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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매일지각 Dec 22. 2019

어떻게든 살아남기

에세이『뭐라도 되겠지』- 김중혁

  에세이들이 많이 나오는 추세다. 몇 년 전부터 시작된 ‘힐링’의 키워드는 책은 물론, 티브이 프로그램, 음악 등 일상의 모든 문화에 불어닥쳤다. 자신을 끝없이 다그치던 순간들을 돌아보고, 빠르게 달리는 동안 놓친 것들은 없는지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진다. 언제나 부족했고, 언제나 모자라고, 언제나 흔들리던 ‘나’를 돌아보는 것은 일상의 휴식을 너머 세상을 보는 시선을 새롭게 한다.


  이러한 이유로 나의 책장은 소설과 에세이가 주를 이루고 있다. 더는 책장에 꽂아놓을 곳이 없어 책상 위에 쌓아놓은 책들도 있는 마당에 책은 자꾸 늘어나기만 한다.(나는 책이 많은 것이 아니라 책장이 작은 것이다) 책을 사는 것은 맛있는 것을 사 먹는 것만큼 즐거운 일이다. 이미 사다 놓은 책을 다 읽기도 전에 책상 위로 책은 늘어만 가고 책상은 점점 무거워지고 바닥에도 책이 쌓이고 온라인 서점에서 또다시 이메일이 오고 통장은 텅장이 되고…….


  보통의 책은 펼쳐서 읽는 시간보다 책장에 꽂아놓고 책등을 보는 시간이 더 길다. 책장에서 제목만 보이는 책의 물성(物性)은 제목만으로는 이 책을 다 알 수 없다는 한계를 알려줌과 동시에, 제목이 얼마나 책을 대표해주는지를 알게 해 준다. 그 중 출판된 지 꽤 되었으나 나에게 꾸준히 위로를 주는 책이 있다. 소설가 김중혁의 에세이 『뭐라도 되겠지』이다. 


『뭐라도 되겠지』의 앞표지(왼쪽), 차례(가운데), 뒤표지(오른쪽)



  책의 곳곳에 김중혁 작가의 손길이 깃들어 있다. 책의 표지와 본문 중간중간에 들어간 카툰, 펼쳐서 한눈에 볼 수 있는 차례에 책날개에 붙은 작가 소개와 심지어 뒤표지에 있는 추천사마저도 김중혁 작가스럽(?)다. 책을 펼치면 가장 먼저 보이는 글이 있다.     


  ‘재능’이란, 누군가의 짐짝이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나에 대한 배려 없이 무작정 흐르는 시간을 견디는 법을 배운 다음에 생겨나는 것 같다. 그래, 버티다 보면 재능도 생기고 뭐라도 되겠지.


  제목만큼이나 무심하기 그지없는 말이다. 하지만 이런 무심함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큰 도움을 준다. ‘나에 대한 배려 없이 무작정 흐르는 시간’을 견디는 일은 버거운 일이다. 나는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지만 시간은 그런 것에 괘념치 않는다. 무작정 흐르는 시간을 버티기 위해서는 나 역시 그 시간을 무심하게 대할 필요가 있다.


  다가오지도 않고, 일어나지도 않을 많은 것들을 걱정하며 지내던 날들이 있었다. 그런 일들은 일어나지 않아도 안도하기보다는 다시 습관처럼 걱정과 불안을 가져왔다. 무엇을 해야 좋을지,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를 너무 많이 고민한 끝에 아무것도 하지 못한 나날들을 보냈다. 그렇게 흘러간 시간을 나는 후회하며 다시 걱정과 불안과 고민에 시달렸다.


  언젠가 쓰고 읽는 일이 익숙해지고 편안해진다면 이 불안이 사라질 것이라 믿었다. 계속해서 읽고 쓰는 일이 나의 불안을 멈추는 데 일조할 것이라 믿었다. 비록 이 일이 전쟁을 멈추고 기아를 살리고 환경오염을 막지는 못할지라도 읽고 쓰는 행위가 나의 의심은 멈추리라 생각했다.


낭떠러지는 어쩌면 투명한 길일 수도 있다

    

  글을 쓰는 일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곳을 걸어가는 것과 같다. 어두운 산의 초목을 헤치며 걸어가야 할 수도 있고, 낭떠러지의 보이지 않는 다리 위를 가야 할 수도 있다. 이런 불안한 길을 가면서 나는 의심이 들었다. 이 방향이 맞는지, 이 단어가 맞는지, 이 문장이 맞는지를 끊임없이 의심했다. 마침표 뒤에 와야 할 수많은 자모음을 붙잡고 늘어졌으나 불안은 끝나지 않았다.


  그렇게 불안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며 가만히 시간을 보냈다. 다행히 나는 무사히 살아남았지만 그저 '살아'만 남아서 얼마만큼의 시간이 더 지나야 재능이 생길지는 짐작할 수 없었다. 뭐라도 되기 위해 한 노력이 얼마만큼 쌓였는지도 알 수 없었다. 


p40~41
  시간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에게는 소설 쓰기를 권하고 싶지 않다. 소설은 투입하는 시간만큼 결과물이 나오는 작업이 아니다. 모든 게 더디고, 아주 조금씩 전진하고, 가끔은(이런, 제기랄!) 뒤로 가기도 한다.     


p70~71
  소설을 쓰면서도 나는 아무것도 되지 못할까 봐 자주 두려웠다. 다른 사람들이 직장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을 때 나는 빈둥거렸다. 빈둥거리는 게 괴로웠다. 밤새 소설을 쓰고 정오에 일어났을 땐 나 자신이 패배자 같았다. 눈에 보이는 걸 하고 싶었다. 벽돌을 쌓아 올리든 땅을 파든 물건을 옮기든 뭔가 눈앞에서 변화가 일어나는 일을 하고 싶었다. 글을 쓴다는 건 참으로 추상적인 일이다. 추상적인 일을 하다 보니 스트레스 역시 추상적이다.     


  글은 그 결과물을 남들에게 선뜻 보여주기가 꺼려진다. 다듬어도 늘 더 다듬을 곳이 남아있는 것 같아 보이고 끝까지 써도 미완성처럼 느껴진다. 미완성이니 당연히 어디에 내놓을 수도 없고 누군가에게 보여 줄 수도 없었다. 김중혁 작가는 첫 소설인 『펭귄 뉴스』를 지금 보면 쪽팔린다(p16)고 했으니 어쩌면 스스로 쓴 글에 대해 확신을 가진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일 것이다.


  김중혁 작가는 ‘공식적으로는 절대 소설 쓰기를 권하지 않’는다. 그만큼 쓰는 일은 투자한 시간만큼 결과물이 나오지 않고 스트레스마저 추상적이어서 얼마나 힘든지 설명하는 것도 어렵다. ‘아무것도 되지 못할까 봐 자주 두려웠다.’는 그의 말에서 알 수 있듯이 글을 쓰는 일에 있어 불안은 어쩔 수 없이 통과해야 하는 터널과도 같다. 그 터널을 통과하는 방법은 책의 처음에 나오듯 가만히 견뎌내는 것이다.     


p352
  내가 스톡홀름의 작은 호텔방에서 외로워했던 것처럼 지금 이 시간 서울 어딘가 작은 쪽방에서도 반드시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사연이야 어떻든 모두들 외로워하며 버티고 있을 것이다. 그들에게 서울은, 도시는, 야생보다 더욱 무서운 곳일지도 모른다. 자, 모두들, 어떻게든 살아남읍시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불안과 재능에 대한 의심을 견디는 방법은 그저 시간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불안은 필연적이고 의심은 평생 따라온다. 영화 ‘암수 살인’의 대사인 “일단 무조건 믿고 끝까지 의심하자”라는 말처럼 글을 쓰는 것은 어쩌면 최소한의 믿음과 잦은 의심의 반복으로 나아가는 길일 수도 있다.


  ‘어떻게든 살아남읍시다.’라는 말로 작가는 책을 끝맺는다. 살아남는 것. 배려 없이 무작정 흐르는 시간을 버텨내며 살아남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우리는 안다. 열심히 달려오며 살아온 날들이 그저 그렇게 흘러간 것이 아니라는 것도 안다. 하나의 문제를 풀기 위해 수없이 넘겼던 교과서와 하나의 음을 연주하기 위해 수없이 튕겼던 손가락과 하나의 동작을 위해 수없이 노려봤던 거울을 기억한다. 쓰기 위해 지워진 문장과 만들기 위해 깎여진 부분과 그리기 위해 찢어진 종이들. 우리의 하루는 이렇게 버텨내는 것이었다.


  밤늦게 잠이 오지 않는다면 그리고 혹시 그 이유가 불안해서라면 그건 당연한 것이다. 이토록 버텨내는 우리가 무심한 시간을 이기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무의미해지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이미 충분히 잘 견뎌왔다. 하루하루를 거듭해 일주일을, 한 달을, 일 년을 견뎌왔다. 이미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무언가 되어있다. 살아있다. 그렇게... 뭐라도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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