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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펜슬 스커트 Jan 11. 2022

추억 소환 티켓, 음악과 냄새

그 노래, 그 향기를 맡으면 언제나 그때 그곳으로 갈 수 있다. 

그저 좋은 음악과 내게 특별한 노래 


어제 문득 생각나는 노래가 있어서 급하게 찾아들었다.

진짜 오래전 노래이고 별로 대중적인 인기가 없었던 노래였지만 오랜만에 또 마음이 설레었다.


들으면 생각나는 내 인생의 한 때, 어떤 순간을 소환해내는 노래들이 있다.


음악은 그저 듣기 좋기도 하지만 언제든지 꺼내서 펼쳐보면 형형색색 입체적으로 펼쳐지는 팝업카드처럼 그렇게 마음속에 그날의 감정과 그때의 분위기, 그리고 그 사람을 생생하게 다시 내 앞에 데려다 놓기도 한다.


어제와 오늘 아침까지 들었던 노래는 '이가희의 이런 걸 바래'였다.

이 노래를 처음 들었을 때 나는 20대 중반의 직장인이었고 남산에 있는 SK C&C 빌딩에서 근무를 하고 있었다. SK C&C가 직장은 아니었고 SK텔레콤의 웹 프로젝트를 하는 에이전시 신분으로 거기에서 파견 나와 일하고 있었다. 나는 기획자였고 나랑 동갑내기 2명의 여자 개발자와 75년생 남자 개발자 한 명이 함께 일을 했다. 

이가희는 015B의 정석원에 의해서 만들어진 프로젝트 가수였는데 나는 그녀의 목소리를 좋아했다.

이런 걸 바래 라는 노래는 남자 친구에게 여자 친구가 바라는 걸 들려주는 전형적인 사랑노래인데, 그 당시에 가사가 너무 내 맘 같다고 생각해서 자주 들었다.

한 20년 만에 잊혔던 노래를 다시 들으니.. 그때의 내가 또다시 생생하게 느껴졌다.

밤새 일하면서 mp3 음악을 들었던 그 사무실과 주변 동료들. 나를 애타게 만들었던 그 사람에 대한 기억.

20대 중반의 어리고 풋풋한 내 모습까지.


노래를 여러 번 반복해서 듣는 동안 설레고 떨리고 또 그리웠다. 


어떤 노래는 어떤 순간의 기억에 각인되어 있다. 그 노래를 듣기 시작했을 때의 순간, 그 노래가 강하게 필요했던 때의 순간..

정말 노래가 없었더라면 지나간 날들을 어떻게 이렇게 생생하게 다시 꺼내볼 수 있을까. 


영원히 나의 젊은 날을 돌아볼 수 있는 음악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세상의 모든 음악에게 감사한다.


영화 비긴 어게인의 한 장면 - 

'플레이리스트를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어' 라며 여자의 플레이리스트를 궁금해하는 남자. 

남녀 주인공은 자신의 플레이리스트를 공유하며 음악을 함께 듣는다.

플레이리스트는 그 사람의 취향이면서도 인생이기도 하다. 플레이리스트는 그 사람이 어떤 시간을 살아왔고,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말해준다. 



매력과 중독 사이, 냄새에 대한 기억 


사람에게서는 그마다 독특한 냄새가 있다. 

후각은 인간의 감각 중 가장 빠르게 피로해지는 감각이긴 하나, 가장 강렬한 감각이기도 한 것 같다.


어떤 사람의 냄새가 인지된다는 것은, 그만큼 가깝게 그 사람과 물리적인 거리감을 좁혀봤다는 것이다. 

향수를 뿌려도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체취와 섞여서 각자 사람마다 다른 냄새가 난다고 한다.  


음악은 전반적인 추억을 소환해내는 도구라고 한다면, 냄새는 특정한 사람을 불러오는데 아주 효과가 큰 추억 소환 도구이다. 향은 강렬한 기억을 뇌 주름에 각인한다. 


그에게서는 묘하게 자극적이면서도 그 사람을 닮은 섹시한 향이 났다.

그가 가까이 오면 그에게 착 달라붙은 것만 같이 마치 그의 살 냄새인듯한 향수 냄새가 났고, 나는 그 향에 온 정신이 혼미해졌다.

그의 냄새는 내가 그를 사랑하지 않을, 그를 거부할 신체적 정신적 항거 능력마저 무력하게 만들었다.

나는 그 사람에게 푹 빠져버렸다.

24시간 그와 함께 있고 싶었고 그를 소유하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그의 향기를 소유하기로 마음먹었다.

백화점에서 그가 사용하는 향수를 샀다.

그리고는 가끔 뿌려보았다. 내 손목에서 나는 그의 향수를 맡을 때마다 그가 나와 함께 하는 것만 같았다.



그 사람의 향, 버버리 브릿.



영화 기생충에서 냄새는 '은은하게 몸에 배어 쉽사리 사라지지 않는 계급과 갈등'을 의미한다. 이처럼 냄새란 오랫동안 스며들어 어떤 기억과 형상을 만드는 도구인 것 같다.


직장생활을 갓 시작했을 때 광고회사 FD를 하던 남자를 만났다.

너무너무 추웠던 날, 그는 자기의 목도리를 나에게 둘러주었다.

솔리드 버건디 컬러의 목도리였는데, 그 목도리에는 그가 사용하던 다비도프 쿨워터 향이 잔뜩 배어 있었다.


그와 헤어지고 10년쯤 지나 백화점에서 걸어가다 어떤 남자와 스쳤는데, 그 사람에게서 다비도프 쿨워터 향이 났다. 나는 부지불식간에 그 사람을 돌아보았다. 물론.. 그는 일면식도 없는 낯선 남자였다.


내게 향은 매력과 중독 사이의 아슬아슬하게 위험한 추억 소환 도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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