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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경계인 Jan 27. 2023

그의 과거

그리고 나의 미래

평범한 내게 자랑할 만한 게 하나 있다면 그건 바로 바로 기억력이다. 고시공부를 했다면 괜찮았을까 생각하지만, 그걸 빼면 살면서 요긴하게 쓸 일이 없다. 재미있게 써먹을 일이 있다면 옛날 일을 잘 기억한다는 거다. 그래서 아버지가 지금까지 한번도 나를 손대신 적이 없다는 것도 잘 기억한다. 


어릴 때는 그저 무뚝뚝하고 무섭기만 한 아버지였으니 꾸중하실 때 손찌검을 하셨겠다 생각할 수 있지만 나에게 한 번도 물리적인 폭력을 행사하신 적이 없다. 빗자루로 손바닥을 맞는 그 당시 시각에서 순한맛 훈육조차 없었다. 여섯살 때 방을 빗자루로 엄마가 열심히 쓸고 있는데 비키지 않고 꾸물거리다가 플라스틱 방 빗자루로 맞을 뻔 한적이 있었던 기억 하나 정도 있을 뿐이다. 내가 집에서나 밖에서나 말을 잘 듣는 모범생이기도 했다는 점도 있겠지만(엣헴!) 아버지의 나고 자란 환경을 생각하면 당신에게는 무척 특별한 부분이다. 언어적으로도? 잘 기억이 안 난다. 


6남매 중 첫째였던 아버지는 충북 깡촌 중 깡촌에서 태어나셨다.


지금도 그 지역은 깡촌이다. 그 당시 사람들이 다 그렇게 살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근근히 농사로 먹고 살던 할아버지는 새벽마다 산에 가서 나무 땔감 지게 세 번을 가득 채워서 오게 시켰다. 하루 할당량을 채우지 못하면 아버지를 몽둥이로 때리고 학교도 가지 못하게 했다. 매질이 무서워 집을 나갔다가 잡혀오기도 하고 꾸역꾸역 할당량을 채운 날은 4km 가 넘는 학교를 산을 넘어 다녀왔다고도 하셨다. 학교 가는 길은 눈이 오면 걸어갈 수도 없고, 녹을라 치면 진흙밭이 되어 또 걸어갈 수 없었을 것이다. 가로등 같은건 기대할 수도 없을테니 어둑어둑 해지면 다녀올 엄두도 안났으리라.


나는 그 아버지의 고향이라는 곳에 다섯 번 남짓 가 본 것 같다. 2000년대까지 그 길은 포장이 되어 있지 않아 버스도 다니지 않았고, 어딘가에 내려서 한 시간 가까이 어둑어둑한 길을 간신히 걸어갔던 기억만 간신히 있다. 어린시절 어렴풋한 기억에 교과서에서만 보던 초가지붕, 흙벽, 마당 옆 소 우리, 나무 안쪽을 파내 만든 여물통, 볏짚으로 방 안에 주렁주렁 걸어 말린 된장 덩어리, 뜨거운 곳은 무지하게 뜨거웠던 아궁이 온돌방, 한마디도 알아들을수 없는 작은 할아버지의 말, 나를 무릎에 앉히셨을 때 코를 찌르던 냄새 등등이 떠올랐다. 물론 시골집 방문의 백미는 화장실이다. 말로만 듣던 새끼줄과 신문지의 다른 용도(?)를 경험했다.


아버지 사망신고를 하다가 알게 된 건 할아버지는 주민등록번호도 없다는 점이었는데, 그 만큼 일찍 돌아가셨다는 뜻이다. 이후 할아버지가 없는 아버지는 사실상 가장 역할을 하셨던 것 같다. 시골 논을 팔아서 서울 언저리로 할머니와 형제자매들을 데리고 엑소더스를 감행하셨다.


엄마는 매년마다 하는 가정환경 조사에서 아버지를 고졸로 적으라고 하셨지만 공식적으로 아버지는 국졸이라는 걸 고등학교에 가서야 알았다. 평소의 아버지는 글씨도 잘 쓰고, 서류 작업, 설계도 제작, 회계 부기 등등을 꽤나 꼼꼼하게 하시는 "멋진 회사원" 이었기 때문에 그게 내겐 중요치 않았다. 그러나 서울로 아무 연고나 배경 없이 무작정 서울로 올라온 그는 서류상 사실상 무학자인지라 공사장을 다니며 손기술을 익혔고, 배관쪽 일에 실력을 쌓아가면서 가족들을 부양했다. 막내 작은 아버지와의 나이차가 거의 스무살이 넘으니 이들을 공부시키고, 시집 장가 보내고, 목사 만들고, 고등학교 까지 졸업시켰다는 건 아버지 본인, 그리고 이 집에 아무것도 모르고 시집 온 엄마가 짊어져온 책임감과 그 결과물이라 추측만 하고 있다.


초 고도 성장을 경험 중인 한국 사회는 다이나믹 그 자체다. 개인끼리 돈 빌려주고 갚고, 도망가고, 빚 보증서다 집안 말아먹는 일이 드라마에서 가끔 보는 일이겠지만, 괜히 드라마 소재가 된게 아니다. 그만큼 흔했다. 남 적당히 속여먹거나 눈치 빠르게 장사 하셨으면 모를까, 시키는 일 묵묵하게 성실하게 하는 것최고의 가치로 삼으셨던 아버지는 아쉽게도 남 힘든거 눈 딱 감고 지나칠 줄  아는 독한 성정의 소유자는 되지 못했던 것 같다. 무엇이 중요한지 우선 순위를 세우지 못했을까? 누가 힘들다고 하면 주머니에 있는 돈 뭉치를 주기도 했고, 월급의 소재를 묻는 엄마한테는 꿀먹은 벙어리처럼 행동하다 자꾸 캐묻는 엄마에게 버럭 소리를 지르곤 했다. 야생의 한국사회에서 그런 바보같은 아버지는 딱 적당히 해먹기 좋은 타겟이었을 수도 있겠다.


나는 아버지 간병하던 시기에 그렇게 아버지의 날 것의 선한 마음을 등쳐먹고 상처를 준 인간들의 이름과 전화번호나 주소를 아버지께 묻고 싶었다. 내용 증명을 보내든, 집 앞에 가서 쌍욕을해서 천원이라도 받아내야 나라도 속이 시원할 것 같아서. 엄마와 형은 말렸다. 몇 달 살지도 못할 아버지의 마음에 상처까지 얹어놓을 수는 없었을 테니까. 나는 더 분노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그들은 도의적, 명목상의 책임에서도 벗어날텐데 그들을 벌주고 싶었다. 그러나 지금 우리 가족의 1순위는 아버지였다. 나의 사이다같은 복수활극 같은 건 아버지와 나의 서사에서 크게 중요하지 않게 되어버렸다. 분하지만 그랬다.  


그와 동시에 우리 가족, 할머니, 다른 형제들에 대한 무한의 책임감을 떠안으셨던 것 같다. 자식들한테는 그놈의 "용돈하나 못주는 못난 아비" 면서도 조카들한테, 동생들한테는 용돈이든 생활비든 조금씩 쥐어주고 오곤 했다. 물론 엄마는 속이 터졌다.


그런 아버지에게 내가 딱 한번 크게 혼난 일이 있었다.


대학교 시절 형에게 큰 교통사고가 났고, 집 근처 병원에 오래 입원한 적이 있었다.  당시 방학때 영어공부 한다고 새벽같이 나가서 늦게 들어오는 나는 형 병문안조차 가지 않았다. 지금도 나는 왜 내가 그렇게 가족에 대한 애착이나 도리에 대해서 생각을 못하고 살았는지 이해를 못하고 있다. 어쩌면 가족을 통해서 따뜻함이나 안정감 같은걸 기대했는데 나의 불안한 미래를 먼저 해결하는 것이 최 우선순위였고 나머지는 아예 생각할 여유나 정신이 없었으리라 짐작만 한다. 어쨋거나 나는 그날 아버지께 호되게 꾸중을 들었다. 그래, 지금 생각해도 혼날 만 했다. 형 미안해.


스물셋의 나는 나름의 억울한 감정이 복받쳐 집을 나갔다. 근데 고기도 먹어본 놈이 먹고 도둑질도 해 본 놈이 한다고, 나는 갈데를 딱히 찾지 못해 몇 시간 뒤 늦은 밤 집에 들어 왔다. 그런데 웬 걸, 아버지는 그래놓고도 내가 집을 나갔을 까봐 온 동네를 돌아다니며 찾다가 새벽에야 들어오셨다. 이럴 줄 알았으면 가출이라는 것도 좀 더 일찍 해봤어야 했나. 의외였다. 무뚝뚝한 아버지에게 이런 면이?


돌아보면 아버지가 좋아한 순간은 그런 거였다. 명절때 친척들이 우르르 몰려와 거실과 방에서 이불 여러개 깔아놓고 자고, 윷놀이 하고 고스톱 치고, 아침에 남은 음식들 큰 다라이에 때려넣어 비벼먹고 배 두드리고... 고향을 떠나 온 가족이 서울구석 어딘가의 판잣집에서 서로를 의지하며 온기를 겨우 나누어 버텨온 순간들을  소중했다고 여기셨던 것 같다. 그 마음이 세대로 전해져 나와 형의 관계도 그랬으면 했는데 나는 "누굴" 닮아서 무뚝뚝하고 지 살길만 생각하고 큰일이 났는데도 콧방귀 하나 안뀌고 무심하니 화가 나셨으리라.


아버지 바로 손 아래인, 칠순을 넘긴 고모가 회상하는 아버지는 좀 더 거칠다. 그 당시 시골에서 술먹고 화가 나면 물건도 때려부수고, 동네에서 지나가는 애들 붙잡고 죽도록 두들겨 패다가 경찰서도 가고, 앞뒤 상황은 모르지만 눈 뒤집히면 도끼까지 휘두르는, 마을에서 건드리면 안되는 "제일 무서운 애" 였는데 건달처럼 살다가 너네 둘 낳고 사람됐다고 이야기 하셨다.


나의 기억력은 어린 시절까지 뻗쳐 있다. 세살 때 쯤 고수동굴, 국민학교(!?) 3학년 때 놀러간 한탄강 유원지, 네 식구가 겨우 눕지만 다리가 가장 긴 아빠는 다리를 뻗을 수 없었던 연탄 보일러 단칸방에서 받은 크리스마스 장난감 로보트 선물 같은거 모조리 알고 있는 걸 생각하면 내게는 확실히 효과가 오래가는 선물들이었다. 무뚝뚝하지만 당신의 최선은 그런 것들이었구나 싶다.

<아버지의 사랑이 너무 애달파서 나는 작은아버지와 고모들이 이 절절한 마음을 고스란히 알아주었으면 했다>

아버지는 할아버지를 어떻게 생각하셨을까? 아버지를 못살게 굴고 두드려 패기만 했다는 것 외에는 나는 알지 못한다. 전혀 알 길이 없다. 할아버지 제사 대신 추도예배를 매년 드렸고, 매 년 한두 번씩 그 깡촌 시골 산소에 벌초하러 가셨지만 나보고 가자거나 가야 한다는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나는 그정도 아버지였다면 용서하지 못했을 텐데... 자신의 근원에 대해 본인이 해야 할 당연한 의무라고 생각하셨을까? 이제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아셨을 때 할아버지를 만나러 간다고 생각하셨을지 나는 알 길이 없다.


아, 환갑을 겨우 넘기고 돌아가신 외할머니의 강원도 철원 산등성이에 있는 산소에도 아버지는 빼놓지 않고 가셨고, 엄마가 아프면 혼자라도 산에 올라 풀을 다 정리하고 오셨다. 엄마한테는 그게 아버지가 해 주는 든든하고 큼직한 다정함이었다. 혼자서는 그 산소에 더 이상 갈 수 없게 된 엄마도 아버지의 병세가 악화되어 사실상 끝으로 달려가고 있음을 아셨을 때, 더 이상 외할머니 산소의 물리적 존재가 더 이상 불가능의 영역임을 알게 되셨을까, 시골에 계신 친척들게 얼마 돈을 보내서 그마저도 정리했다. 그 날 밤 엄마도 방에서 혼자 오래 울었던 것 같다.


어린 나는 아버지 처럼 살기 싫었다고 나는 종종 말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자식에게도 존경받지 못하는 아버지였기 때문이었다. 근데 그게 나다. 아버지를 잘 몰랐으니까.


알고 보면 당신도 자신의 대에서 끊어내고 싶었던 것들이 많으셨겠지, 지금의 시선으로만 그 출발선을 재단하지 않는다면 당신도 최선을 다했다는 걸 이제서야 느낀다. 그 마음이 나에게로 이어져 더 괜찮은 삶으로 마무리 하고 싶다는 사명같은 숙제가 남겨져 있다.


아버지가 한번은 살아계실 때 그런 이야기들을 직접 당신의 입으로 들려 주셨으면 어땠을까 생각만 한다. 물론 당신의 입으로는 죽어도 못하셨을 거다.


아버지를 존경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서야. 이제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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