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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작가 Dec 10. 2018

숫자 0의 의미

0과 죽음

혹시 0이 의미하는 바를 생각해본 적 있는가? 너무 쉽게 접하는 숫자이기에 딱히 눈여겨본 적은 없을 거라 생각한다. 내가 그랬듯이. 곰곰이 떠올려보면 0이란 숫자와 관련이 없던 날은 단 하루도 없지만 일상 속에 녹아든 무언가는 잘 살펴보지 않게 되는 법이다.


0의 뜻을 물어보면 보통 '없다'는 의미를 많이 말한다. 0이라고 표기하는 숫자는 빈 상태를 나타내기 위해 적기 시작했으니 맞는 말이다. 하지만 '0'이라는 숫자를 좀 더 파헤쳐보면 단순히 '없다'는 뜻만으론 이해하기 어렵다는 걸 알 수 있다. 0의 의미는 크게 3가지로 나눠볼 수 있으며 다음과 같다.


1) 빌 (空)
2) 없을 (無)
3) 시작 (始)


1) 비다

10, 50, 9009, 0.1과 같은 수에서 0은 비어있음을 나타낸다. 기호 '0' 없이 표기한다면 1, 5, 99, .1이 된다. 원래의 수가 나타내던 뜻과 전혀 다르게 된다. 과거에 수를 나타낼 땐 1, 10, 100 각 자릿수에 따라 다른 그림을 그리거나 '千千千千千一'과 같이 다소 불편하게 표기했었다. 


빈 상태를 나타내 주는 0의 기호 역할이 생기면서 지금과 같은 수체계가 확립될 수 있었다. 지금은 당연하게 받아들이지만 1, 2, 3,... 과 같은 수들은 실존하는 사물과 탄생의 배경이 연결되어 있다. 반면 '비어있는' 미지의 상태를 0이라고 나타내고 수로 인정한 것은 특이한 경우가 아닐 수 없다.


2) 없다

0은 없음(無)을 뜻한다. 오랜 기간 숫자로 인정받지 못한 이유기도 하다. 굳이 '없는 상태'를 수로 표현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1개, 2개, 3개가 있는 건 표시할 이유가 있지만 없는 건 '없다'라고 이야기하면 끝이었다. 하지만 없음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뜻이 아니다. '없다'는 특정한 상태가 명백히 존재하게 된다. 그래서 0은 없는(無) 상태이면서 동시에 '없는 상태'가 존재(有)하는 모순을 갖고 있다.


'없음'을 뜻하는 0에 대한 생각이 양과 음의 이원론과 맞닿으면서 0과 1, 두 기호만을 사용한 이진법이 탄생하는 배경이 된다. 이진법은 삶의 양상 자체를 변화시켰다. 우리의 주변은 온통 0과 1로 둘러싸여 있다. 아침에 일어나면 10명 중 9명은 핸드폰에 손을 뻗는다. 시간을 보기 위해, SNS를 하기 위해, 인터넷 기사를 읽기 위해. 이유는 다양하지만 요즘 시대에 사는 우리의 하루는 비슷한 양상으로 시작하고 있다. 자기 전까진 핸드폰과 떨어지는 일이 거의 없다. 핸드폰뿐만이 아니다. 이제는 0과 1로 이루어진 디지털 세계가 현실보다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3) 시작

0은 하나의 기준이다. 정수 중 유일하게 양수도 음수도 아닌 수로 길이를 잴 때, 금액을 셀 때, 물이 얼 때의 온도 등 실생활에서 기준을 세울 때 0을 많이 사용한다. '아무것도 없는', '빈' 상태를 뜻하는 '0'을 기준으로 삼고 하나씩 늘려나가는 방법이다. 0을 숫자로 표기한 지는 약 1400년 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어찌 된 일일까?


그 이유는 空의 개념이 0을 숫자로 표기하기 훨씬 전부터 존재하던 개념이고 이를 기준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空과 같은 상태는 생활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래서 익숙하고 어떤 기준으로 삼기에 딱 알맞다. 0이라는 숫자가 나중에 덧붙여졌다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일 것 같다. 따라서 시작점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0이 적용되는 상황이 문화마다 조금씩 다르게 나타나기도 한다.(한국의 1층이 유럽에서 0층인 이유이다.)





0과 죽음

죽음은 0과 매우 닮았다. 위에서 말한 0의 의미는 '비다', '없다', '시작'이다. 0은 빈 상태이며 없음을 나타내기도, 시작을 나타내는 기준이 되기도 한다. 죽음도 이와 마찬가지다. 하나하나 살펴보면 유사한 부분이 꽤나 많이 드러난다. 



1) 비다

0은 비었다. 아무리 들여다봐도 보이는 건 무엇 하나 없다. 그게 '0'이다. 죽음 또한 비어있다. 세상에 죽음을 경험해본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그렇기에 죽음이 의미하는 바를, 죽음 뒤에 무엇이 존재하는지 추측만 해볼 뿐이다. 죽음을 수백 년 수천 년 고찰한다 한들 정확하게 알 수 있는 사실은 죽음이 있다는 사실 그것뿐이다. 죽음을 들여다보기 위해 노력해도 보이는 건 아무것도 없다. 우린 그런 상태를 '죽음'이라고 부르고 있다.


2) 없다

죽음은 과연 무엇일까. 죽음에 대해선 많은 의견이 오가고 있다. 모든 신체 기능의 정지를 죽음으로 정의할 것인지, 정신을 지배하는 '뇌'가 정지했을 때를 죽음으로 정의할 것인지. 죽음 뒤에는 천국과 지옥이 있는지, 새로운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게 되는 것인지. 죽음에 대한 정의부터 사후 세계까지 다양하게 의견을 나누고 있다. 하지만 우린 죽음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에 어떤 게 올바른 정의라고 판단할 수 없다. 더 그럴듯하다고 생각하는 의견에 동조할 뿐이다.


죽음은 아무것도 없는 상태일까? 아무것도 없다는 건 무슨 상태를 뜻할까?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하는 가장 큰 이유는 불확실성 때문이다. 언제 내게 다가올지 모르며 죽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다. 0이 의미하는 '없다'는 상태가 미지의 영역인 것처럼 죽음을 맞이하는 게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하지만 '0'이 없음을 나타내기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죽음' 또한 삶이 끝나는 그 미지의 영역을 나타내기 위해 존재한다.


3) 시작

죽음은 과연 삶의 끝일까. 죽은 자들만 모여있는 사후세계가 존재한다는 의견도 있고 다시 생명을 얻어 세상에 태어난다는 의견도 있다. 혹은 모두가 시간 속에 영원히 살아 있는 존재라 말하는 이도 있다. 확실한 건 죽음이라는 기준이 우리에게 있다는 거다. 0이라는 수가 기준이 되어주는 것처럼 죽음도 인간에게 기준이 된다. 죽음을 0, 삶을 1이라고 할 때, 우리는 세상에 태어나고(1) 반드시 죽는다(0). 모두가 '죽음'이라는 동일한 기준을 갖고 있으며 이는 죽음이라고 명하기 훨씬 전부터 존재해온 개념이고 현재는 신체의 정지를 '죽음'이라고 부르고 있다.


스티브잡스의 스탠포드 연설

스티브 잡스가 예전에 했던 말 중에 잘 이해가 되지 않았던 문장이 있다. '삶이 만든 최고의 발명품은 죽음이다.' 삶이 만들어낸 발명품이라는 표현이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0이라는 숫자와 죽음의 연관성을 생각하면서 이해가 됐다. 삶은 생겨남과 동시에 죽음을 가져왔다. 우린 삶의 끝을 '죽음'이라고 명하고 이를 반복적으로 상기함으로써 지금의 삶을 더 의미 있게 사는 게 가능해졌다. 인간이 태어나서 죽는 것은 당연한 순리지만 이를 발명품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죽음이 인간한테 지니는 의미가 큰 것이다.


"오늘이 내 인생 마지막 날이라면 지금 하려고 하는 일을 할 것인가?"

이에 대한 내 대답은 항상 'NO'였고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의미 없는 질문은 아니었다. 의문을 갖고 깊게 생각하길 반복하니 진짜 내가 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 찾는 습관이 생겼다. '0'이라는 수가 인간이 발명한 최고의 발명품이란 말을 듣는 이유는 0에 대해 고민하고 방법을 모색했기 때문이다. 삶이 만든 최고의 발명품이 죽음이기 위해선 죽음에 대해 고민하고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할 사람은 각자의 삶에서 자신뿐이다.




0이란 숫자는 아무리 들여다봐도 보이는 게 없다. 하지만 0을 통해서 볼 때 우린 온 세상을 바라볼 수 있다. 죽음 역시 들여다봐도 무엇 하나 명확히 보이는 게 없다. 하지만 우린 죽음을 인지하고 죽음을 렌즈로 삼아 세상을 바라볼 수 있다.


사실 죽음 자체는 중요하지 않다. 그것은 한순간의 일일 뿐이다. 문제는 어떻게 죽느냐가 아니고 어떻게 사느냐이다. 오늘을 더 잘 살아가기 위해 꾸준히 죽음이라는 렌즈를 닦아보는 게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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