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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경계인 Jan 25. 2023

속마음

각자의 이유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왜 이걸 쓰고 있을까?


아버지를 추억할 만한 물건들, 사진들이 나에게는 많이 남아 있지 않다. 아버지는 나에게 무엇을 남기셨나? 쉽게 떠올려지는 것이 없다. 토막토막 한 두 마디 하셨던 이야기들, 그가 내렸던 결정, 그리고 투병 과정에서 경험한 동행의 편린들로 간신히 마음속에서 어떤 형태를 만들고 있다. 기억될 수 있는 존재로서의 그를 품고 사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그리고 나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한 달 전까지도 엄마는 그러셨다.


"너네 아버지는 도저히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 살날이 얼마 안 남은 건데 최소한 나한테는 속마음이라도 말을 해야 하는데 도통 말을 안 하니까 속이 터지겠다"


아버지는 용인 샘물호스피스에 들어가서도 늘 하는 말이,


"간하고 폐에 퍼진 암은 다 나은 것 같구나! 뇌 전이가 문제 이긴 한데 두 달 정도 신선한 공기 마시고 틈틈이 운동하면 아버지 다 건강해져서 나간다"


완화의료를 제안한 분명히 의사는 말했을 것이다. 뇌전이 속도가 갑자기 빨라졌고, 폐는 당분간 기능을 하겠지만 패혈성 쇼크가 걱정이 되며, 뼈전이도 전신에 시작되어 통증이 꽤 있을 거라고. 요약하면 몇 주 안에 죽는다고.


그런데도 아버지는 본인이 곧 나을 거라는 말을 반복했다. 단순히 그렇게 생각한 것이 아닌 것이, 시신경 전이 때문에 사물 인식이 어려운데도 핸드폰이 고장 난 것 같다고 하셨다. 며칠 뒤에 들어갈 때 최신형 갤럭시 사서 들어간다고 말씀드리니 정말 좋아하셨다. 연명치료거부서약서 작성, 케모포트 시술 등을 마치고 용인 샘물호스피스 병상이 나기를 기다리는 며칠 동안 친척들은 사실상 마지막 자유 면회를 할 수 있었다. 이 때도 가서 요양하다 보면 금방 나을 거라며 엉엉 우는 환갑 넘은 동생들을 안심시키려 했다. (3기라면 모를까 말도 안 되는 소리라서 작은 아버지들은 더 슬펐을 것이다)


아버지의 핸드폰은 아버지의 마지막 한 달이 어땠는지 되짚을 수 있는 좋은 도구였다.


교회 사람들, 이전 직장 동료와 후배들에게는 지금 요양 중이고, 회복되는 대로 다시 연락할 테니 당분간 연락하지 말라고 문자를 일일이 보내셨다. 당신의 인생 마지막 프로젝트였던 방송통신고등학교에도 정중하게 문자를 보냈다. 지금은 항암으로 학업이 어려우니 한 학기 회복 후 다시 만나겠다고. 아내와 내가 보이스톡으로 전화하면 가끔 받지 않기도 하셨다. 시력을 거의 상실한 상태라 스와이프 해서 전화를 받는 게 사실상 불가능했고, 그 도움조차 옆에서 대기 중인 자원봉사자들에게 부탁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남한테 불편 끼치기를 그렇게 싫어하셨으니 자원봉사자가 소리를 듣고 보이스톡 받기를 하지 않으면 통화가 불가능했다는 걸 나중에야 알았다.


온 신경이 환자에게 집중되어 있다 보니 던지는 한마디에 온 집안이 천국과 지옥을 오간다.


생각해 보니 아버지는 단 한 번도, 단 한 번도 자신의 죽음과 이후의 일에 대해서 말한 적이 없다. 심지어 항암 치료 부작용이 너무 괴롭다는 말도 안 했다. 환우 카페나 주변 사람들을 이야기와 너무 달랐건만... 아마 투병 기간 중에 단 한 번이라도 "내가 만약 죽으면..."으로 시작하는 말을 했다면 나의 마음은 또 속절없이 무너짐을 반복했을 것이다.


뇌전이로 인한 평형감각과 시력 상실 그리고 기립성 저혈압이 본격적으로 문제가 되는 시점에도 섬망 증상까지 겹쳐 새벽 네시에 본인이 직접 병원까지 운전해서 가겠다고 비틀거리며 문 밖을 나서곤 했다. 새벽 세시까지 일하다가 다시 여섯 시 반에 나가야 하는 상황이 늘 미안하셨던 것 같다.


이때 엄마와 형, 그리고 나의 숙제는 아버지가 발처럼 사용하시던 스파크를 타지 못하게 막는 일이었다. 정말 잠깐 괜찮다가 운전하고 사고가 나는 게 걱정이 되었고, 실제로 몇 번 그러시려는 걸 막기도 했다. 다만 아버지가 다시는 운전대를 잡지 못하게 되는 게, 죽음으로 가는 길의 서막이라는 걸 알려드리기가 싫었고, 그걸로 충격을 받으실까도 염려가 되었다.


근데 또 내가 총대 메는걸 잘한다.


말씀드렸다. 스파크 팔 거고, 운전하셔도 되지만 혹시라도 암 환자가 운전하다 사고가 나면, 보험사에서 이것저것 따지고 들 텐데 그러다가 또 경제적으로 우리가 이거 부담하게 되면 힘들지 않겠냐고 (사실 그런 건 없다).

근데 이 말이 아버지에게 먹혀들어갔다. 이 순간에도 자식에게 부담 주는 건 죽어도 싫었을 테니... 나의 중고차 판매 시도를 순순히 받아들이셨다.


아버지는 내가 있어서 좋으셨던 것 같다. 나와 함께 의사를 만나고, 목사님을 만나고, 요양 시설 직원분들을 만나면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쉰 목소리를 가다듬으셨다. 근데 그만큼 자식이 당신 때문에 고생하는 게 늘 미안했을 것이다.


이별의 시간이 되었다.


엄마는 그제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기능이 거의 정지된 폐에서 나오는 쉭쉭거리는 소리로 사랑한다는 말을 들으셨고, 큰 사고 이후 힘든 재활을 거쳐 겨우 살아난 형에게는 고맙습니다.라는 짧은 말로 우리를 안심시키려 하고, 또 우리를 울게 만들었다. 나에게도 뭔가 말해줄 것이 있으면 하라는 엄마의 말을 얼버무리고, 아버지 오늘 저녁부터 제가 옆에 있을 테니 저랑 좀 이따 또 얘기해요,라고 말하고 손을 꼭 잡는 걸로 대신했다. 나한테 해 줄 말까지 다 해버리면 그 시점으로 정말 끝이 될 것 같았으니까.


아버지는 정말 자신이 죽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을까?

그렇지 않았다.


아버지 유품 중에는 입관 때 사용하라고 쓸 적당한 수의와 종이 재질의 천이 상자에 고이 담겨있었다. 쓸데없이 비싼 거 싫어하셨으니 어련히 잘 고르셨을까. 모든 장례 절차에서 비용이 많이 들까 봐 당신의 인생 마지막 성과였던 장례지도사 자격증 취득 과정에서 알게 된 조합과 목사님에게 뒷일을 세세하게 당부해 놓으셨다. 일기장에 수도 없이 적힌 그놈의 상용어구 "용돈하나 쥐어주지 못하는 못난 아비"를 또 관 속에 들어가셔도 반복하게 계셨을 테니. 이제는 제발 그런 소리 안 해도 되었건만 아버지는 늘 그걸 원죄처럼 생각하셨던 것 같다. 그게 무슨 죄라고, 그냥 하루만이라도 뻔뻔한 흉내라도 내면 마음이라도 편할 텐데.

<하늘로 보낸 마지막 카톡>

아버지의 속마음을 들을 기회는 없었다. 그게 당신이 생각한 남겨진 가족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최선 중에 최선이었을 뿐.


그래도 아버지가 한 번이라도 아프다고, 속상하다고, 힘들다고 말씀이라도 해주셨으면 덜 힘들지 않으셨을까, 삐뚤빼뚤 글씨라도 쓰기 위해서라도 펜을 잡지 못하게 된 임종 전 4일 부터는 얼마나 더 외로우셨을까도 생각해 본다. 아마 아셨겠지? 이제 정말 모든 것과 작별이라는 걸. 


나라면 그 고통과 괴로움 외로움을 견딜 수 있을까? 상상만 해도 숨이 턱 막힌다.


그래서 나는 아버지의 영원한 안식을 더 빌었다. 정말 아프지 않은 곳에서, 눈물과 수고가 없는 곳에서 쉬실 수 있게 해달라고 절대자에게 기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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