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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어나 Jun 27. 2023

고장 난 중고 에어컨을 고치지 않기로 결심하다

왜 극한을 경험하고 싶은지



에어컨이 또 고장 났다.

이 집에 살면서 맞는 세 번째 여름인데, 작년 여름을 제외하고 에어컨은 늘 말썽이었다.


신랑을 쳐다봤다.

신랑이 나를 보며, “왜 나를 봐?”한다.


말을 해서 무엇하리.

나도 조금씩 변하는 중이라 말을 아껴본다.




집을 계약할 때 집주인이 가져올 에어컨이 없다면 얼마 안 쓴 에어컨을 저렴한 가격에 넘길 테니 고민해 보라고 했다. 어머니가 전기세 나올까 봐 많이 안 쓰셔서 상태가 양호하다고. LG로 가전을 다 맞출 예정이라 삼성 에어컨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신혼 가전을 남이 쓰던 걸 쓰고 싶지는 않았다.


고민할 여지도 없었는데, 신랑은 흔들리고 있었다.


어차피 전셋집이니 새 에어컨을 사더라도 나중에 이사 갈 때 옮겨갈 비용을 생각하면 50만 원은 감수할만하다는 것이다. 전셋집이라는 생각에, 나도 지고 말았다.


이사는 초겨울에 했고 이듬해 여름 에어컨을 켰을 때 선풍기보다도 못한 뜨거운 바람이 케케묵은 냄새를 온 방안에 퍼뜨렸다. 아마 많이 안 쓰셔서 관리가 안된 모양이라고 신랑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수리기사님을 불러 가스를 충전했다. 7만 원을 주고 가스를 충전하고 나니 시원한 바람이 나왔다. 중고 에어컨이 57만 원이 되었다.


눅진한 곰팡이 냄새가 간혹 느껴져도 며칠간 온몸이 시원했는데, 어느새 가스가 빠져버리고 다시 뜨거운 바람을 뿜어내는 에어컨을 보고, 역시 중고는 중고라고 어둑해진 표정으로 신랑을 쳐다보며 좌절했다. 신랑은 아무래도 이미 하자가 있던 에어컨을 산 것 같다고 집주인에게 연락을 해 에어컨 가스 충전을 했는데도 에어컨이 작동하지 않는다고 클레임을 했다.


적잖이 당황한 집주인은 에어컨 수리기사님과 직접 오셔서 가스 충전을 다시 해보고 이리지리 상태를 살폈다. 에어컨 수리 기사님이 메인 보드가 나간 것 같다고, 고치려면 시간이 걸린다는 것과 당장 고칠 수 없다는 말씀을 하고 가셨고, 집주인은 미안하다고 했다.


창문을 다 열고도 집안 열기는 식지 않았고, 우리는 캠핑을 하는 마음으로 베란다에 이불을 깔고 여름을 견뎠다. 새벽이면 살짝 추운 날도 있었다. 에어컨은 가장 덥다는 8월 초를 조금 넘긴 어느 날 고쳐졌다. 메인 보드 수리비는 20만 원이 넘었다. 중고 에어컨이 순식간에 27만 원을 잡아먹고 제법 몸값이 비싸졌다.  


그해 여름 신랑에게 가장 많이 한 말이, “이래서 내가 중고 안 사겠다고 했는데, 새거 사자고 했지”였다. 일은 이미 벌어졌고, 누구 탓을 한다고 상황이 달라지는 것도 아니지만 그 더위를, 그 화를 누구에게라도 퍼붓고 싶었다.




작년 여름은 조마조마하는 마음으로 에어컨을 켰지만, 다행히도 제 기능을 톡톡히 했다.

올 6월, 6월이 맞나 싶게 한낮 집에서 코에 송골송골 맺히는 땀방울을 보며 에어컨을 켠 날. 우리의 시간은 다시 2년 전 그 여름으로 돌아갔다. 이미 집주인을 충분히 괴롭혔다는 생각에 에어컨이 또 고장 나더라도 연락은 하지 말자고, 우리가 감수하자고 다짐했던 터라 올해는 작동하지 않는 에어컨을 보면서 생각이 많아졌다.


일단 가스 충전이라도 해보겠다는 신랑에게, 4-5일마다 가스를 7만 원씩 충전할 수 없다고 못 박았다.


신랑은 한낮에는 집에 없다. 더우면 열꽃이 올라오는 그가 한낮 집에 없다는 건 얼마나 다행인지 싶다가도, 그래서 내가 얼마나 한낮에 더위와 싸우는지도 모른다.


고치는 것 외의 대안은 나만 한낮에 집에 없으면 될 것 같았다. 8월이면 새로운 여정을 계획하고 있는지라, 7월 한 달 어찌어찌 버티면 될 것 같기도 하고, 기후변화를 체감할 기회가 될 것 같기도 하고, 너무 더워지면 5분 거리의 도서관에 가서 더 열심히 살아볼 것도 같은 거다.


 




내가 광주에 살 때 우리 집엔 에어컨이 없었다. 오빠가 돈을 벌기 시작하면서 에어컨을 사드렸지만 집주인 어머니처럼 엄마도 가끔 손주들이 오는 무더운 여름에만 켜곤 하신다. 내가 처음 제대로 만난 에어컨은 고등학교 교실에서였다. 에어컨을 켜는 호사는 고3 수험생만 누릴 수 있었고, 종일도 아니고 아주 더운 시간에만 2-3시간 틀어줄 뿐이었다.

그때는 에어컨 보급률이 높지도 않았는데(지방이라 그랬는지도, 아님 내가 크게 못 느꼈는지도), 에어컨은 온실가스를 배출하는 온난화의 주범이니 가급적 사용하지 않는 게 좋다고 가르쳤었다. 그래서 다닥다닥 붙어 사람의 체온까지 더해져 한껏 달아오른 그 교실에 앉아 비 오듯 땀을 쏟고서도 지구를 위하고 있다고 믿었다.  


이미 기후위기는 시작되었고, 2-30년 전과 달리 지금의 여름은 목숨을 위협할 정도로 기온이 올랐다.


에어컨을 고치면 자성이 무색하게 바로 에어컨을 켤 거다. 늘 손이 닿는 곳에 에어컨 리모컨이 있고, 조금이라도 땀이 날 것 같으면 에어컨은 당연했으니깐. 그래서 고치고 싶지 않아 졌다.


나 하나 에어컨 안 쓴다고 뭐 그리 달라지겠냐마는

나 하나라도 안 써보겠다는, 대단한 작심은 아니지만 이렇게라도 당연한 것에서 한 발 물러서 보겠다는 결심을 했다.


극한으로 기후위기를 체험하겠다는 나에게 신랑은 굳이 그럴 필요는 없다고 하지만, 정히 더우면 도서관으로 피신해 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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