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 샀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 책들이 방 한켠에 꽂혀 있다. 걔 중엔 읽지 않은 것들이 대부분이다. 어느 작가가 TV에 나와 그러지 않았나 "책은 사서 보는 것이 아니라 산 책들 중에 보는 것이다."라고. 읽은 책 보다 읽지 않은 책들이 더 많은 책꽂이를 쳐다보고 있으면, 취미란에 '독서'라고 당당히 적어내던 어린 날의 기억들이 부끄러워진다. 오랜만에 책 등을 훑다가 한 권을 빼내서 침대 위로 던졌다. 안소영 작가의 2015년 작인 『시인 동주』이다.
사놓기만 하고 읽지 않은 책들이 있다
책의 표지에 보이는 '/'는 펜이다. 이는 '시인 윤동주'와 '사람 윤동주'를 나누는 경계가 된다. 소설 『시인 동주』는 우리가 학창 시절에 배운 윤동주보다 사람 윤동주에 주목한다. 소설 속 윤동주는 암울한 식민지 시대의 조선에서 시인으로 산다는 것을 끊임없이 고민한다. 다른 젊은이들은 나라의 독립을 위해 노력하는 데 자신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계속해서 시를 쓰고, 습작하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가? 이것이 나라에 보탬이 되는가? 자신에게는 도움이 되는가? 이 많은 질문들을 윤동주는 스스로에게 던지며 자신의 무기력함을 부끄러워한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시인의 정서와 그 맥락을 같이 하면서 청년 윤동주의 내면을 자연스럽게 그려낸 안소영 작가의 상상력이 돋보인다.
p94 학교 밖에서 하숙 생활을 한 지 얼마 안 되는 동주에게는 설레는 풍경이지만, 거리에 나선 사람들은 모두 지치고 어두운 표정이었다. 산책 삼아 경성의 새벽 거리에 처음 나갔을 때, 동주는 하루를 일찍 시작하는 사람들이 그처럼 많은 것에 놀랐다. 저마다 무거운 보따리를 든 채 묵묵히 걸어가는 뒷모습들은 왜 그리 애잔한지. 그저 새벽 등굣길에 나섰을 뿐인 자신의 가벼운 발걸음이 부끄러웠다.
이러한 정서를 바탕으로 시를 쓰던 윤동주는 일제의 식민지 정책으로 신문들이 폐간되고 출판사들이 문을 닫는 위기를 겪는다. 시를 써서 내보일 지면이 사라지고 한글로 된 원고는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추궁을 받는 등 일제의 단속도 강화된다. 하지만 그러한 상황에서도 윤동주는 시를 쓴다. 남들에게 보여 줄 수 없다 하더라도 윤동주는 시를 쓰는 것이다.
p161 그런데 '고도 국방 국가 건설'로 달려가고 있는 시대에, 더구나 점점 사라져 가는 조선말로 시를 쓰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고 무슨 소용이 있는 일일까. 창작은 공감과 반응을 얻을 때 비로소 빛나는 법인데, 시를 써도 내보일 지면이나 공간이 없었다. 문학 지망생들의 투고를 받아 주고, 신춘문예를 통해 작가들을 발굴하여 등단시켜 주던 신문은 폐간되었다.
p227 편지에서 따로 말하지 않았지만, 동주는 그곳에서도 시를 쓰고 있나 보았다. 아무에게도 보여 줄 수 없고 아무도 보려 하지 않는 시를, 동주는 묵묵히 써 오고 있는 것이다. 조선에서도 우리말로 시를 쓰는 이를 더 이상 찾아볼 수 없게 되었는데……. 한때 신춘문예마다 투고했고 본선 심사평에까지 이름이 올랐던 처중도, 글을 쓰지 않은 지 오래되었다. 글을 쓰는 것을 업으로 삼은 문인들도 그러했다. 아예 쓰지 않고 바보 시늉을 하거나, 문인 협회에 가입하여 '국어'인 일본말로 전쟁을 고무하고 징병제를 찬양하는 시를 썼다. 인쇄소의 조선어 활자들은 더 이상 쓰일 데가 없어, 녹이 슬거나 먼지만 뽀얗게 쌓이고 있다 했다.
윤동주의 시집은 결국 그가 죽고 난 후에 출간된다. 살아생전 자신이 쓴 시를 마음껏 발표하지도 못하고 그저 습작 노트와 원고지에만 썼던 시인. 기고할 수 없었던 시를 쓰며 그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발표할 수 없는 글을 노력해서 쓴다는 것이 무의미하게 느껴지고, 시인이 되어도 남들이 알아주지 못하는 것에 겁이 났을 그의 마음을 헤아려 보게 된다.
사람들이 볼 수 없는 글들을 노력하며 쓰는 것, 무관심적인 글에 혼신을 쏟아가며 쓴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윤동주가 살던 시대와는 반대로 지금은 너무 많은 작가들로 인해 개개인의 글들이 잊혀지고 있다. 이미 작가가 많은 세상에 더 많은 작가들이 등장하고 있고 연간 수만 권의 책들이 출판되며, 수십만 건의 글들이 잡지에, 신문에, 인터넷상에서 올라온다.
이런 사실이 글 쓰는 것을 망설이게 한다. 잘 쓰고자 하는 노력보다는 어떻게 하면 자극적으로 쓸까라는 고민을 더 하게 된다. 서정과 서사보단 자극에 열을 올리며 주목받기 위한 글을 쓰게 된다. 요즘은 그런 글들이 너무나 쉽게 주목을 받는다. 신문기사는 물론, 책과 웹상에 연재되는 글과 만화를 비롯하여 드라마와 유튜브 등은 제목에서부터 자극에 열을 올리고 있다. 이야기는 사라지고 자극만 남아 우리를 찌른다. 그리고 그런 자극의 끝에는 누군가가 아파하고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암담했던 시절을 서정으로 노래 한 시인 윤동주. 유고시집이 전부인 그가 시를 쓰기 위해 쏟아부었던 헌신은 무의미하지 않았다. 그의 시는 어느 작가보다도 널리 퍼져 사람들의 가슴에 깊이 남았다. 자극이 넘치는 시대에 서로에게 겨눈 창이 아니라 서로에게 건네는 꽃이 더욱 많아 지기를 바란다. 과거 그의 시가 우리에게 오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