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경계인 Jan 23. 2023

결핍과 부족은 나의 추진력

당신이 준 추진력의 불완전함을 나는 완성으로

나의 성장환경이 특별하다는 건 아니다. 이 정도 서사와 역경 또는 불편함은 누구나 갖고 시작한다. 아버지의 임종 이후 사람들을 보는 시각이 달라지니 사실 이 정도는 평범한 수준일 수도 있겠다. 그렇다 해도 10대, 20대, 30대의 나에게 아버지가 아버지로서 좋았는지 물으면, 선뜻 그렇다고 대답하기는 어렵다.


98년 IMF 외환위기 때 아버지가 다니던 회사는 부도가 났고 아버지는 직장을 잃었다.

무리해서 구입한 아파트 한 채도 갚을 여력이 안돼서 은행빚에 본전도 못 받고 팔았고, 수년을 국민연금을 포함한 자산을 탈탈 털어내었고, 배관 쪽 일을 하셨기 때문에 구하는 일자리 모두 지방 공사 현장에서 흙먼지를 뒤집어쓰면서, 빚을 갚고, 또 실패하는 일을 반복하셨다.


경제적으로 항상 사방이 막혀있는 마음으로 살아왔기에 아버지는 다정하지도 않았고, 엄마에게는 더욱 그랬다.


틈만 나면 술을 마시고 들어오셨고, 어린 시절 단칸방 벽은 담배냄새로 찌들어 있었다. 화나는 일이 있으면 가구를 부수고 집기를 내던지셨다. 엄마한테는 위압적이고 권위적이었다.

 

그렇다고 내가 엄마 편을 딱히 들 수도 없었다.


대개 부모들이 그렇듯 엄마의 정서적 물질적 지원도 첫째인 형에게 조금 더 많이 가지 않았나 싶다. 주로 형의 옷을 물려 입게 하거나 누가 버린 옷을 주워오셨다. 내가 무언가가 필요한다고 했을 때 나에게 쉽게 주어지는 일도 드물었다. 기숙사 생활하는 형에게는 편지에 용돈에 부족하지 않게 해 주려 노력했는데 정작 나는 군대 면회 왔던 기억조차 없다. 형은 학생운동을 하다 구치소까지 갔는데 엄마가 검사에게 울며불며 사정사정해서 풀려나기도 했고 오토바이를 타다가 얼굴이 깨지는 사고도 있었고, 형은 손이 많이 가는 아들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그래서 형의 부모님에 대한 마음은 나보다 훨씬 더 애틋하고 깊다. 나는 그런 게 싫어서라도 안전 지향적이었고 경제적으로 정서적으로 전혀 위험요소가 아닌 나에 대해서는 고마워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닐까 스스로 반문했을 뿐이다. 엄마아빠는 나에게 무엇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줘야 하는지도 몰랐다, 알아도 경제적으로, 정서적으로 할 수가 없었으리라 짐작만 한다.  


다행인지 나는 그런 게 서운하지는 않았다. 용돈 한 번 준 적 없는 아버지가 원망스러운 적도 없었다. 내가 원래 독립적인 성격이었는지, 그랬기 때문에 독립적인 성격이었는지도 알 수 없다. 둘 다 일 수도 있다. 아니 사실 둘 다 아닌데 의미 없는 인과관계를 부여하고 싶어서 이러는지도 모르겠다. 그저 결과가 원인을 설명한다고 믿을 뿐이다.


그렇지만 열심히 했는데도 인생이 원하는 대로 풀리지 않은 아버지 같은 삶이 반복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있었다. 그런 운명론적 공포는 나를 불안하게도 했지만 나를 움직이게도 했다. 또 나를 움직이기도 했지만 나를 불안하게도 했다.  


그래도 돈이 없는 20대는 참 서러웠다. 아니, 난 좀 더 솔직히 말하면 최선을 다하면 그래도 잘 될 거라는 막연한 그리고 주변 사례로 검증된 말들 보다, 그렇지만 내가 가족에게 부담을 주지 않는 것이 최소한 내가 당분간은 우리 가족을 지킬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종래에는 공부를 잘하고 좋은 직장을 구해서 부자가 되면 우리 집을 일으킬 수 있을 거라는 막연한 그러나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은 소원이 있었다.


좋은 학점과 영어점수를 만들기 위해서 연애나 친구 사귀는 일 따위는 사치였다. 늘 과외와 알바를 했다.  공부도 잘하고 싶었지만 돈이 필요했다. 박정어학원 근로장학생을 신청하면 학원비를 내지 않아도 됐는데, 그 기회를 잘 써서 토플과 GRE 모두 방학기간 중에 좋은 점수를 만들어 미국유학도 시도했다.


"빚을 내서라도 해줘야지" 같은 말이라도 기대했건만, 엄마는 미국 가는 비행기 값을 낼 형편인지 모르겠다고

하는 그 말이 너무 서러웠다. 그러면서도 나중에 다시 국내로 진로를 돌린 후 과외로 얼마를 버는지가 궁금했던 엄마가, 박사과정 첫 학기에 첫 학회 논문을 투고했는데 그럼 내년에 교수되면 연봉 얼마 받는지 물어보는 엄마가 그렇게 미울 수 없었다.


그래, 부모는 내가 이 모든 상황을 역전시킬 수 있는 조커라고 생각하셨을지도 모르겠다. 지금은 이 모든 서운한 감정의 찌꺼기들이 사라졌지만, 결혼 과정에서 엄마가 보여줬던 일련의 실수는 우리 집이 넉넉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나의 부모는 정직하고 좋은 성품을 가진 분들이라는 기대마저 박살내서, 도독 후 2년 간 본가와 인연을 끊으려고 시도하기까지 했다.


부모가 나에게 준 결핍, 심지어는 분노와 좌절의 감정은 나를 나아가게 하는 폭발적 에너지기도 했지만 그 열기는 나의 마음에도 화상을 냈다. 친구들에게는 세상 털털하고, 선배들에게는 예의 바르고 괜찮은 청년이었지만 나의 속 마음은 꽤나 꼬여 있었고, 시니컬했고, 비관적이었다. 비꼬는 농담은 늘 나의 레퍼토리였다.


적절한 수입이 생겨도 나는 싸구려 물건을 사면서 통장에 돈 모으기에 집착했고 나의 마음은 늘 쉴 틈이 없었다. 이런 강박과 다른 요인들이 뒤섞여 우울증 판정까지 받았고 이걸 받아들이고 극복하는데도 많은 시간이 들어갔다.


지금의 내가 가진 부모라는 존재의 서사를 가슴으로 품고 홀리스틱하게 이해하는 데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내가 만든 연민의 항아리를 내 손으로 깨내기 위해서는 내 마음의 껍질을 아예 벗어내는 변태과정 뿐 아니라 스스로가 스스로에게 만족할 수 있는 자기 증명의 오랜 과정도 필요했으니 말이다.  


나의 가정을 만들고 그런 부정적인 쓴 뿌리 넝쿨을 나 스스로 끊어낼 수 있는 시기가 찾아왔다. 그때 부모님과 사실 처음으로 소주 한잔 하면서 이야기했다.


"부모님이 들어보지도 경험해보지도 못한 인생을, 저희는 살고 있으니 걱정 마세요"


처음 여권을 만들어서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인 유럽 여행을 온 첫날밤 그때 아버지가 그 말의 참 의미를 아셨는지는 모르겠다.


나는 그렇지만 선언적으로 말해야 했다.


돌아보니 내가 스무 살부터 부모에게서 일찍 정서적으로 독립했다는 건 사실 틀린 말이었다. 마흔이 넘어서야 그걸 받아들이고 그제야 한 단계 성숙한 인간이 되었으니, 그다음은 나의 마음 과제는 부모를 이해하고 용서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런 연착륙에 대한 기대는 내 삶도 더 건강하게 움직일 수 있는 용기를 떠올리게 했다.


그러나 시간은 야속했다.


투병 시작, 희망절망의 쌍곡선을 오가다가 죽음을 받아들이면서 지난 세월의 삭은 상처와 미안함을 하나씩 떨어내는 시간 같은 게 있을 줄 알았건만 그런 건 드라마에서가 가능하다. 회한 많은 자신의 삶의 흔적에 더해 병시중과 경제적, 정신적 고통으로 자식에게 부담 주는 것을 무엇보다 싫어하셨던 아버지는 끝까지 자기가 죽지 않을 것이라 믿는 사람처럼 행동했고, 나 또한 그렇게라도 씩씩한 아버지를 낙담시킬 이유가 없었다.


몇 시간 동안 또렷한 의식을 갖고 계셨던 마지막 날 이 말을 못 한 것이 사실 가장 후회가 된다.


"절 이렇게 강하고 섬세한 사람으로 태어나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모두 아버지에게서 온 것들이에요. 결핍과 부족함이 오히려 지금의 딴딴한 저를 있게 했어요. 이제 돈 걱정, 엄마 걱정, 형 걱정 하지 말고 편안히 쉬세요"


14시간의 비행, 공항에서 총알처럼 2시간을 달려 날아온 나를 알아보고 침대에서 팔다리를 위아래로 버둥거리고 좋아하신 그때 맺혔다가 흘러내리기를 반복한 눈물자국이 말했다.


"미안하다. 잘 자라줘서 참 고맙다. 내 아들 참 자랑스럽다"


호스 꽂은 코에 가래 낀 목소리로 힘껏 숨을 밀어내면서 하셨던 말이었다고 나는 믿고 있다. 그 말을 내 얼굴을 보고 하고 싶으셔서 나 올 때까지 꼬박 이틀을 더 버티셨던 거다.


해외에서 많은 자식들이 부모의 임종을, 그 길을 동행하지 못한다. 나는 그런 면에서 감사해야 할 사람이다. 그걸 볼 수 있어서 회한 많은 아버지의 삶을, 내 마음에 침전되어 있던 흙먼지 같은 불순물들을 한 번에 정리할 수 있었다. 찬란하고 밝은 빛이 나오는 문으로 들어가려 뒤돌아선 뒷모습에서 묵묵하고 씩씩한 고결한 영혼을 나는 보았다. 어쩌면 아버지를 가장 닮은 아들이라서 세상에서 오직 나만이 이해하고 떠올릴 수 있는 장면이라고 스스로에게 귀띔해 주었다.


(계속)

매거진의 이전글 호스피스에서 한 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