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로 소강되었던 많은 일상이 다시 돌아왔다. 언택트의 시기를 통과하면서 우리는 비약적인 기술 발전을 목도했다. 화상회의는 물론이거니와 비대면 진료와 수업까지 아직 실생활에 적용시키기 어려울 거라는 기술은 깜빡이도 없이 우리 삶에 들어왔고 사회는 거기에 적응해 나갔다. 인터넷 강의가 아닌 정말 비대면 수업을 학교에서는 진행했고 병원은 코로나19 의심 환자에 대해 화면을 통해 진료했다. 인터넷 방송은 규모가 더욱 커졌고 콘서트마저 관객 없이 방송으로 진행되었다.
마치 이제야 그동안 발전시켜 온 기술을 꺼내 드는 것 마냥 사람과 사람이 직접 만나지 않고 그 자리를 대체할 수 있는 기술은 속속들이 일상으로 들어왔다. 그전까지 사람이 만나서 해결할 수 있는 일들은 직접 만나서 해결했으나 그럴 수 없으니 사람들은 서로 떨어져 있음에 적응해 나갔다. 하지만 사람들 대부분이 그런 일상을 '임시'라 생각했다. 코로나19로 인한 잠깐의 소요 사태이지 우리가 생각하는 일상은 다시 돌아오리라 생각했다.
그리고 우리는 언제 그랬냐는 듯 코로나19의 유행이 사그라지고 위드코로나가 되자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우리가 생각하는 과거의 일상으로 '회복'했다. 결국 우리는 기술의 발달이 비대면을 가능하게 함을 확인하는 정도에 그쳤다.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면 아무리 기술이 발전한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 기술을 사용하지 않을 것이다. 사람이 사람을 만나고 눈을 맞추고 말을 하며 표정과 행동을 보고 기분을 파악하고 손을 잡아주는 그런 일들은 기술이 발달해도 결국 곁에 사람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대체 불가능함은 언제나 대체불가능으로 남을 것이고 그 간격은 기술이 메꿔줄 수 없다. 우리는 기술로 멀어진 사람이 가까워질 수는 있어도 그 거리가 팔을 뻗어 닿을 만큼 가까워질 수는 없다는 것을 알았다. 결국 모든 일은 사람이 현실에서 만나야 가능했다. 우리는 오히려 기술 발전으로 서로가 연결되었음을 물론, 아주 멀리 떨어져 있음을 더욱 강하게 인식하게 되었다. 화면 너머의 사람을 만질 수 없다는 사실이 더욱 절실하게 와닿는 시기를 경험했다.
사람과의 접촉이 없는 만남은 온기를 나눌 수 없다. 온기 없는 만남은 서로의 거리를 더 멀게 만든다. 그 거리감이 때로는 화면 너머의 사람을 사람이 아닌 다른 무언가로 대할 때도 있다. 우리는 얼굴을 마주 보고 할 수 없는 말을 단순히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할 수 있음을 안다. 그렇게 던진 말로 사람이 죽는 것도 봤다. 사람을 죽인 그 말을 던진 사람들은 화면 뒤로 숨는다. 처벌이 있었는지 가물가물하다.
온기가 없는 만남은 쉽게 상처를 준다. 기술의 발전은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을 온기 없이 대했고 새로운 범죄를 야기했다. 우리는 매일 발전하는 기술 속에서 내일을 기대하지만 사람과의 거리감은 생각지 못한다.
사람은 만나야 한다. 상처를 받더라도 눈을 마주 보고 서로의 체온을 느껴야 한다. 멀어진 거리감이 임시일 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음으로 우리는 더욱 가까워지려 노력해야 한다. 거리감을 가장 적극적으로 극복하는 것은 모니터 너머가 아니라 문 밖으로 나가는 것이다. 우리는 만나야 한다.
커버 이미지 사진: Unsplash의Jose Castill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