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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애 Jan 18. 2023

설거지

설거지하지 않는 시간




설거지를 하고 자면 다음날 아침에 싱크대가 비어있는 게 너무 좋더라고요.







설거지 제때 못해서 쌓이면 한 번 할 때 어떤 때는 40분이 걸리더라. 내가 하는 것보다 훨씬 깨끗하던데. 스트레스 없고 애들한테 짜증 덜 나고. 그 시간에 다른 거 할 수 있고... 식기세척기 설치한 지 얼마 되지 않은 형님댁에 갔을 때 형님이 말했다. 틀린 말 하나 없다. 다른 가전제품은 몰라도 식기세척기는 들이고 싶었다. 요리에 취미도, 재능도, 호기심도 없다. 설거지는 요리 후 딸려오는 부산물에 불과했다. 재능을 요하진 않았지만 요리와 뗄 수 없는 활동이라, 요리가 싫으니 설거지도 달갑진 않았다.





저녁 식사를 준비하고 차리고. 식사가 끝나면 그릇을 싱크대에 넣어두고 잊는다. 아이 숙제하고 함께 간식 먹으며 TV 보고, 잠깐 색종이 접고. 번갈아 가며 씻고 책 읽어 준 뒤 아이가 잠들면 하루가 끝났다는 안도와 기쁨에 나의 할 일을 한다. 요즘에는 유튜브 시청이었는데 최근에는 바로 잠을 청한다. 아니, 피곤해서 의지와 상관없이 잠에 빠져든다. 몇 주 전, 저녁 설거지를 그날 밤 끝낸 적이 있다. 그 이후 한 달 동안 이어졌다. 아이가 씻으려고 화장실에 들어가는 게 출발신호라도 되는 듯 고무장갑을 끼고 수세미를 집어 들었다. 샤워기 물이 쏟아지는 동안 싱크대 물도 흘러내려갔다.





두 명이 먹는데 이만큼의 양이라니. 할 때마다 놀라며 그릇을 닦아냈다. 예상보다 금방 끝내고 고무장갑을 벗을 때, 싱크대볼을 채웠던 식기와 집기들이 건조대에 채워진 순간. 매번 뿌듯했다. 그 맛이 좋아서 주방마감을 다음날로 미루지 않았다. 하지만 습관은 금세 원래의 나로 되돌려 놓았다. 지치고 힘들어서. 귀찮은 마음에 밀려 설거지는 미룰 수 있을 만큼 미뤘다. 프라이팬이 없구나, 냄비에 라면 끓여 먹어야지. 밀키트조차 만들어 먹을 도구가 없어서 밥을 포기. 볼 일 끝나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설거지하는 상상만으로 피곤하고 지쳐서 가게 가서 먹기도 했다.





아이를 등교시킨 후 돌아온 집. 배가 고파 주방으로 향하니 어김없이 보이는 건 설거지 산이다. 지난날 내가 뱉은 말이 갑자기 떠올랐다. 한 달 동안 주방 마감을 하던 때에 오랜만에 만난 지인에게 했던 말이. 다음날 나를 위해 설거지를 하던 얼마 전 과거의 내가 떠올랐다. 전날 저녁에 먹다 남은 된장찌개에 국수를 삶아 먹으면 되니 씻겨진 도구가 없어서 요리를 하지 못할 상황은 아니네. 가지런히 쌓인 채로 물속에 잠겨 있는 그릇과 수저들. 그 옆으로 기름을 둘렀던 프라이팬과 조리했던 도구들이 있었다. 다음날 나를 위해 해둔 일들을 보니 조금 힘이 났다.





된장찌개가 보글보글 끓어서 뚜껑을 열고 국수를 넣었다. 단출하게 차리고 그릇을 금세 비웠다. 곧바로 그릇을 설거지볼에 담아 수돗물을 그릇에 채웠다. 이건 나중의 내가 할게. 커피를 마시며 소파에 앉아 쉬고 싶어. 지금의 휴식을 위해 아침의 수고를 한 것 마냥. 따뜻한 커피를 마시고 다이어리를 확인하고 영어 공부를 했다. 톡을 보고 SNS도 봤다. 금방 커피가 식었다. 식은 커피를 마시며 다시 연필을 들고, 또 스마트폰을 하고. 시간은 어느덧 점심 먹을 때가 되었다.





이것만 끝내면 저것만 끝내면.. 할 일들을 끝내는 식으로 하루하루를 보냈다. 아이와의 시간에서 특히 그랬다. 숙제 다 끝나면, 티비 다 보면, 다 씻으면, 책을 다 읽으면, 아이가 잠들면! 모든 할 일들을 마무리하면 끝에 뭐가 남는 건데? 며칠 전 진지하게 스스로에게 물었다. 해냈다는 느낌이 주는 뿌듯함은 오래가지 않았다. 반복되는 일상에 같은 일이 반복된다. 배고프면 밥 해 먹어야 하고, 그러면 설거지가 나오고. 조금 있으면 다시 밥 먹을 때가 오고, 그럼 설거지가 또 나오고. 끝나지 않는다. 아.. 과정. 과정을 즐겨야 하는 건가. 고전 같은 이 말이 뇌리를 스쳤다. 즐기는 건 잘 모르겠지만 싫어하지는 말자.





아이가 돌아오는 시각에 맞춰 저녁을 준비하려고 했는데 예상보다 마트에서 시간을 오래 보냈다. 장본 것을 식탁 위에 내려놓으니 오늘은 일찍 도착했다며 학원 차량 선생님에게서 전화가 왔다. 금방 해 줄 수 있어 5분만 기다려줘. 운동을 하고 온 날 아이는 배고픔에 특히 더 예민하다. 훈제오리를 얼른 프라이팬에 올리고 냉동밥을 돌렸다. 아이가 좋아하는 감자를 숭덩숭덩 썰어 고기와 함께 구워 아이에게 내어주었다. 아이가 숙제를 하는 작은 방에 할 일을 끝내고 둘이 누웠다. 이 방이 이렇게 따뜻했나. 보일러가 잘 들어오네. 몸이 따뜻해진다.. 오늘은 책 8권 읽어줄게. 대신 씻는 시간이 오래 걸리면 읽을 수 없어. 아이 몸을 안아 일으켜 세웠다. 정말 빨리 씻겠다고 호언장담하며 아이는 화장실로 들어갔다. 쏴아.. 물 나오는 소리가 들리자 싱크대 앞으로 몸을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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