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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어나 Feb 04. 2024

어린 날의 외식

경양식집 돈가스


눈이 안 좋은 나는 5살 때부터 안경을 썼다. 안경을 맞추고 가뜩이나 예쁘지 않다고 생각했던 얼굴에 괴물 같은 안경을 덧 씌워 눈이 4개가 된 날, 나는 동네방네 내 울음소리가 잘 울려 퍼지도록 떼를 쓰고 울면서 안경을 절대 안 쓰겠다고 몸부림을 치고 있었다.


당시 일요일에는 디즈니만화영화가 방영되고 있었다. 어릴 때도 잠이 많았던 나는 일요일에 누가 깨우지 않아도 아침마다 겨우 눈을 비비며 일어나 참을성 있게 그 만화영화를 처음부터 끝까지 한 주도 빠짐없이 봤다. 그러던 중에 엄마가 TV 바로 앞에 서서 눈을 희끄무레하고 뜨고 만화를 보던 내 손을 이끌고 집 근처 안경점으로 갔고, 근시, 원시, 난시의 복합 시력이라 당장 안경을 써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이다. 당시 기술로는 근시, 난시, 원시를 교정하는 렌즈가 두껍고 무거웠으며, 안경테도 안경알도 5살 아이가 하기엔 버거워 번번이 콧잔등에 미끄러져 내려오다 보니 멀리서 보면 진짜 눈이 4개처럼 보였다.


그 뒤로 나는 교정하지 않으면 상이 겹쳐 보이는 난시로 인해 안과 정기검진을 1년에 1~2차례 다녀야만 했다. 눈이 4개가 된 날부터 안경을 안 쓰겠다고 하는 나를 데리고 시내(당시 충장로)에 나가서 안과를 들렀다 오는 건 아빠 몫이었다. 구슬리기 가장 좋은 건 그 당시에도 아마 먹을 것이었나 보다. 나는 돈가스에 팔려가서 안과를 들렀다 오고는 했다.


지금처럼 돈가스집이 흔하지도 않았고, 지금처럼 저렴하지도(물론 요새 거의 2만 원에 육박하는 비싼 돈가스도 많지만) 않았다. 그리고 에어후라이어가 제법 그럴듯하게 맛을 표현하는 냉동 돈가스도 흔치 않던 시절이었다. 학교 앞 돈가스꼬치는 고기의 함량보다는 오히려 밀가루의 함량이 더 높아 그건 거의 분홍소시지 같은 존재였다(물론 분홍소시지에 환장했지만).


그 당시엔 돈가스는 경양식집에서 먹는 고급요리였다. 물론 우리 집 생활수준에서 말이다. 가면 요새 말로 코스요리처럼 일단 넓적한 접시 위에 후추가 가볍게 흩날릴 정도로 뿌려진 수프 접시가 나오곤 했다. 돈가스, 비후가스 정도로 종류가 나뉘었던 거 같은데, 나는 늘 돈가스였다. 수프 접시가 앞에 놓이면 입에 다 들어가지도 않을 넓적하고 오목한 스푼으로 4개의 눈을 가진 쪼그마한 아이가 수프를 단숨에 해치웠다. 아빠는 늘 수프 킬러에게 본인의 수프도 양보하고는 했다. 수프를 다 먹고 나면 메인 코스인 돈가스가 나왔다. 칼도 잘 쓸 줄 몰라 아빠가 한입사이즈로 잘라주면 입에 넣고 오물거리는 맛이 어찌나 맛있는지, 돈가스를 먹을 때면 눈이 나쁜 것도 나쁜 것만은 아니라고 스스로를 위안하고는 했다. 오빠는 눈이 좋아 1년에 한두 번 먹는 돈가스를 못 먹는 거니깐 그것도 내내 고소했었다. 우리 네 식구 외식을 자주 할 만큼 좋은 형편은 아니었으니깐, 나만 누리는 호사였음에도 그게 한 번도 누군가에게 미안하기보다는 눈이 안 좋은 나만 당연히 누려야 하는 호사라고 생각했었다.


지금은 돈가스가 외식으로 치지도 않고 아무 때고 먹을 수 있는 평범한 메뉴가 되어버렸지만, 나는 아직도 돈가스 전에 주었던 후추가 뿌려진 수프만큼은 너무도 그립다. 그리고 한 때 돈가스는 다 잘라 놓고 먹는 게 아니라 조금씩 잘라서 먹는 게 맞는 거라고 돈가스 정석론을 주장한 사람 앞에서는 그렇게 해보려고도 노력도 해봤지만, 초장에 다 잘라놓고 입이 비었을 때만 포크로 하나씩 넣어주는 그 돈가스의 향연을 나는 여전히 잊지 못한다.


지금은 안경을 쓰는 게 조금도 어색하지 않아 졌다. 눈을 뜨면 당연히 신체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 눈은 장식품에 불과하고 더듬더듬 안경을 찾아서 써야 그제야 내 눈이 생기게 되는 삶을 산 지 오래되어 오히려 고맙기까지 하다. 한 때는 콧잔등에 걸쳐진 흉물 그 자체가, 사진을 찍으면 늘 내 눈이 아닌 두꺼운 안경알에 굴곡된 외계인 같은 눈이 미치도록 싫었던 때가 있었다. 대학교에 가서는 화장이 안경 코받침에 꼭 뭉쳐 있는 꼴이 내가 보기에도 못나 보이던 날들도 있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하면 그 모든 불편함이 그래도 그 당시 아빠와 나 사이에 경양식집 추억이라도 남겨주어서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어딘가에 그런 경양식집이 아직도 있었으면 좋겠다. 요새는 왜 이토록 잊히고 사라진 것들에 자꾸만 집착을 하는지 모르겠다. 아련한 그때로 한 번씩 떠나는 여행은 꼭 몽글몽글하게 사랑받은 기억을 한편에 남겨 내내 따뜻하다.


입춘이다. 봄이 오기 전에 맞는 마음 따뜻함. 책을 보다가 문득 돈가스가 쓰여 있기에 또 추억놀이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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