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솔직히 겁난다. 나라는 존재가 정말 별것 아니면 어쩌지? 나는 우주 어딘가에서 꿈틀거리는 패턴 그 자체에 불과하다면, 나에 대한 몰입이 단지 자연현상의 일부라면, 그저 스크린을 바라보며 시간을 때우고 앉아있는 형편없는 관객에 불과하다면 나는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것 같다. 나, 너, 서로, 우리. 자아로 구별되는 각자의 독립성이 결코 허구가 아니기를 간절히 바라며, 우주는 드디어 우주 속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목차
1. 서론
(1) 논의의 의미
(2) 문제제기
(3) 논의의 방향
2. 여러 학자들의 견해
(1) 철학자비트겐슈타인
(2) 철학자 에반 톰슨
(3) 뇌과학자제럴드 에덜먼
(4) 생물철학자 움베르또 마뚜라나
(5) 인지생물학자 프란시스코 바렐라
3. 자아의 의미에 대한 탐구
(1) 우리에게 더 의미 있는 것
(2) 사실에 더 가까운 것
4. 자아와 미래
(1) 인공지능과 자아의 결합
(2) 자아에 대한 새로운 산업
(3) 자아의 변화
5. 작은 결론
1. 서론
(1)논의의 의미
나는 내가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당신은 당신이 어떤 존재인지 정확히 알고 있는가? 사실 관계에서 드러나는 수많은 정보, 이를테면 생물종ㆍ성별ㆍ나이ㆍ직업ㆍ거주지ㆍ학력 등과 같은 정보들은 자연 또는 사회 계약 안의 '나'의 위상을 알려줄 뿐 '나'라는 존재에 대해 충분한 이해를 도와주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그것들은 자아의 본질과 특성으로부터 비롯된 부수적인 정보들이기 때문이다. 나는 도대체 무엇이고, 어디에 있고, 어디에서 왔는지, 자아라는 것이 정말 있는 것인지, 이런 머리 아픈 질문들에 답을 하기 위해서는 많은 고민이 필요하다. 심지어 답이 없을 수도 있다. 어쩌면 수많은 선택지 가운데 내게 가장 잘 어울리는 답을 골라야 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에 대해 의문을 던지는 일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거쳐야 할 통과의례다. 세상과의 끊임없는 영향 안에서 나 자신을 탐구하고 실증하는 일은 자아를 통합하고 오로지 나 자신의 삶을 살게 해 줄 가치 있는 일이다. 삶의 불안을 걷어내고 내가 나로서 살아갈 계기가 될 것이며, 문명에 굴복하여 복제품으로 살아갈 수많은 사람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일이라 믿는다. '나'를 탐구하는 일은 나의 몸을 나의 눈으로 바라보는 일부터, 나의 마음을 나의 기억과 생각으로 파헤치는 일까지 꽤 광범위한 작업이다. 그리고 이 작업은 모든 '나'에게 여러모로큰 도움이 될 것이다.
(2)문제제기
나는 분명 존재한다. 하지만 나라는 개념이 얼마나 추상적이고 애매모호한 것인지 보여주는 몇 가지 문제상황이 있다. 우리가 이 문제들로 얻을 수 있는 건 '나'는 단순히 물질의 총합이나 창발성으로부터 비롯된 존재는 아니며, 나와 외부의 시점에 따라 나는 다양하게 규정될 수 있고, 내가여기는 나라는 존재가 내가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다. 또 이러한 환기를 거쳐야만 조금 더 넓은 마음으로 현인들의 견해를 곱씹어 볼 수 있다.
ㆍ문제상황 1)
머리카락부터 발톱까지, 내 몸의 모든 부분을 점진적으로 인공세포로 대체한다. 항상성이 깨지지 않을 정도로 아주 천천히 대체해야 한다. 언젠가 내 몸의 모든 부분이 완전히 다른 것으로 바뀌었을 때 나는 대체되기 이전의 나와 전혀 다른 물질로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면 나는 더 이상 내가 아닌 것일까? 하물며 우리 몸은 세포의 탄생과 소멸을 통해 매 7년마다 완전히 새로운 세포로 이루어지는데, 그때마다 나는 7년 전의 나와는 전혀 다른 존재일까?
ㆍ문제상황 2)
기억상실증에 걸린 사람의 뇌에 그와 생년월일시가 같은 다른 사람의 기억을 주입한다. 이제 그의 자아는 주입된 기억에 의존할 것이다. 그러면 그는 기억의 주인과 동일한 사람으로 변하는 것일까? 아니면, 몸은 바뀌지 않았기에 제3자가 되는 것일까?그는 여전히 그로 남는 것인가?
ㆍ문제상황 3)
내 간을 타인에게 이식해 주었다. 이식된 내 간은 타인의 몸 안에서 여전히 살아있다. 이때 나의 일부가 타인의 몸으로 옮겨간 것인가? 아니면, 나의 일부가 없어진 것인가? 비슷한 예로 세포와 미토콘드리아의 생식이 있다. 세포와 미토콘드리아를 관찰해 보면, 그것들 나름대로 미시세계에서 독자적인 삶을 영위한다. 심지어 생물학적 사회계약을 거부하고 더 이상 소멸하지 않는 암세포를 보면 그것이 정말 나의 일부인 것인지 의심스러워진다. 내 몸을 구성하고 있는 부분들은 분명 나의 일부지만, 그 일부들은 다른 일부와 공생관계를맺은 또 다른 존재체들이다. 그렇다면 나는 생명체의 집합에 불과한가? 나의 생명은 어디에 있는가? 아니면, 생명유지의 중추기관인 심장 또는 뇌가 나의 생명을 가지고 있을까?
ㆍ문제상황 4)
나는 과연 언제 생길까? 엄마의 자궁 안에서 최초로 수정되었을 때, 뇌가 완성되고 비로소 자아를 가지게 되었을 때, 나의 DNA를 지닌 세포가 출현했을 때, 다양한 시작점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반대로 나의 끝에 대해서도 수많은 질문을 던져볼 수 있다. 죽음 후 시체로 남아있을 나는 생명은 없지만 엄연히 물질로 구성되어 있다. '죽은 나'는 내가 지니는 최종 상태다. 생명이 끊어져도 여전히 나는 당분간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혹은 나라는 존재는 생명을 전제로 하기에 생명이 없어지는 즉시 나 역시 소멸한다고 보아야 할까? 내 암세포를 외부에서 따로 배양할 경우 나는 죽어 없어져도 암세포는 여전히 증식을 거듭할 것이다. 약 30년 동안 나의 암세포를 끊임없이 배양한다고 가정할 경우 약 20톤의 암세포가 생긴다. 나에서 시작된 세포이고 생명을 가지고 있으므로 그것을 여전히 나의 일부로 보아야 할까? 아니면 그 암세포는 나와 전혀 다른 존재로 보아야 할까?
ㆍ문제상황 5)
두뇌의 시냅스가 촘촘히 연결되어 전기적 신호가 복잡하고 다양할수록 의식은 또렷해진다. 반대로 시냅스의 엉킴이 단순하고 전기적 신호가 적을수록 의식은 흐릿해진다. 심지어 전신마취를 하거나 잠을 잘 때 누구나 무의식 상태가 되는데, 그때 시냅스의 전기적 신호는 아주 적거나 없다. 그렇다면 우리가 의식 또는 자아라고 믿는 것은 단지 두뇌의 전기적 신호가 만들어내는 실체 없는 허상에 불과할까?
(3) 논의의 방향
앞서 살펴본 대로 나를 찾아서 떠나는 여행은 너무 혼란스럽다. 어느 방향으로 출발해야 하는지, 종착지는 어디인지, 맞게 가고 있는 것인지 정확하게 알 수 없는 배낭여행과 같다.생물학적인 관점에서, 철학적인 관점에서, 인지심리학적인 관점에서 논의를 풀어갈 수도 있고 종교적인 관점에서 교리에 어긋나지 않는 방향으로 자아의 본질을 탐구해 볼 수도 있다.그래서 논의의 방향은 별다른 규칙이 없다. 그저 생각나는 대로, 발길이 닿는 대로 가보려 한다. 그래도 한 가지 다행스러운 점은 세계의 많은 석학들이 평생을 받쳐 '나'에 대해 어느 정도는 길을 닦아놓았다는 점이다.
논의의시작에서여러 학자들의 견해를 살펴볼 것이다. 되도록 다양한 분야의 서로 다른 관점을 소개하기 위해 애썼다.그다음에는 현실적인 측면에서 자아에 대한 사상을 실용적인 것과 받아들이기 쉬운 것으로 나누어 정리해 보고, 기술과 문명의 발전이 앞으로 우리의 자아와 자아개념에 어떠한 영향을 미칠 것인지 상상해 보며논의를 마치겠다.이러한 순서는 과거-현재-미래와 궤를 같이한다.
익숙하지만 생소한 주제를 풀어서 쓰자니 쉽게 읽힐 수 없는 글이 되어 버렸다. 이해할 수 없는 개념이 종종 등장한다. 이해할 수 없는 이유는 개념의 표현방식과 전제에 대한 배경지식이 너무나 지엽적이고 전문적이기 때문이다. 일부는 나 역시도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래도 많은 글감과 데이터를 통해 최대한 단순 명료한 의미로 바꾸어 보려 노력했다. 이해가 되지 않을 때는 일단 다음 단락으로 넘어가며 전체적인 윤곽을 먼저 그려보는 것이 상책이다. 그 후에는 관련 자료를 찾아보며 반복해서 고심해 보기를 추천한다.
2. 여러 학자들의 견해
(1) 철학자 비트겐슈타인
비트겐슈타인은 [논리철학 논고]에서 '유아론'을 말했다.
비트겐슈타인은 그의 여러 작품에서 자아의 개념에 대해 다양한 관점으로 접근한다. 하지만 자아의 본질적인 의미나 존재론적 문제를 중요하게 다루는 작품은 아쉽게도 없다. 그는 주로 언어현상을 중심으로 철학을 다루었기 때문에, 자아나 인식 등의 개념을 언어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는 편이었다. 심지어 자아의 본질을 철학적으로 파악하려는 시도는 언어의 한계를 벗어나 생각할 수 없는 생각을 하는 것만큼이나 무의미한 것으로 여기기도 했다. 그리고 되려 이런 그의 담백한 시각이 자아의 본질을 탐구하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줬다. 그의 생각은 충분히 매력적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자아에 대한 전통적인 개념을 거부했다. 그는 "사물은 자신을 표현한다"는 개념을 제안하며, 개인적인 경험과 언어 사용을 통해 자아가 형성된다고 보았다. 그는 자아가 일종의 고정된독립적인 존재체가 아니라, 우리의 경험과 언어 사용의 결과물이라고 주장했다. 자아는 언어의 문맥 안에서 형성되며, 이러한 언어 게임을 통해 우리는 자아를 이해하고 소통할 수 있다는것이다. 따라서, 그는 자아를 "사물이 표현하는 방식"으로 이해하며, 이는 개인의 경험과 언어 사용, 그리고 문화와 사회적 맥락 등 다양한 요소에 의해 형성된다고 보았다.
자아에 대한 그의 철학은 그의 저서 [논리철학 논고]
에서 비교적 짧고 명확하게 등장한다.
"세계는 나의 세계이다."
너무나 자명하여 어떤 감흥도 느껴지지 않는 이 명제 속에는 그가 생각하는 자아의 개념이 분명하게 표현되어 있다. 이견의 여지는 있지만, 그는 유아론(唯我論/Solipsism)을 주장했다. 유아론이란 자신만이 존재하고, 타인이나 그 밖의 다른 존재물은 자신의 의식 속에 있다고 여기는 생각으로, 자기(self)를 최우선에 두는 학설이다.그런데 그의 유아론은 조금 특별하다. 세계는 나의 의식과 언어의 한계로 규정되지만 정작 나의 자아가 생성되는 방식은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형이상학에 의존한다고 본다. 조금은 난해한 개념이다. 그가 생각하는 자아의 개념을 뚜렷하게 들여다보려면 우선 그의 존재론부터 이해하고 넘어가야 한다.
비트겐슈타인은 철저히 언어의 한계를 인식하며 논리적인 관점에서 존재를 바라보았다. 가령, 어떤 것이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으려면 논리적으로 그 존재가 존재하지 않을 확률이 전혀 없어야 하는데, 이러한 전제는 논리적으로 불가능하거나 알 수 없으므로 어떤 것이 존재한다는 표현은 어디까지나 언어로 표현하는 정보에 불과한 것이다. 그의 관점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 조금 더 구체적인 예시를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ㆍ사과가 있다 : 0.005%의 참
ㆍ사과는 2023년 3월 6일 오후 8시에 있다 : 0.01%
ㆍ2023년 3월 6일 오후 8시에 사과가 책상 위에 있다 : 0.02%
ㆍ2023년 3월 6일 오후 8시부터 2023년 4월 1일 오전 7시 사이에, 위도 37.5666805, 경도 126.9784147의 위치에 있는 가로세로높이 150cmㆍ150cmㆍ120cm의 원목책상 위에 사과가 있다 :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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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방식으로 사과가 책상 위에 존재하고 있다는 명제가 논리적으로 100% 참이 되기 위해서는 그렇지 않을 경우의 수를 모두 충분히 배제할 수 있을 정도로 실로 무한한 언어적 설명이 필요하다.
그런데 명제의 논리성과 존재의 본질에 대해 매우 엄격했던 그는 "세계는 나의 세계이다."라는 간단한 명제는 두 말할 필요 없이 전적으로 옳다고 주장했다. 세계를 인식하는 나는 나의 세계에서 빚어진 맥락이며, 나의 세계는 나의 인지와 언어의 한계가 시작되는 지점까지 유한하게 뻗어 있다. 그러므로 나라는 존재는 다른 사물의 존재를 규명할 때 봉착할 수밖에 없었던 지점, 즉, 언어의 바다가 끝나는 지점 위에 서 있다.자아는 어디까지나 형이상학적인 주체이며 논리적 요청이 필요한 철학적 존재임과 동시에 스스로 드러나는사물의 표현방식인 것이다.
ㆍ사물은 세계 안에서 스스로 드러내고 우리는 그 모습을 말할 수 있는 지점까지 생각과 언어의 대상으로 삼는다.
ㆍ나는 세계로부터 도출된 일종의 맥락이자 경험의 대상이다.
ㆍ나를 느끼고 안다는 것은 곧 나 자신이라 불리는 사물의 표현방식을 경험하는 것이다.
(2) 생물철학자 에반 톰슨
"생명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고, 마음은 생명현상 가운데 비교적 명확한 형식을 띠고 있다. 생명과 마음은 핵심적인 특성들을 공유한다. 생명의 근본적인 특성들과 마음을 구성하는 독특한 특성들은 결코 다르지 않다. 더 정확히 말하면, 마음의 자기 조직적 특징들은 생명의 자기 조직적 특성들의 농축된 판본이다. 생물학으로 판별 가능한 생명의 자기 생산적 또는 자기 조직화 능력(autopoiesis)은 이미 인지를 함축하고 있으며, 이런 맹아적 마음은 시간의 자연스러운 흐름뿐 아니라 행위, 지각, 그리고 감정의 자기 조직적이고 역학적인 의도를 이미알고 있다."
에반 톰슨은 그의 저서, [생명 속의 마음:신경과 인식의 역사적 접근]에서 생물학적 자아에 대해 섬세하고 충실한 설명을 이어 나간다. 자아는 생명현상의 일부로서 나름의 기능을 갖고 있고, 물질세계의 구조와 형식에 맞게 스스로 작용할 수 있는 '자기 조직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자기 조직화 능력이란 시스템의 구조가 외부로부터의 압력이나 관련 없이 스스로 혁신적인 방법으로 조직을 꾸려나가는 능력을 말한다. 이 개념은 사실 인공지능(AI)의 핵심 개념이기도 하다.
그는 자아에 대해 비교적 복잡한 입장을 제시했다. 그는 자아를 일종의 '구성적' 개념으로 바라보며, 인식과 경험의 다양한 측면에서 자아가 어떻게 구성되는지 탐구했다. 그러나 동시에 자아를 뇌 활동의 결과물로만 간주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그는 나무와 같은 생명체들이 인간과 같이 자아를 가진다고 믿었다. 그는 생명체의 독특한 특성이 결국 환경을 통해 행동으로 드러나는 것이 그들에게 자아가 있다는 의미로 해석했다. 그들이 독립적으로 존재하면서 자신들만의 의지와 목적을 가지며, 또한 감정과 통찰력을 가지기에 특정한 행동을 반복한다는 것이다. 에반톰슨은 나무들이 서로상호작용하여 커뮤니티를 형성하며, 서로를 돕고, 때때로 각자의 역할을 수행한다는 것을 관찰했다. 나무들의 이러한 행동은 나무들이 자아를 가지고 있다는 방증이었다.
또한, 톰슨은 인식과 경험을 모두 포괄하는 복잡한 상호작용의 결과물을 자아로 간주했다.개체의 내면과 주변 환경 사이에 존재하는 복합관계 역시 자아의 일부로 '구성'한 것이다. 그의 이러한 관점을 "관계적 자아(relational self)"라고 한다. 이는 어느 개체의 자아가 다른 개체와, 또 환경과의 상호작용에서 형성된다는 것을 의미하는데,이러한 견해는 전통적인 서양 철학의 자아 개념과는 다소 다르다. 요인으로 보이는 것들을 원인이 아닌 구성체로, 구성체를 둘러싸고 있는 '계'의 개념을 그 자체로 다시 구성체의 일부로 여기는 시각은 그의 생각 이전에유행했던 자아론들을 굉장히 단순한 개념으로 만들어버릴 정도로 복잡한 생각이다.그러나 그는 자신의 이러한 개념들이 이미 학계에 널리 퍼져있는 자아론들과 서로 상충되지 않고, 오히려 상호보완적으로 해석될 수 있다고 믿었다.
ㆍ생명의 자기 조직화 능력 안에는 자아가 포함되어 있다. 즉, 자아는 생명현상의 일부이며, 물질로 구성되어 있는 자연의 원리를 따른다.
ㆍ인식, 경험과 같은 환경과의 상호작용뿐만 아니라 내외부에서 발생하는 모든 종류의 관계 역시 자아를 구성하는 요소다.
ㆍ자아는 닫혀있는 계에 한정되어 있는 어떤 시스템으로 볼 수 없고, 구성체의 한계를 특정할 수 없는 열려있는 계 자체의 전부 또는 일부를 대변한다.
(3) 뇌과학자 제럴드 에덜먼
생물학자이자 뇌과학자 제럴드 에덜먼, 2010년
제럴드 에덜먼은 인간의 자아가 뇌의 뉴런 활동과 관련이 있다고 믿었지만, 단순히 뇌의 기계적인 작용만으로는 자아를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인간의 자아가 개인의 경험, 문화, 사회적 상황 등 다양한 영향을 받아 형성된다고 믿었다. 자아가 생물학적, 신경학적 현상으로부터 발생하는 것은 인정하지만, 그 이면에는 다양한 인간적인 경험과 문화적 요소 역시 작용한다는 점을 배제하지 않았다. 에덜먼은 "신경선택주의(neuronal selectionism)"라는 이론을 제시했다. 이 이론에 따르면 뇌의 뉴런들이 신경망을 형성하고, 학습과 경험에 따라 특정한 연결이 강화되어 결국 자아와 같은 높은 수준의 인지 현상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신경선택주의는 인간의 뇌에서 비롯되는 지능과 의식을 설명하는 신경학 이론이다. 인간의 뇌는 뉴런(neuron)이라는 신경세포들의 네트워크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 네트워크는 학습과 경험에 따라 형성되고, 그것들 간의 연결이 강화되면, 나아가 자아와 같은 높은 수준의 인지 현상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에델만은 뇌의 네트워크가 매우 복잡하고 다양한 입력을 받는다는 것을 강조했다. 입력(자극)은 감각, 운동, 인지적 경험 등 다양한 것들로부터 올 수 있으며, 뇌는 이러한 입력들을 처리하는데, 일부는 선택하여 강화하고 나머지는 무시한다. 이러한 선택과 강화는 각 뉴런 사이에 존재하는 시냅스(synapse)라는 연결 부위에서 일어나며, 이 과정에서 일부 뉴런은 다른 뉴런보다 더 자주 활성화하고 연결이 강화된다.
그러한 뉴런의 성질은 "신경 면역성(neural darwinism)"이라는 개념으로 이어진다.이 개념은 진화론의 자연선택과 유사하게, 뇌 안에서 일어나는 선택과 강화 과정을 적응과 생존의 측면에서 설명한다.쉽게 말해, 에덜먼은 뉴런 간 연결과 정보 전달은 자유롭게 일어나지 않고, 일종의 경쟁 혹은 선택 과정을 거쳐 일어난다고 주장했다. 수많은 뉴런들 중 특정한 입력 신호에 대해 반응성이 높은 뉴런들이 선택되어 연결이 강화되고, 이 과정을 통해 뇌는 학습과 경험에 따라 확립된 연결로부터 패턴을 생성한 후 생존에 필요한 의사결정을 수행한다. 그리고 바로 이 의사결정이 곧 자아인 것이다. 즉, 그는 자아를 외부세계에 대응하는 뇌 활동의 과정으로 정의했다. 대응과 적응, 기억과 목적, 그리고 선택과 방향성으로 이루어진 두뇌의 신경 전략이 우리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자아라는 것이다.
ㆍ신경선택주의에 따라 두뇌의 신경작용은 특정한 패턴을 형성하기 시작한다.
ㆍ신경패턴은 내외부의 모든 요소와 영향관계를 맺고 있으므로 자아를 단순히 뇌의 전기적 신호 집합 또는 패턴으로 보기는 어렵다.
ㆍ자아는 외부세계에 대응하기 위한 신경 면역성의 결과이자, 두뇌의 효율성을 담보하는 신경 전략이다.
(4) 생물철학자 움베르또 마뚜라나
움베르또 마투라나는 생물학적 인지 개념과 함께 인지에 대해서 수용자의 주관성의 중요함을 강조하는 ‘관찰자’ 개념을 도입했다.
마투라나는 자아에 대한 "자기 조성적 시스템(the autopoietic system)" 이론을 제시했다. 자기 조성적 시스템 이론에서 자아는 단순히 인지와 관련된 일련의 기능이 아니라, 생명체 자체의 자기 조성적 시스템에 의해 생성되는 현상이다. 이러한 시스템은 외부의 자극에 반응하면서도, 내재적으로 일관성을 유지하고 자체적으로 구성을 유지하는 성질을 갖는다. 마투라나는 자아와 생명체가 별개의 개체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았다. 즉, 생명체 자체가 자아를 형성하고, 자아는 생명을 존속시키는 존재라는 것이다. 이러한 시스템에서는 자아와 생명체의 경계가 명확하지 않으며, 둘은 상호작용하면서 함께 발전한다.
마투라나는 자아를신경활동으로 설명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고 생각했다. 대신, 자아는 생명체와 그 생명체의 환경, 그리고 이들이 서로 상호작용하면서 형성되는 자기 조성적 시스템에서 유래된다고 한다.그는 "자아"라는 개념을 "자기조직화된 신경생물학적 네트워크"로 정의했다. 이어서 그는 "자아에 의한 자아화"라는 개념을 제안했다. 이는 개인이 자신의 자아를 인지하고 인식하는 과정에서, 자아의 구성 요소들이 함께 상호작용하여 자아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자아화 과정은 개인의 경험, 문화, 사회적 상황 등에 영향을 받는다. 자아라는 것은 어느 위상에 점으로 존재하는 단일체가 아니라, 다양한 구성요소 사이에서 시시각각 변화하는 생물적인 감각인 것이다. 그러므로 자아는 단순히 인간의 이론적인 개념이 아니라, 모든 생명체에게 존재하는 자연적인 현상이다.
예를 들어, 자아를 인지하고 있는 자아가 있다고 해보자. 그 자아 역시 인지의 대상이 되는 자아와 동일하다. 그리고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자아의 자아화와 자기 조성적 시스템 덕분이다. 생각으로 생각을 점검하고, 자아가 자아를 판단하는 일은 수직으로 펼쳐진 시간의 축을 따라 자아 위에 겹겹이 쌓여가는 자아의 구성요소 덕분이다. 마치 각 기후대별로 지층에 서로 다른 지질이 누적되듯, 자아는 주변 정보와 융화하여 계속 조성된다. 이러한 시스템은 생물에 기반을 두고 있는 일종의 네트워크로 볼 수도 있다.
마투리나의 이론은 일면 에반 톰슨이 제시한 생명의 자기 조직화 능력과 닮아 있다. 사실, 마투리나가 말하는 자아의 자기 조성적 시스템과 톰슨이 강조한 생명의 자기 조직화 능력은 엄연히 같다. 단지 마투리나는 자아와 생명을 구분하는 것이 자아의 본질을 탐구하는데 큰 의미가 없다고 보았으며, 자아와 생명으로 구성된 복합체 또는 어떤 것의 성질 자체가 자아를 대변한다고 생각했다. 자아의 자아화 역시 생명의 자기감독기능과 같은 개념이다. 본체에 대해 스스로 확인, 감독, 치유, 변화, 강화, 유지 등의 작용을 하는 것은 생명이나 자아나 별반 달리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ㆍ자아는 생명의 일반원리에 따라 자기 조성적 시스템과 자아의 자아화 능력을 갖는다.
ㆍ자아는 신경생물학적 네트워크가 자기 조직화하여 형성된다.
ㆍ자아와 생명을 구분하는 것은 크게 의미가 없고, 오히려 생명 연구를 통해 자아의 본질을 밝힐 수 있다.
(5) 인지생물학자 프란시스코 바렐라
윤리의 본질을 인지과학으로 파헤친 저명한 생물학자이자 인지과학자인 프란시스코 바렐라
프란시스코 바렐라(Francisco Varela)는 "구체적 초월성(The Embodied Transcendence)"이라는 철학적 관점을 제시했다. 인간의 자아는 몸과 상호작용하면서 형성되고, 이를 넘어서는 정신적인 경험이 인지라는 것이다.바렐라는 인간의 인지 능력이 외부 세계와의 상호작용에 의해 발전하는데, 이 과정에서 몸과 마음이 함께 작용한다고 주장했다. 즉, 인간의 지식은 몸과 상호작용하면서 만들어지며, 인지능력도 몸과 함께 작동함으로써 발전한다는 것이다. 자아를 마음 또는 내면의 심리로 국한하던 기존의 모델들과는 매우 다른 관점이다.
예를 들어, 당신이 축구를 한다고 가정해 보자. 축구를 할 때, 당신은 몸을 움직이고 공을 차며 상대방과 상호작용한다. 이 과정에서 당신의 몸은 상황에 맞게 자동으로 반응하고, 당신의 뇌는 상황을 판단하고 행동을 조절한다. 이렇게 몸과 뇌가 함께 작동하면서 축구를 하고 있을 때, 당신은 자신이 뛰고 있다는 것, 공을 차는 것, 팀의 승리를 위해 전략적으로 행동하는 것 등의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몸과 뇌가 함께 작동하면서 형성된 축구 경험은 당신의 자아를 형성하는데 기여할 것이다. 기억과 학습, 경험에 대한 몸의 느낌과 반응, 감정 처리의 방향성, 다른 경험과의 연결 등을 통해 결국 축구 경험은 자아를 일부 변화시키거나 강화할 것이다.
앞선 4명의 사상을 읽고 난 후 그의 관점은 사실 자연스럽고 아주 당연한 개념으로 다가오기는 하지만, 자아가 행동을 만든다는 기존의 정적인 관점을 뒤튼 참신한 생각임에는 틀림없다. 바렐라는 행동과 몸의 감각을 자아의 결과가 아닌 원인으로, 행동에 따른 상황과 맥락을 자아 형성의 방향성(경험)으로 바라보며, 조금 더 구체적인 관점에서 자아의 초월성에 주목했던 것이다.
또한, 그는 자아에 대한 철학적인 접근에서 "익숙함과 불안정함(familiarity and instability)"을 강조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자아는 개인과 환경 간의 상호작용 가운데 다음의 과정을 따라 형성된다고 한다.
i) 익숙함 ㅡ 반복 ㅡ 패턴형성 ㅡ 강화
ii) 익숙하지 않음 ㅡ 새로움 ㅡ 변화
iii) 조금 익숙함 ㅡ 일부 반복과 일부 새로움 ㅡ 패턴형성과 새로움 공존 ㅡ 강화와 변화가 공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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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 n)의 과정이 끊임없이 존재하기 때문에 자아 형성은 불규칙적, 무작위적, 우연적, 불확실 등의 불안정한 특징을 갖는다. 그리고 이러한 불안정성을 일으키는 것이 바로 고정되어 있지 않은 것들, 언어ㆍ문화ㆍ생각ㆍ감정ㆍ역할ㆍ사회ㆍ문화 등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어느 개인의 자아와 형성 과정에 대해 이해하려면 자아의 불안정성을 초래하는 요소들의 역사적 사실과 현재의 상태를 반드시 확인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바렐라의 철학적 접근은 인간의 자아와 문화, 사회, 언어 등의 복잡한 관계에 대한 인문학적 이해를 넓히는 데 크게 기여했다.
ㆍ자아란 정신적인 것이 아니라 몸과 마음이 상호작용하여 형성한 인지의 모태이며, 인지는 몸과 마음의 영역에서 벗어나 창발 된 새로운 경험을 의미한다.
ㆍ자아는 구체적 초월성을 갖는다.
ㆍ자아에 영향을 주는 불안정한 요소들이 자아의 불안정성을 일으키지만, 이러한 불안정성이 자아의 형성과 초월성을 돕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