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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경계인 Jan 26. 2023

항암 치료

기적을 바라는 마음

암센터 안에 있는 항암주사 대기실에 앉아 있다 보면 암 발병 통계와 대충 비슷한 분포의 연령대를 본다. 당연히 70대가 제일 많지만 90대 할머니도 있고 열 살짜리 꼬마도 있다. 무채색의 공간에서 호명을 기다린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암과 싸우고 있다니, 용기를 내고 참고 견디고 있다는 것을 본다. 너만 힘든 거 아니야, 엄살 부리지 마, 딱 그 생각에 머물기 위해 의식적으로 노력한다.


운이 좋으면 한 시간 정도 대기하지만 다섯 시간을 꼬박 기다린 후 주사실로 들어가도 한다.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외래진료와 항암을 하는 날은 어떤 꾀를 낸다 해도 여덟 시간은 그냥 병원에서 보내게 된다. 나는 나중에 귀국해서 살면 아파트 청약이니 어쩌고 하는 거 다 필요 없고, 무조건 서울대 병원 앞에 오피스텔 구해서 살 거라고 수십 번도 넘게 생각하기도 했다.  


방사선 치료와 병행한 1차 항암제 투여는 아버지에게도 꽤나 큰 충격이었다. 항암제가 들어가자마자 쇼크반응(호흡곤란, 심정지, 항문개방)이 와서 긴급하게 응급처치를 했다. 강심장이던 아버지도 그 순간에 이렇게 죽는구나 싶어서 엄마가 간절히 생각났다고 했다. 그 다음번부터 침상에 누워 투약을 시작할 때 불안해하는 마음을 감추려 많이 노력하셨지만 일시적인 초능력을 갖게 된 나는 아버지의 아주 작은 표정 변화와 떨림, 말투를 보면서 그 불안함을 읽을 수 있었다.


항암주사실에 누워있으면 또 이런저런 사람들을 본다.


이런저런 불편함으로 간호사 선생님을 귀찮게 하는 분도 계셨고, 옆 침상에서 한두 마디 주고받고 꼭 이겨내시라고 인사를 주고받는 일도 있었다. 그리 멀지 않은 시기에 그중 일부는 그 자리에서 따뜻한 인사를 주고받게 해 준 "그 이유"로 세상을 떠나게 될 걸 생각하면 그 공간은 이생과 죽음 이후의 세계의 중간 지점처럼 느껴졌다. 물론 간호사 선생님들의 기계적인 친절함은 효율을 더해서 그런 생각을 오래가지 않게 만들어 주기도 한다.


양복 입고 와서 아무렇지 않게 한두 시간 누워서 주사 맞으면서 한 손으로 스마트폰 게임 하고 다시 출근하는 아저씨도 있었고,  맥박을 따라 주사약이 들어가는 감각마저 느껴져 초단위로 신음을 반복하는 할머니도 계셨다. 부작용으로 머리카락이 다 빠지고 앙상한 몸으로 겨우 누워 있는 여고생도 있었다. 나와 비슷한 나이로 보이는 따님과 엄마 환자가 있었는데 침상에서 일어나기 힘들어하시길래, 얼른 가서 몸을 일으켜 드리고 다시 또 눕혀드렸다. 엄마환자는 꽤 좋아하셨다 역시 아들이라서 힘이 좋다고. 이게 뭐라고 나는 또 뿌듯했다.


이런 경우를 제외하고는 아들이 딸보다 쓸모가 있나 싶다는 생각도 했다. 실제로 암센터와 암병동에서 배우자가 보호자로 온 경우를 빼면 옆에는 딸이나 며느리가 제일 많다. 대부분의 경우 아들놈들은 돈 버느라 그 자리에 없겠지만, 어떻게 의사를 만나서 이야기를 하고 또 한참을 기다려서 박스 한가득 약을 처방받아서 가야 하는지 등등의 번거로운 루틴, 또 간호사 선생님이 어떻게 정맥을 찾아서 주사 바늘을 넣고, 링거가 어떻게 연결되고, 어디가 어떻게 아픈지 등등의 눈으로 보고 다른 감각으로 경험하지 않으면 그게 어떤 일인지 ”잘 모른다 “


* 여담이지만 가족 중에 환자가 생겼을 때 정말 그게 구체적으로 뭔지 잘 모르면 주 보호자한테 쓸데없는 소리를 하면 안 된다. 집에서 가까운 병원도 많은데 왜 거기로 했냐, 다른 병원 의사에게 세컨드 오피니언도 받아봤냐, 주변에 잘 아는 의사 친구가 있다더라, 무슨 (사짜) 테라피나 영양제가 좋다더라... 절대 해선 안된다. 어떻게 도울지 모르겠으면 그냥 현금을 주면 된다. (선을 많이 넘게 되면 나중에 장례식장에서 싸움거리가 될 확률이 높다)


아버지는 다양한 면역 항암, 표적 항암제를 써보다 4기 소세포 폐암 환자의 사실상 최종 선택지인 일반 항암제 파클리탁셀까지 총 23차 항암까지 받으셨다.


침상에 누워서 주사를 맞으시는 동안 나는 옆 쪽 의자에서 노트북 켜서 이메일 작성이나 간단한 코드리뷰 같은 걸 했다. 한두 시간, 길게는 세 시간에 걸쳐서 투약이 이뤄지는데 돌아보면 나는 그 시간이 참 좋았다. 아버지 옆에 내가 살면서 이렇게 길게 옆에 있어드린 적이 있었을까, 지금 느끼는 몽글몽글한 마음이 영원할 수 있도록 이번에 들어가는 약 한 방울 한 방울이 기적처럼 폐에 붙어있는 작은 암 알갱이들을 사르르 녹여줬으면 하는 만화 같은 상상을 매번 했다.


<생각해 보니 아버지랑 둘이서 셀카를 찍은 적도 없다. 부끄럽다>

아버지 특유의 그 쉰 목소리, 괜찮다고 말하는 그 톤, 맨날 입는 그 패딩 옷. 이런 것들이 지금도 떠올려지는 모습이지만, 불안함을 내색하지 않고 자식한테 건강한 모습으로 떳떳한 아버지가 되려는 그 애처로운 뒷모습은 사실 더 슬펐다. 조금만 이상 징후가 있어도 곧 죽을 것처럼 겁이 나서 그 불안함을 바깥으로 표출하고 외부 세계를 통해 위로와 안정을 받고 싶어 하는 엄마와 많이 달랐다.


건강하셨을 때, 아니 불과 석 달 전까지도 겨울에도 냉수마찰을 하시던 아버지는 5월 인데도 패딩을 입으셨다. 전날 섬망 증상으로 새벽 두 시부터 병원 가야 한다고 실랑이를 한 그날은 항암제가 들어가고 수면 부족으로 피곤하셨는지 좀 춥다고 하셨다. 손을 잡아드렸다. 공사현장에서 다치고 부러지기를 반복해서 군데군데 보이는 흉터, 그리고 저혈압으로 어지러워서 자주 넘어지신 까닭에 생긴 멍도 더 크게 보였다. 아버지가 그날은 유난히 안쓰러웠다. 그러다가도 운전석 옆자리에서 집으로 가는 길에 짜장면 먹고 가자고 하셔서 괜히 신났다.


당시 내 인터넷 검색기록, 유튜브 추천은 몽땅 폐암에 대한 것인데, 자료원마다 다르긴 하지만 5년 뒤 생존율 통계는 비극적이고 처참하게 읽혔다.


"... 다른 장기로 전이된 3~4기 폐암은 '시한부'선고나 다름없다. 실제로 4기 폐암의 5년 생존율은 4% 수준이다"


나는 그래도, 기적을 바랐다. 당연하다. 다른 쪽으로 생각이 흘러가지 않게 의식적으로 노력했다. 엄마를 포함한 다른 가족에게는 담백하고 간명하게 씩씩했다. 마음이 강하지 못한 엄마와 이러한 불안감을 늘 안고 있었던 형도 든든하게 지켜주고 싶었으니까. 그리고는 밤에 아파트 놀이터로 가서는 몰래 울고 들어왔다. 나도 참 궁상맞았다. 근데 어떡해. 이게 나인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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