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도성장의 시기가 있었다.
나는 이커머스 업계에서 20년 넘게 일했다.
경력은 주로 서비스 기획과 플랫폼 운영으로 쌓았다.
커리어의 시작은 서비스 기획이었다. 서비스 기획자일 때 나는 소위 일 잘하는 직원이었다.
나는 좀 꿈을 꿀 줄 알고 아이디어도 좋은 편이어서 새로운 것들을 잘 기획했고 구현해냈다.
서비스 기획업무는 무에서 유를 만들어낸다는 면에서, 결과물이 눈으로 보인다는 면에서 참 매력 있었다.
내가 한참 서비스 기획업무를 하던 시기엔 기획의 성과를 측정할만한 기법이나 도구가 잘 없었다
즉, 무엇이 성공적인 기획이고 무엇이 실패한 기획인지.
무엇을 보완하면 좋은지.. 데이터로 분석해내지 못했다.
분석에 큰 중요성도 느끼지 못하고.. 만들고 허물고, 만들고 허물고를 반복했던 것 같다.
그 당시에는 만드는 것이 훨씬 어렵고 중요한 일이었으니까..
4차 산업혁명과 함께 계급 사회가 왔다.
신도시 아파트처럼 우뚝우뚝 쇼핑몰을 '구축'하던 시기가 지나.. 누구나 초반에 시도만 하면 성과가 팡팡 터지던 잭팟의 시기가 지났다.
과거 2차 산업혁명으로 비즈니스 지형도가 달라졌듯 이커머스 세계에서는 4차 산업혁명을 겪으며 엄청난 지각변동이 일어났다. 여러 경쟁자들과 치열하게 경쟁을 했다. 이제 그 지루한 싸움은 끝난 것도 아닌 것이 완전히 승자를 판가름해내지도 못한 어중간한 전쟁터가 되었다.
4차 산업혁명은 이커머스 시장에 계층화를 만들었다.
소위 잘 나가고 모든 이커머스 종사자가 가고 싶어 하는 1그룹의 회사들. 딱 이름만 들으면 아는 곳들이다. 진정한 유통과 IT 공룡들이다. 1그룹 중에 No.1의 최강자가 될 후보들이 있다. 우리는 주로 '이커머스'라고 하면 1그룹의 회사들을 떠올리고 그들을 공부하려고 한다. 이들은 이미 가진 것이 많은 만큼 욕심도 많다. 1등이 되기 위해서 투자하고 출혈하고 치열하게 싸운다. 재벌들이 대대로 경영을 물려주며 부를 축적하여 지금에 이른 방식과는 다르게 '기업가치'로 新재벌의 반열에 오른 새로운 비즈니스 맨들이 이 그룹을 이끌고 있다.
2그룹은 핫하고 트렌디하면서 매력을 뽐내는 버티컬 커머스 회사들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모바일 시대 이후에 탄생한 커머스 회사들이며 '유통'에 비즈니스의 뿌리를 두고 있다기보다는 'IT'회사에 가깝다. 유니콘 기업도 꽤 속해있는 Neo-Commerce Leader들이다. 시장 점유율과 영향력 측면에서 1그룹보다 못하지만 이들에게는 희망이라는 것이 있다. 1그룹으로 올라갈 수도 있다. 그리고 여기서 일하는 직원들은 주식 부자의 꿈을 꿀 수도 있다. (요즘 곤두박질치는 하락장을 보자면 몇 년간은 그런 희망을 가지기 쉽지 않을 것이지만.. 회사가 상장한다는 것이 직원들에게 나쁘게 작용하지는 않을 것 같다). 다양한 '기술 기반'으로 커머스를 운영한다고 알려져 있다.
3그룹은 한 때 영향력도 있었고 외형도 꽤 되었던, 그러나 지금은 평범해져 버린 전통적인 커머스 기업들로 분류할 수 있다. 3그룹으로 분류되는 기업들이 그렇다고 망해간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더 이상 '성장'이 어려운 기업들. 이커머스 업계에서 1등이 되기 불가능해진 기업들을 여기로 분류한다. 나름 외형규모를 지키려고 노력하고 구매자들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내부적으로 이것저것 열심히 한다. 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몸집 키우기'가 아니다. 이미 몸집을 키워서 경쟁자를 이기기에는 성장판이 닫혀버렸다. 총알이 많아야 전쟁에서 싸워볼 만한데 사용할 총알도 과거만큼 없다. 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먹고사는 문제이다. 돈을 벌어야 한다. 앞으로 벌고 뒤로 까지는 그런 보여주기 식 성장이 아니라 실제 실속이 있어야 사업을 유지할 수 있다. 마구 질러서는 상처뿐인 영광뿐이다. 이미 1등 경쟁에서 도태되어 버린 이들은 툴툴 털고 일어나서 땅에 발을 단단히 딛고 '상인'으로서의 감각을 최대한 발휘하여 꼼꼼하게 돈을 벌어야 한다.
코로나 엔데믹, 잔치는 끝났다.
미지의 전염병에 우리를 세계를 덮쳤다.
락다운으로 봉쇄된 경제를 부양하기 위해서 미국 연준은 금리를 낮추고 돈을 풀었다. 주식시장은 유입되는 유동자금으로 연일 상한가를 쳤다.
배달과 이커머스 업계는 갑작스러운 호황을 맞았다. 오프라인 쇼핑의 상당수가 온라인으로 몰렸고, 이커머스 업계는 5년 동안 성장할 것을 이 시기에 다 했다는 얘기를 했다. 주로 크게 치고 나갔던 회사들은 배송 경쟁 인프라가 구축되어있는 곳들이었지만, 전반적으로 모든 이커머스 업체가 반사이익을 누렸다. 3그룹도 예외는 아니었다.
코로나 확진자가 정점을 지나고 실외 마스크 착용 의무화도 해지되고, 오프라인 모임에 대한 규제도 사라졌다. 사람들은 전보다 열정적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모바일 쇼핑 취급고가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커머스 저성장의 시대로
MZ세대는 부모세대보다 가난한 첫 번째 세대가 될 거라고 한다.
우리 사회는 저성장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고도성장을 거듭하던 시기에 쉽사리 잡을 수 있었던 직장도 귀해졌고, 부를 축적하기도 어려워졌다.
우리 아이들의 삶이 팍팍해지고 있다.
이커머스 업계도 매일매일 새롭고 흥미로운 소식이 나오고 업계가 화젯거리가 되던 시기는 좀 지난 것 같다. 코로나 팬데믹처럼 이렇게 급작스러운 호재가 다시 오기도 쉽지 않은 일이다.
아직 30년의 역사가 채 되지 않는 한국의 이커머스는 MZ세대를 닮아있다.
저성장의 시대는 보수화된 사회이다. 가진 것을 지키는 것이 가장 중요한 시대이다.
막막 성장하기는 어렵기 때문에 '효율'이 중요하다. 비용 대비 효과. 기존의 것을 잘 활용하는 지혜. 꼼꼼하고 디테일한 살림살이 신공.
누군가, 또다시 새로운 것을 들고 나타날지도 모른다.
산업 간의 합종연횡이 일어날 수도 있을 것도 같다.
이커머스 저성장의 시대, 업계 종사자로서 나는 괜찮은지.. 한번 돌아본다.
우리는 분명, 기존과 다르게 생각해야 하고 일해야 한다.
기존과 다른 전략이 필요하다..
내가 나이를 먹어가는 것처럼, 뜨겁게 활기차게 뛰고 있던 20년 전의 이커머스 업계를 생각해본다.
이러니 '라떼'라는 얘기가 나오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