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올리고 새기고 보내드리기
하나님, 어디 시원한 냉수 한 잔 없습니까?!
너무 답답해서 죽을 것 같습니다
당시 마흔 언저리였던 아버지의 일기장을 우연히 본 적이 있다.
속상한 일이 생기면 엄마는 아빠 험담을 했고,
그 모든 일의 최종 근원이라고 스스로를 여기던 아버지는
버럭 소리를 지르거나 밖으로 나갔다 오시고
소주를 마시고 담배를 피우고 침묵하고 일기를 쓰셨다.
속상한 일이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골똘히 기억을 더듬어 보면 사실 그건 돈 문제였다.
그러고 보니 아버지는 거의 매일 그 날 있었던 일을 메모하고 정리하고 공부하셨다. 아주 자세한 것 까지.
짧은 배움이 한이셨는지 매일같이 조선일보 사설을 보시며 시사 공부를 하시고 그걸 노트에 옮겨 적으셨다. 볼펜 말고 촉으로 되어 있는 수성 펜으로 쓴 글씨는 정돈되어 있고 힘이 있었다. 많이 배우지 못했다는 사실은 아버지 일생에서 몇 번의 기회를 놓치게 만들었고, 또 몇 번의 잘못된 선택으로 스스로를 죄인처럼 만들어 버리는 원인이라고 생각하셨는지, 당신은 그걸 평생의 한으로 여기셨다. 심지어는 돌아가시기 저혈압이 심해져 보행이 어려워지기 시작한 임종 4개월 전 까지도 격주에 한번씩 방송통신고등학교에서 공부를 계속 이어나가셨다.
두 아들을 그래도 대학교에 보내신 것 만으로도 꽤나 자랑스러워 하셨다. 물론 그 말을 내 귀로 들은 적은 없다. 항암을 시작하고 병원과 요양시설에 있는 날이 많아지면서 주변 사람들에게 엄마한테 푼수처럼 그렇게하지 말라던 아들 자랑도 하셨던 걸 보면 돌아보면 가부장적이지는 않으셨지만 마음을 어떻게 표현할지도 몰랐던 사람이었으리라.
아버지가 남겨놓은 조각 글들이 유품 어딘가에 하나씩 묻어 있어서 다행히도 나는 고인을 추억하고 떠올릴 수가 있다.
누군가는 3개월, 누군가는 5년을 말했다. 괜찮아 지는데 걸리는 시간을
5년 이면 스프린트를 몇 개를 해야 하는거야. 릴리즈 노트를 몇 번을 써야 하는거야.
그 사이 나는 더 완전한 아저씨가 되어 버리겠지. 아니면 나도 몸 한두군데 쯤 고장나 있겠지.
아니, 사실 나는 나의 죽음도 아버지 처럼 갑작스러울까 겁이 난다. 그때까지 좋은 삶을 살아내야겠다는 굳건한 다짐도 종래에는 어김없이 무너져 버릴거라는 부정의 확신이 더 크다.
영혼이 떠나버린 육체가 냉장상태로 며칠 보존되어 있다가 다시 관에 넣어져 화염 속에 녹아 문자 그대로 한 줌의 회색 재가 되는 과정은 참 야속했다. 한 인생의 서사를 이렇게 간단히 끝내도 되는 걸까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마음이 그리는 존재는 시간과 공간이 빚어온 세계와 다르다는 걸 나는 안다.
해변에 지은 모래성이 바람에 물결에 서서히 녹아서 사라지는 것 처럼, 내가 어떤 노력을 하지 않아도 그렇게 나는 아버지를 잊게 될까? 그렇게 되면 늦은 밤 검은 하늘에 달을 보며 몰래 눈물을 훔치는 일은 없을까? 근데 내 마음에서도 그렇게 사라져 버리면, 나라도 아버지를 그렇게 기억하지 않으면 무존재 그 자체가 되는 건 아닐까, 그렇게 가버리는 아버지한테 서운할까, 그렇게 놓지도 보내드리지도 못하는 내가 되는 건 아닐지 겁도 난다.
나는 좀 용기가 필요하다. 아버지의 앙상한 몸을 손으로 쓰다듬었던 날, 그 순간의 감정이 일어나면 머릿속을 휘젓는 폭풍과 내 몸을 휘감은 무력감 그리고 조목조목 판결 내리기 어려운 죄책감 같은 것들이 한번에 찾아 온다. 그래도 나는 좀 더 아버지의 고단했던 날들을 만지고, 품어도 보고, 안아도 보면서 그때의 마음속으로 들어가서 아버지를 천천히 보내드리고 또 내 마음속에도 묻어 간직하고 싶다는 마음이 커졌다.
그러고 보니 나는 엄마 보다는 아버지를 닮았다.
엄마가 보면 서운할 말이지만 나는 그게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