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으로 달려가기 위해 눌러진 스탑워치
회사에서 그 해 암묵적으로 허용해 준 한국 체류 가능 기간은 6개월이었다.
나는 아버지의 항암 치료와 간병으로 4개월 반을, 나머지 한달 반을 남겨질 가족을 위해 쓸 수 있게 일정을 안배했다. 잔인하지만 어쩔 수 없는 시간 배분이었다. 기적이 일어나면 그 나머지 한달 반을 아버지께 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도 있었다.
그 두 기간 사이 다시 독일로 돌아와서 불안한 일상을 보내는 중, 아버지 생각이 나서, 아버지 얼굴이 보고싶어서, 구글 포토에 저장된 사진 위치까지 스크롤 하는데도 많은 망설임이 있었다. 불과 몇 달 전에 본 아버지의 모습에서는 청년의 흔적이 여전히 보였건만 한 두달 뒤 돌아오겠노라 말하면서 찍어놓은, 앙상하고 기력 없는, 이제는 의식도 흐릿한 초라한 노인의 모습이 먼저 보여서 재빨리 화면을 스크롤 했다.
수능 보는 전날까지도 술을 거나하게 드시고 오셔서 주정부리고 소리지르던 아버지가, 화나는 일이 생기면 엄마한테 윽박지르는 일이 앞서던 옛날 사람 아버지가, 처음 도독 후 한국 방문 했을때 공항에서 너무 반가웠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손등만 한번 멋쩍게 스치는걸로만 대신했던 그 아버지가, 그러면서도 유독 내가 하는 말 만큼은 꿈쩍않고 들으셨던 아버지가 가슴 저미게 떠올랐다.
아니나 다를까 그날 새벽에 연락이 왔다.
예상했던 일이었다.
담당의는 이제 더이상 어떤 치료나 조치를 하지 않을 것을 권했다.
대부분의 장기에 전이가 되어 있는 상태이고
그 중 간과 폐기능은 특별히 심각하다고 이야기 했다.
입원과 외래 진료 때 만나는 혈액종양내과 담당 교수님의 말 한마디에 우리는 천국과 지옥 수십차례 오고 갔기에 선생님의 담백한 선고가 이제는 밉지가 않았다.
그분의 기계적 최선이 사실 실질적인 최선이라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수많은 인터넷의 자료와 지인들의 직간접 경험에서 언급한 "이제 언제 돌아가셔도 이상하지 않을" 시간이 된 것이다. 나의 가장 큰 걱정 중 하나였던 뇌전이도 속도가 빨라졌다. 멀쩡한 청년들도 너무 아파서 비명을 지르는 감마나이프도 엄살 기운 하나 없이 받으셨던 아버지. 이제는 의식도 흐릿흐릿 해 져서 사리판단, 평형감각, 언어기능의 퇴화가 너무 두드려진 걸 알기에 너무 겁이 났다. 그래도 임종 전에라도 아버지가 나에게 해 주는 어떤 단어라도 듣고 싶을텐데 그것마저 허락되지 않으면?
사실 언제 돌아가셔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이건만 아버지는 회한 많은 삶에 미련이 많으셨던 탓인지 하루라도 더 살아내기 위해 말도 안되는 최선을 다하셨다. 새벽에 일어나서 휠체어를 굴려서 병원 복도를 백번씩 오가며 건강을 되찾는 중이라고도 하셨고 어지러워서 일어날 수 없으니 침상에서 상반신을 일으켰다 내렸다를 틈만 나면 반복했다.
소회기관에도 문제가 있었지만 곡기를 끊는건 죽음과도 같으셨는지 구역질로 밥 한끼를 다 게워내면 다시 한끼를 또 꾸역꾸역 문자 그대로 입안에 쑤셔넣으셨다.
자식들 뒷바라지를 넉넉히 하지 못했다는 근원적 죄책감 같은 것이 이제 지난 세월을 돌아보아야 할 마음의 여유마저도 없게 만든 것일까?
아버지는 호스피스 병원으로 옮겨서 두달 정도 더 치료를 받으면 퇴원 가능할거라는 말도 안되는 이야기를 반복하셨다. 좋은 공기에서 쉬면서 요양하면 걸어서 다닐 수도 있고, 완쾌 후 돈 생각, 돈 걱정 안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봉사하면서 살고싶다는 말을 반복하시는데, 그 말을 그냥 진짜인듯 믿고 싶어지면서도, 그 말이 우리를 안심시키려 하신 말이었기에 더 슬펐다. 수화기 너머로 통제 안되는 눈물이 터져나올 것 같으면 목소리로만 통화하는게 그래도 낫다는 생각을 잠깐 하고 만다. 아버지가 항암 부작용으로 괴로워 할 때 눈, 코, 입 모양에 우겨넣어진 죽음의 색깔을 계속 마주할 용기가 없었기 때문이다.
호스피스 병원도 마음대로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다. 담당의의 권유에 따라 바로 당일 준비되지 않은 입원을 하고 호스피스 병원으로 대기신청을 했다. 병상이 날때 까지 기다려야 했다. 운이 좋으면 하루지만 2주 넘게 기다리다가 전원도 하지 못하고 임종하는 경우도 있다. 다행히 한주만에 연락이 왔다. 그 말은 누군가 그 날 그곳에서 또 돌아가셔서 자리가 하나 비게 되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호스피스로 옮기기 전 필요한 조치와 시술들을 위해 응급실에서 암병동으로 올라갔고, 이후 남은건 2인실 밖에 없었다. 근데 그게 너무 비싸다며 아직 확보도 안된 5인실 가야한다고 엄마한테 소리지르며 우기시는 아버지에게 전화를 드렸다.
"아버지 저 돈 많아요"
"저 회사에서 엄청 잘 나가요"
"펑펑써도 될 만큼 많아요"
"엄마한테 용돈 더 많이 줄 테니 엄마랑 싸우지 말고 편하게 2인실 쓰세요"
쉰 목소리로 껄껄 웃으시고 좋다고 하셨다.
그 목소리는 작년 겨울에 아버지 자격증 반 친구들하고 마지막날 쫑파티때 고기 한턱 크게 쏘시라고 봉투에 두툼하게 넣어드렸던 그 날과 비슷했다. 그 밝은 쉰 목소리라도 들으니 찢어지는 마음이 조금은 편안해졌다. 아버지한테도 처음으로 이렇게 잘나게 키워주셔서 감사하는 말을 슬쩍 던지고 말았다. 아버지 그렇게 웃어주셔서 감사했어요.
하루하루 죽음을 향해 가는 그 순간순간이 아버지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그 마음에 한번 다가가보려 마음의 안테나를 살짝 뻗어보기만 해도 전혀 경험해 보지 못한 죽음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 자의식이 사라져간다는
생각하기도 무서운 그 그림자가 나를 한없는 무력감과 우울의 심연으로 목덜미 잡고 끌고 내려갈 것만 같아서, 눈 질끈 감고 피하고 만다.
코로나 때문에 병원 앰뷸런스는 집으로 들러서 마지막으로 강아지와 집안 물건을 한번 둘러볼 수 있는 기회도 주지 않았다. 아니 설령 그 기회가 있었어도 장애를 얻은 형과 지병으로 인해 기력이 이미 바닥난 엄마는 아버지를 들어서 다시 휠체어에 앉힐 수가 없었을 테니...
별 다른 선택이 없었다.
말기로 진입한 환자의 남은 삶이 그러하듯.
이제 정말 끝이구나. 아버지는 그렇게 생각하셨던 것 같다.
그러나 어떤 내색도 않으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