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규는 문득 붕어빵 장사만 한 게 없다고 생각했다. 이 지긋지긋한 정상팔이를 끝내고 당장 내일부터라도 붕어빵 만드는 법을 배우고 싶었다. 수락산의 마른 단풍들이 동규를 향해 작별인사를 했다. 그는 아이스박스 위에 내려앉은 낙엽 몇 개를 손바닥으로 거칠게 쓸어낸 후 상자를 열어 남아있는 음료수와 생수를 확인했다. 모두 21개. 하산하기에는 제법 무거운 양이다. 그나마 쌀쌀한 날씨 덕에 커피는 금세 동이 나 버렸지만, 저것들은 여전히 짐짝 신세다. 하기야 이 추운 날씨에 누가 시원하게 목을 축이려고 할까. 입동 전에 저것들을 더 이상 채워 넣지 않았어야 했다. 동규는 다시 아무 바위에 걸터앉아 생각에 잠겼다.
'매일 점심에 와서 생수 하나씩 사가는 지팡이 할아버지랑, 이틀에 한 번 들리는 마라톤청년, 그리고 또 보자.. 그 사람들까지 하면.. 아 그래도 일주일은 더 걸리겠다..'
"커피 얼마예요?"
"2천 원인데.."
어느 중년여성이 머리를 쥐고 있던 동규의 얼굴을 빤히 쳐다본다. 동규는 따뜻한 커피는 다 떨어졌고 차가운 음료수만 잔뜩 있다고 말해야 하는 이 순간이 너무나 아쉬운 마음에 말 끝을 놓쳐버렸다. 커피라도 더 끓여 왔어야 했나, 아직 해가 중천인데도 벌써 스무 잔이나 팔아버리다니.
"다 떨어졌고요, 음료수랑 물 있어요. 원래 이천 원인데 천오백 원만 주세요."
"괜찮아요."
"그러면 그냥 드릴게요."
"네? 정말요?"
"네 흐흣 그냥 드세요."
바람은 더 차가웠다. 이대로 버티고 있다고 한들 더 이상 장사가 잘 될 리 없었다. 지나가는 등산객들에게 이 짐짝들을 모두 줘버려야 아이스박스를 제때에 반납할 수 있었다. 크기가 적당히 커서 가을 내내 요긴하게 쓰였지만 이제는 너무 커서 문제였다. 물건은 때로 필요에 따라 그 크기가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이 신기하게 느껴졌다. 그나저나 이것들을 모두 비운다고 해도 십 킬로를 넘는 아이스박스를 짊어매고 하산을 한 다음, 다시 고물상까지 십여 킬로미터를 걸어가야 한다는 생각에 동규는 금세 풀이 죽어버렸다. 이제는 닥치는 대로 등산객들에게 얼른 나누어 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서둘러 장사를 접고 내려가 이 찬 바람에 딱 맞는 따뜻하고 맛있는 붕어빵을 사 먹고 싶었다. 동규는 아무래도 겨울에는 붕어빵 장사가 최고라고 생각했다. 왜 진작에 그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저 멀리 산등성이를 보고 있는데 마침 샛노란 단풍 물결이 노릇하게 잘 구워진 붕어빵과 닮았다. 그리고 동규는 얼른 스마트폰을 꺼내 계산기 어플을 켰다.
'4개에 천 원.. 하루에 400개면.. 10만 원, 한 달은 30일... 300만 원이나 벌 수 있잖아!'
동규의 심장이 빨라졌다. 팻말을 대충 접어 가방에 넣고 아이스박스를 질질 끌어 절벽 귀퉁이에 갖다 놓았다. 반납은 다음으로 미뤘다. 능숙하게 상자의 자물쇠를 채운 동규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미끄러지듯이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의 발아래로 낙엽들이 부스럭거렸다. '추추추추' 잰걸음으로 내리막길을 내려오는 동안 그는 추임새를 넣으며 흥얼거렸다. 눈빛이 맑아지고 코와 입에서는 윤기가 흘렀다. 그는 이미 머릿속으로 열심히 붕어빵을 굽고 있었다. 군침도 돈다. 붕어빵 기계랑 포장마차만 빌리면 된다. 팥이랑 반죽도 사면된다. 적어도 군고구마나 군밤보다 잘 팔릴 것이다. 아니 최소한 등산객들 눈치나 살살 보면서 언제 다 팔지도 모를 저것들 때문에 맨 바위에 죽치고 앉아 있을 필요는 없지 않은가. 동규는 급기야 크게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엄마 배고파 밥. 나 이제 붕어빵 팔 거야! 이제 됐어."
"으잉? 무신 갑자기 붕어빵. 그것도 다 돈이 있어야 하재."
현관으로 마중 나온 백발의 어머니는 다 굽은 등을 간신히 펴서 동규의 얼굴을 걱정스럽게 살폈다. 그런 어머니의 속도 모른 채 동규는 종이봉투에 들어있는 따끈한 붕어빵을 그녀에게 내밀었다. 어머니는 예삿일이라는 듯 게슴츠레한 눈으로 동규의 야윈 얼굴을 다시 훑으며 말했다.
"니 산 장사는 어째고? 다 팔았던가?"
"아니, 겨울에는 붕어빵이 최고라니까. 봐봐. 먹어봐 봐. 요 앞 놀이터 앞에 붕어빵 아줌마 알지? 굽는 기계랑 포장마차 빌리고 장사하면 돈이 된대. 된다니까."
"기 아줌마가 그래? 동규 니게 그렇게 말하여?"
"어.. 어. 그렇다니까. 이거 샀잖아. 사면서 물어봤지."
동규는 붕어빵 아줌마와는 대화를 나눈 적이 없었다. 그러나 어머니에게 장담하기 위해서는 그럴듯한 근거가 필요했다. 그리고 어머니 역시 그런 동규를 잘 알고 있었지만 속는 척 더 이상 토를 달지 않았다. 동규는 지폐와 동전 뭉치를 아무렇게나 녹슨 싱크대 위에 올려놓으며 잠바를 벗었다. 오늘 번 수입이었다. 다 합쳐도 채 3만 원이 되지 않는 돈이었지만, 천 원짜리 지폐와 동전들이 엉크러져 제법 돈이 돼 보였다. 동규는 그의 모든 수입을 항상 어머니에게 드렸다. 어머니는 한 손에 종이봉투를 받아 들고 종종걸음으로 냉장고로 향했다. 그녀가 단칸방으로 들어오자 좁은 반지하에 어느새 붕어빵 냄새가 가득했다.
"이게 굽는 방법이 중요해. 적당히 뒤집고, 팥도 많이 넣으면 사람들이 좋아한다니까. 엄마도 빨리 먹어봐."
"잉 긴데 포장마차는 어데서 빌릴라고?"
"응? 그건.. 빌리는 데가 있대. 내일 한 번 가보려고. (붕어빵을 한입에 모두 넣으며) 웨이 이어 나서 가보거야."
동규와 대화를 하던 어머니는 작은 냉장고 앞에 우두커니 섰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녀는 계속 서 있었다. 무엇을 하다 말고 그녀의 머릿속은 불이 꺼지는 일이 잦았다. 삼십 초 정도 멍하니 섰던 그녀는 아들이 배고파한다는 기억이 켜지는 순간 그제야 간신히 냉장고 문을 열어젖혔다. 냉장고 속은 그녀의 머릿속과 달리 아주 복잡했다. 내용물을 알 수 없는 검은색 비닐봉지와 흰 봉투들이 낡은 반찬통 사이에 어지럽게 섞여 있고, 계란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대파와 마늘이, 물통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간장통과 식초, 식용유가 버티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 혼돈 사이에서 망설임 없이 이것과 저것을 꺼내 이름 모를 찌개를 만들고야 말 것이다. 그사이 동규는 훌러덩 옷을 벗고 좁은 화장실에서 찬물로 고양이 샤워를 했다. 뜨거운 물이 나오려면 꽤 오랫동안 물을 틀어놓아야 했기 때문에 대충 금방 씻었다. 찌개가 끓는 동안 어머니는 동규가 방바닥에 어질러놓은 옷가지와 속옷들을 주섬주섬 주으러 다녔다. 중년을 이미 훌쩍 지났지만 여전히 손이 많이 가는 자식이었다.
초저녁이 되었다. 모자는 단출한 밥상에 둘러앉아 TV를 보며 말없이 저녁을 먹었다. 뉴스에서 쏟아지는 정보들이 둘의 귓가를 때릴 뿐, 아무 의미를 주지는 못했다. 달이 빛나고 방이 조금 덥혀지자 동규는 일찍 자리에 누웠다. 그의 누울 자리는 늘 현관 쪽이었다. 조금 더 아랫목에는 어머니의 이불이 항상 깔려 있었다. 이불 끝자락에는 먼지만 가득하게 쌓인 행상바구니들이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었다. 그 먼지들 때문인지는 몰라도 어머니는 매일 밤마다 쉴 새 없이 기침을 했다. 동규는 그런 어머니를 위해 습관대로 주전자에 미지근한 물을 담아 그녀의 베개 옆에 놓았다. 동규는 나름 할 일을 마치고 눕자마자 이것저것 생각했다. 오늘 사 먹은 붕어빵과 비슷한 맛을 낼 수 있을지, 어머니의 기침은 대체 언제 나을 건지, 포장마차를 어디에서 빌려야 하는지, 그리고 문득 붕어빵에는 진짜 붕어가 없다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혼자 키득키득 웃다가 금세 곯아떨어졌다.
"뭐가 우스워서 자기 혼자 웃는가. 퍼뜩 자."
희미한 현관 조명을 등불 삼아 그녀는 마저 하던 마늘 까기를 이어나갔다. 두툼하고 거친 손 등 위로 뭉툭한 칼날이 한 번 휙 하고 지나가면 매끈하게 다듬어진 마늘이 빨간 바구니 위로 또르륵 떨어졌다. 졸음이 올 때까지 하염없이 마늘을 다듬을 생각이었다. 그녀의 옛 추억들이 보였다. 이곳에 살기 전, 백발이 되기 전, 동규를 낳기 전, 그 모든 장면들이 그녀의 눈앞에서 천천히 지나갔다. 익숙한 목소리들이 그녀에게 무어라무어라 말을 건네기도, 낯익은 장소가 보였다가 금방 어두워지기도 했다. 그러다가 근처 골목에서 어느 주정뱅이의 노랫소리가 들리자 그녀는 졸고 있던 머리를 간신히 일으켜 잘 준비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