여초 학과임에도 불구하고 학년이 올라갈수록 좀처럼 보이지 않던 여성 선배들을 떠올리면, 커다란 강당을 가득 메웠던 남성들이 조금은 납득이 가기도 한다. 그리고 이건 우리 학과만의 특수한 상황이 아니다. 옆의 다른 학과에서도, 대학을 벗어나 우리 사회 곳곳을 보더라도 충분히 보고 들을 수 있는 이야기다. 지금도 여전히 모습이 보이지 않고,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여성들이 너무 많다. 분명 존재하는데도.


  그래서 함께 이상함을 느낀 여성들이 모였다. 우리는 학년이 조금만 올라가도, 동문 인터뷰 영상에도, 30주년 학술제 행사에서도 보이지 않는 여성 선배들이 궁금했다. TV에서도, 인터넷에서도, 역사책에서도 잘 들을 수 없는 여성 선배들의 이야기가 듣고 싶었다. 세상의 반이 여자라는데, 어디에서 무얼 하는지 모르게 사라진 여성들을 찾아야 했다.


  여담(女談)은 그렇게 탄생했다. 언제나 주제에서 벗어난 이야기, 여담(餘談)처럼 여겨지던 여성들의 이야기를 담기로 했다. 마이크가 없는 그들의 손에 마이크를 쥐어 주리라 마음먹었다. 그리고 서울에 비해 더 보고 듣기 힘든 ‘지역’에 사는 여성들에 집중했다. 지역에 사는 우리들에겐 꼭 서울에 가지 않아도, 지역에서 할 일을 하고 있는 여성 레퍼런스가 무엇보다 절실했기 때문에. 지역에도 여성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우리 눈으로 확인하고,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싶었다.


  그 결심으로 여담은 지역 여성들을 인터뷰하기 시작했다. 같은 학과 여성 선·후배들로 구성된 우리는 매주 치열하게 회의하여 인터뷰할 여성들을 찾았고, 곧 놀라운 일이 생겼다. 주위를 조금 둘러봤을 뿐인데 구의원, 책방 대표, 활동가 등 이곳저곳에서 여성들이 쏟아져 나왔다. 대전에 이렇게 다양한 여성들이 있다니. 우리는 그저 이미 존재하는 여성들을 쫓아가서 인터뷰하고, 콘텐츠를 만들기만 하면 되었다.  


  인터뷰를 계속 이어가다보니, 각자의 자리에서 묵묵히 할 일을 하고 있는 여성들이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나 여기에 있어.” 그래서 우리도 더 크게, 더 많이 말하기로 했다. “이것 좀 봐, 여기에 이렇게 많은 여성들이 있어!” 앞으로도 여담은 숨겨져 있던 여성들의 이야기를 더 많은 여성들에게 나눌 방법이 더 없을지 고민할 것이다. 여성들의 이야기가 더 이상 여담이 되지 않도록.


  나는 여담 활동을 하면서 종종 학술제에서 굳이 여성 학생회장 이야기를 꺼낸 교수님을 생각한다. 행사가 끝나고 당신을 찾아간 여학생들에게 40주년 학술제도 밥 먹을 생각으로 부담 없이 오라고 말해준 그 분을. 그리고 꽤 자주 상상한다. 40주년 학술제에 빼곡하게 참석해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수많은 여성 학우들을. 나는 언젠가 있을 그 장면이 보고 싶어서 계속 여담을 하는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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