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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매일지각 Mar 08. 2024

작가 호소인에서 실패한 작가로

원래 쓰려던 글은 이게 아니었지만

  원고를 갈아엎으며 생각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글을 못 쓰는 게 맞다. 원래 쓰려던 주제를 빌드업하기 위해 쓰기 시작한 도입부가 점차 길어지더니 결국 원주제를 밀어내고 새로운 글이 되었다. 아, 내가 원래 쓰려던 글은 이게 아니었는데. 이미 쓴 글을 잘라 내야 하는데 그러기에는 너무 많이 써버려서 아깝고, 그렇다고 다듬자니 기존의 주제와 동떨어져서 통째로 들어내야 하는 게 맞겠다 싶다가도, 원래의 주제를 살려 다시 글을 쓰자니 완성할 만큼의 깊이나 분량이 없었다. 게다가 쓰다 보니 이 주제는 뭔가 끌리지 않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시간은 흐르고 어느새 스스로 정한 마감시간이 다 되어 갔다.


  무릇 숙련된 작가란 영감이 떠오를 때 글을 쓰는 게 아니라 글을 쓰는 순간 영감이 찾아오게끔 만들어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 규칙적인 생활에 정해진 루틴처럼 글을 써야 한다는 말인데, 자리에 앉는 순간 써야 하는 글이나 이야기가 떠오른다는 말이 내게는 상상처럼 들렸다. 이전에 계속해서 써 오던 이야기라도 있으면 그것을 이어 쓰겠지만 그것도 아니고 새로운 이야기가 자리에 앉자마자 파바박 떠오르는 것도 아니었다. 어떤 글을 써야겠다는 주제의식은 글을 쓰는 매 순간 흔들렸고 결국 시작과 끝이 다른 글이 되어 버리기 일쑤였다. 백지에 무엇이든 써도 된다는 말은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질문이 되었다. 무엇이든 쓸 수 있다면 도대체 무엇을 써야 되느냐는 말이다.


  이 물음은 내가 어떤 글을 쓰고 싶으냐에서 어떤 작가가 되고 싶으냐는 물음으로 이어지고, 무슨 주제를 다루고 어떻게 세상을 바라볼 것인가 하는 태도를 묻는 질문으로 바뀐다. 그리고 이 질문에 대해 결국 명확한 답을 내놓지 못하고 스스로를 자책하며 모든 것은 덧없고 살아온 나날들은 무의미하고 그러므로…… 등등으로 이어지는 자멸적 고민으로 뻗어간다. 그러다 다시 정신을 차리면 마감시간이 넘어가고 알람이 울린다. 매일 어떤 형식의 글이라도 써서 브런치에 올려보자는 다짐은 그렇게 하루도 못 가 실패한다.


  실패다. 이 얼마나 한심하고 어이없고 쓸모없는 실패인가. 여태 쓴 모든 결과물을 날려버리는 것도 모자라서 스스로 정한 약속도 지키지 못한 파멸적인 실패다. 밤을 새워 쓴 글이 통째로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의 허무함이란, 자신감 하락과 현실 비관과 함께 자아상실에 삶의 무의미까지 뻗어간다. 그리고 마침내 나는 실패했다는 사실을 마주하면 그 절망은 깊어진다. 청소는 물론이고 씻기도 싫고 밥도 먹고 싶지 않다. 도대체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고 세상에 보탬이 되겠다고 이러고 있는지 모르겠고, 이렇게 글을 쓰는 게 어떤 의미가 있지 싶은 생각으로 머리는 가득 찬다.


  하지만 시도가 없으면 실패조차 없다 했던가. 내게는 이 실패가 반갑다. 수년이 넘게 이런 실패조차 하지 못하는 시간을 보냈다. 써야겠다는 생각에 백지를 들여다보고 있으면 도대체 무슨 글을 써야 하는지 망설였고 아무렇게나 쓰자니 정말 아무런 글이 되어버리기 일쑤였다. 글을 쓸 때마다 사람들에게 도무지 보여 줄 수가 없었다. 메모장은 항상 쓰고 지우기를 반복했고 그러다 에라 모르겠다 하는 심정으로 결국 유튜브나 숏폼으로 시간을 허비했다. 지금 생각하면 차라리 에라 모르겠다 하는 심정으로 글을 올려버렸어야 하는 것이었는데 그러질 못했다.


  그리고 마침내 글을 써서 브런치에 올리며 생각한다. 쓰기를 간절히 바랐으나 아무것도 쓰지 못했던 작가 호소인에서 마침내 썼으나 만족하지 못한 실패한 작가가 되었다고. 이 실패가 어떤 중요한 경험이 되리라 생각하지 않는다. 이 글은 앞으로 써낼 수많은 글 중 한 편일 뿐이다. 이런 글을 쓰게 될지 다른 글을 쓰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겨우 작가가 되어 이런 글이라도 쓰게 된 것을 위안으로 삼는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든가 '실패도 경험이다'하는 말은 결국 시도하고 실패했을 때 비로소 의미가 되는 말이다. 그래서 나는 기존에 쓰던 글을 실패하고 이렇게 다른 글을 쓴다. 하물며 이 글조차 실패해도 좋다. 나는 계속해서 글에 대해 실패하는 작가가 될 것이다. 실패하면 어떤가 또 다른 글을 쓰면 그만이지. 이제 씻고 청소하고 밥이나 먹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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