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딜 수 있어서 감사했던 날
암 병동과 요양 시설, 응급실, 중환자실을 들락거려 보니 그냥 죽음에 이르는 많은 병들은 예측 가능해서 관리할 수 있다기보다, 확률을 가장한 무작위에 가깝다고 믿게 되었다. 그중에 암은 천천히 삶을 정리할 시간이라도 주니 뇌졸중 같은 것보다 낫다고 말하는 분도 있다. 어느 정도 동의한다. 건강관리로 통칭되는 모든 행위가 당연히 유의미 하지만 그것이 반드시 기대수명을 꽉 채운 건강한 무병장수를 보장하지는 않는다. 정해진 운명의 시간을 받아들이는 한 인간의 모습만이 결국 남을 뿐이다.
천형 같은 불행 확률의 사건이 나의 일이 되었을 때, 나의 우주와 나로 이어진 모든 연결이 이제 소멸한다는 사실을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과정이 4기 이후 암 투병의 본질이다. 그러나 변수가 다양하고, 드물지만 한 자릿수의 기적이라는 것도 있어서 포기가 잘 되지 않는다. 이런저런 약을 바꾸어 가며 투약하고, 고통스러운 부작용을 감내하다가 형 집행을 기다리는 죄수처럼 의사의 진단을 기다리는 일을 반복한다. 그걸 지켜보는 가족에게도 너무나 잔인한 시간들이다. 의사에게 이제 그만하겠다는 결정을 할 수는 있지만 스스로의 목숨을 자기가 놓는 일을 스스로가 하는 경우는 흔치 않다.
불과 5년 전에 아주 똑같은 암으로 가족을 하늘로 보낸 적이 있는 지인은 4기 선고 소식으로 정신이 반쯤 나가 있는 나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의사가 하는 말이 사실 거의 맞아..."
실제로 그랬다. 의사가 이야기 한 기대여명보다 그래도 한 달 더 사셨으니 다행이다 싶기도 했다. 그 말은 참 잔인했다. 증세가 악화될 때마다 그 말이 떠올랐고, 생각의 꼬리는 이미 장례식장을 포함한 <결국 해야 할 일> 로 달려가고 있는 내가 미웠다.
냉정히 돌아보면 내가 아버지의 생명 연장에 기여하고 이있는지 자문헀지만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없었다. 여기에 2019년부터 우리 가족에서 순차적으로 잔인하게 닥쳐온 일련의 불행의 순간에 한국을 떠나 있다는 이유로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했다는 깊은 죄책감과 더해져서 마음이 계속 쓰라렸다.
아버지 밀착 간병을 하면서 초반에 간과했던 점은, 엄마도 아버지도 내 눈치를 엄청나게 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아버지 입장에서는 일 다 제쳐놓고 아내도 두고 혼자 날아와서 서너 달씩 있는다는 게 큰 부담이셨을 테고 엄마는 가사는 결혼 전에는 손하나 까닥 안 하던 게 십 년 만에 한국 와서는 부엌살림과 냉장고 보면서 한숨 쉬고 나오는 나의 폭풍 잔소리가 꽤나 듣기 싫었을 것이다. 특히 냉동실에 선캄브리아기 암모나이트처럼 봉지에 돌돌 말려 보관된 정체 모를 음식들을 내가 꺼내서 정리하거나 버리면 그걸 보던 다른 남자 두 명이 잔소리로 거들어 대니 정말 싫었을 거다.
유난히 더웠던 2022년 여름은 나의 몸과 정신이 헤어질 대로 헤어지는 힘든 시간이었다.
의사 선생님은 그동안 해 오던 표적, 면역항암 모두 성과가 없다고 결론지었다. 즉 애꿎은 정상 세포들만 실컷 파괴되고 몸이 축났다는 뜻이다. 의사 선생님은 일반항암으로 전략을 바꾸되 필요하면 고식적 요법을 섞어서 해 볼 것을 고민했는데, 아버지는 식사를 초인적 의지로 계속해 오신 관계라 그래도 4기 환자 치고는 건강해 보여서 계획대로 항암요법을 진행할 것을 권했다. 그러나 복기해 보면 이런 시도들이 기대여명이 늘어났다는 시그널은 아니었다. 길어야 9월이니 이대로 잘 견뎌보면 9월까지는 생존 가능하다는 뜻으로 해석하는 것이 사실 정확하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렇게 해석하길 원치 않으셨고, 나 또한 의사가 조금이라도 내놓은 긍정적 언어에 싵날같은 기대와 희망을 또 걸어보는 일을 반복할 수밖에 없었다.
그 시기가 내게는 꽤나 견디기 힘든 몇 주였다.
아버지는 아버지 대로 섬망증상 때문에 갑자기 교회를 가야 한다고 화요일 오후에 옷을 주섬주섬 입고 혼자 나가다 저혈압으로 다시 넘어져 머리에서 피를 흘리셨고, 15살 할아버지 요크셔테리어 반려견은 이틀 째 밥을 줘도 고개 돌리고 잠만 자고 있으니 혹시 이러다 얘도 죽는 건가 싶어서 겁이 났다. 엄마는 서서히 차오른 아랫배에 기존 지병으로 인해 각종 수치가 급격히 낮게 나와 큰 병원 몇 군데를 옮기며 CT 촬영을 하고 수술날짜까지 잡아놓은 상태였다. 마음이 약한 엄마는 병원에서 부정적인 소견만 받으면
"내가 니 아버지보다 더 빨리 죽게 생겼다"
...
"엄마! 왜 죽냐고! 제발 그런 소리 하지 말라고!"
차병원 복도에서 걸어가고 있는 엄마를 향해 꽥 소리를 쳤다. 아버지가 엄마한테 하는 것 마냥
불안했다.
나는 발을 동동 구르는데 마음이 지치고 외로웠다.
이 순간 아무도 나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갑자기 마음을 휘감으면 익숙한 무기력감에 그냥 나도 다 포기하고 도망쳐야 할까 잠깐 생각하고 다시 정신 차려서 씩씩을 연기했다. 어느 날은 참았어야 했는데 얼굴에 짜증이 차 올랐나 보다. 죽을 퍼 드리다가 그릇을 툭 떨어뜨렸는데 아버지가 너무 눈치를 보면서 당신 손으로 반찬을 꺼내어 식탁 위에 놓으려고 했던 순간도 기억에 난다.
나의 이런 불안은 6월에 연속으로 있었던 외래 진료 때 최 정점에 이르렀다.
엄마와 함께 아버지를 모시고 병원에 가는 날은 본관 입구에 두 분을 내려 드리고 다시 조금 떨어져 있는 주차장에 차를 내고 헐레벌떡 뛰어 온다. 그 사이에 엄마가 진료 접수, 수납 등을 하고 그날 가야 하는 곳에 있어야 하는데, 그날은 내시경 하는 곳에서 대기를 하고 있는 거다. 뭔가 이상했다. 자동 접수창구에서 인쇄된 안내서는 앞사람이 실수로 가져가지 않은 종이였고, 알고 보니 그분의 진료비도 납부한 후 내시경을 기다렸던 것이다.
나의 걱정은 항상 긴 호흡이다. 엄마도 마음이 너무 녹초가 된 상태였고, 아버지도 판단력이 너무 흐려진 것도 그렇지만 인쇄된 글자를 제대로 볼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둘 다 그걸 나한테 말이라도 했으면 뭐라도 했을 텐데, 엄마 아빠를 내가 더 지켜야 한다는 강력한 동기, 그러나 내가 다시 독일로 돌아가면 외래진료나 처방약 수령 같은 단순한 것들도 더 이상 지속가능하지 않다는 걸 아프게 확인하니 이미 내 마음속의 하늘은 노란색이었다. 솔직히 어떤 일이 또 생길까 몸서리치게 겁이 났다.
저혈압으로 계속 어지러워서 침대에서 일어나기도 힘들어하신 어느 날은 평소에 높은 안압을 떨어뜨리기 위해 혈압을 조절하는 약을 따로 복용하고 계시다는 걸 그제서야 알았다. 이 시기에 약은 먹어선 안되는 약이었다. 아버지는 백내장 때문에 이미 한쪽 눈 시력은 완전히 잃으셨는데, 이 약이라도 먹어서 다른 눈 하나는 지키고 싶으셨던 것이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나는 또 아버지에게 설명하고 설득해야만 했다. 지금껏 받아온 약들을 모조리 탈탈 털어서 날짜별로 분류하고 작은 통에 넣어 이름을 썼다. 큼직한 펜으로.
엄마도 복수가 매일마다 눈에 띄게 차 올라서 마음이 조급했다. 간암으로 돌아가신 외할머니가 환갑 겨우 넘긴 나이에 복수가 꽉 찬 상태에서 검은색 토를 끊임없이 하는 모습을 아홉 살 때 본 적이 있는 나는 엄마에게도 그런 모습이 일어나는 건 아닐까 가슴이 철렁했다.
그 다음번 분당서울대병원 진료를 가는 날은 38도의 불볕더위였다.
다리 근육이 많이 빠진 상태에서 평형감각 상실과 기립성 저혈압으로 잘 걷지 못하시면서도 그날은 휠체어 없이 가 보겠다고 하셨다. 사건은 이날 터졌다. 진료를 마치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데 아버지의 몸이 뻣뻣하게 굳는가 싶더니 눈이 뒤집혀 바닥에 그대로 흐물흐물 누워버리셨다. 나는 또 어쩔 줄 몰라서 주변 간호사 선생님들께 도움을 청해서 휠체어에 앉힐 수 있었다.
그동안 나는 아버지가 병원에 오실 때 극도로 긴장하고 오신다는 걸 모르고 있었다. 저벅저벅 병원 로비를 걷는 모습만 연기해 오신걸 나는 몰랐던 거다. 그날은 아침도 못 드신 날이라 다시 뚜레쥬르에서 단팥빵 그리고 좋아하시는 베지밀을 빨대에 꽂아서 드시게 했다. 그렇게 로비 한가운데에 앉아서 허기를 채우고 한 시간을 앉아있었다. 화장실을 가고 싶다고 하셔서 휠체어를 밀고 환자 칸으로 들어갔는데 일을 보시다고 일어서는데 또 다리를 퍼득거리며 중심을 잃고 졸도하셨다. 찬 타일 바닥에 뉘일 수 없어서 발 동동 거리다가 보안요원에게 부탁하여 응급실용 침대를 가져왔다. 그 위에서 다시 30분 동안 겨우 업어서 눕혀드리고 괜찮아지실 때까지 기다렸다. 또 한 번 CT 촬영하고 나오시다가 쓰러지시고, 병원에서 그날만 총 세 번을 졸도하셨건만 나는 도저히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정신이 없었다.
겨우 아버지를 휠체어에 앉히고 다시 주차장까지 달음질해서 아버지를 다시 차에 모시고 집으로 갔다. 차 안에서도 아버지는 눈이 또 너무 어지럽고 괴로워서 정신을 차리다 말다 웅얼거리기만 하시는데, 40분 동안 운전해서 오는 길에 땀과 눈물이 섞여 따가워진 시야를 정리하기가 힘들었던 기억이 난다. 나는 분명히 울고 있는데 울고 싶었다. 제발, 제발 이 고통이 끝나게 해달라고 마음으로 괴성을 지르며 기도했던 것 같다.
집에 도착했는데 조수석 시트에 절반은 꼬부라져 누워있는 아버지를 꺼내어 엘리베이터에 타는 게 그날의 마지막 숙제였다. 머리카락은 몽땅 빠지고, 물도 잘 못 마셔서 고통스러워 벌린 입에 쩍쩍 늘어진 침 자국, 총기를 잃어버린 눈동자,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는 아버지의 얼굴에서 나는 지옥이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아버지는 혀 꼬인 소리로, 그냥 앉아있다가 혼자 올라간다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또 하셨다.
혼자는 도저히 안될 것 같아 엘리베이터와 문이라도 잡아달라고 엄마에게 내려와 달라고 부탁했다. 엄마도 복수가 빵빵해져서 한쪽 손으로 아랫배를 받치고 있었다. 아버지는 죽어도 못 내린다고 고집을 피우셨다.
살면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아빠한테 소리를 꽥 질렀다.
"아버지 왜 이렇게 제가 말하는 거 안 듣고 고집 피우세요? 아버지만 힘들어요?
업고 금방 올라가면 된다니까 왜 저 이렇게 힘들게 하세요?"
...
그렇게 순순히 내 뒤에 기대셨고 나는 힘껏 아버지를 들쳐 없었다. 당시 아버지는 50kg 대에 진입했는데, 업기가 너무 어려웠다. 내가 충분히 견딜 수 있는 무게인데? 엘리베이터 거울을 보니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냥 힘 빼고 내 등에 몸을 맡기면 되었건만, 그 와중에 나한테 부담주기 싫다는 듯 허리와 팔다리를 꼿꼿이 세우니 나는 그게 더 힘들었던 거다. 나는 거의 등을 바닥과 수평으로 만들 정도로 허리를 숙이듯 업고 겨우겨우 안방 침대에 눕혀드렸다.
그날 밤은 해도 늦게 지고 달도 볼 수 있는 날이었다. 몰래 나가서 한바탕 또 찔찔 짜며 울면 속이라도 시원해질까 했는데 눈물도 나지 않았다.
몸이 힘들어서 녹초가 되었다는 사실보다 이렇게 얼마나 더 할 수 있을지 현실적인 계산을 하고 있는 내가 너무 미운 밤이었다.
이제와 돌아보니 살면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아버지를 업어본 날이었다.
비루한 체력이지만 그때 아버지를 업을 수 있어서 좋았고, 무너지지 않고 견뎌냈던 내가 그래도 기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