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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율앤킴 Aug 17. 2023

인생은 고되지만 작은 승리는 맛보리라!

영화 - 테트리스

< 테트리스, 존 S. 베어드 감독, 태런 애저튼 주연, 영국/미국, Apple TV + >


이 영화를 보고 나서의 흥분을 잊을 수 없다. 만약 이 글을 관람 직후 썼다면 감정 과잉으로 써내려 갔을 것이다. 누군가 내게 애플 티비에서 영화 한 편을 추천하라면, 망설임 없이 이 영화 <테트리스>를 추천할 것이다. 나처럼 게임을 좋아했던 사람이라면 이 영화를 꼭 보라고 권하고 싶다. 난 몇 번이고 이 영화를 같이 볼 수 있다.


영화 <테트리스>는 제목에서부터 큰 끌림을 주었다. 난 어려서부터 테트리스 게임의 광팬이었다. 내 인생에서 나름 중요한 시험공부를 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 시절 핸드폰을 꺼두고 공부할 정도로 몰입해야만 했다. 그런 와중에도 스스로에게 허락한 유희 하나가 바로 테트리스였다. 하루 종일 공부하던 시절 식사 시간에 밥을 빨리 먹고 오락실에 들려 테트리스를 하곤 했다. 게임이 잘되는 날엔 테트리스 한 판을 끝내는데 오랜 시간이 소요되기도 하기에, 어떤 날은 밥이냐 오락이냐의 선택을 해야만 했고 굶어가면서까지 테트리스 게임을 즐겼다. 지금에서 생각해 보니, 그 정도로 절실했던 공부도 테트리스도 결과론적으론 그다지 드라마틱한 실력이 아니었다는 것이 안타깝기도 하다. 아무튼, 그 시절 삶의 고됨을 덜어준 것은 어쩌면 테트리스의 힘이었을는지 모른다.

그런데, 영화를 보고 나서 놀라운 자료를 찾게 되었다. 영국 옥스퍼드 대학과 스웨덴 카롤린스카 연구소가 공동으로 연구한 결과에 의하면, 테트리스 게임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줄이는데 효과가 있다고 한다. 매우 흥미로운 기사였다. 나에게 테트리스의 효능은 우울증 감퇴와 식욕 증진, 삶의 집중력이었던 것 같다.

내게 이런 존재인 <테트리스>를 영화로 만들었다니 그 자체만으로도 고마운 영화다. 그런데, 영화는 재미와 감동, 추억을 되살려주고, 다시 열정거리를 찾고자 하는 동기 부여까지 해주었다.


영화의 내용은 냉전 시절 소련에서의 테트리스라는 게임의 저작권과 유통에 관한 여러 가지 복잡한 문제를 다룬 실화이다. 단순히 테트리스 게임뿐 아니라, 당시의 시대상과 그 시대 음악 등이 나온다. 영화를 보고 한 동안 OST와 옛 팝송에 취해있기도 했다.

영화의 단락마다 일의 진행 과정을 게임 레벨 단계처럼 표현한다. 일이 성공되면 넥스트 레벨로 진입하는 것은 마치 게임 속 주인공이 되어 미션을 클리어하는 기분을 느끼게 해 주었다. 8비트 픽셀 형태의 단순한 애니메이션으로 주요 내용을 요약해 주는 장면도 흥미로웠다.


비디오 게임 세일즈맨인 행크 로저스는 1988년 라스베가스에서 열린 가전 박람회에서 우연히 본 '테트리스'라는 단순한 게임에 매료된다. 이 게임에 흠뻑 빠져 게임 출시를 위해 자신의 인생을 건다. 일본으로 가서 닌텐도 회장을 만나 설득하고 본격적인 사업을 준비해 나간다.

그러나, 막상 출시를 위해 시동을 걸어보니 난관은 한두 건이 아니었다. 공산국가인 당시의 소련은 저작권이나 사유 재산 인정 등이 미국과 다른 복잡한 체계를 갖고 있었다.

가장 큰 문제는 오락실 사용권(영화에서는 아케이드 사용권으로 표현되었다.)을 케빈 맥스웰에게 구입했지만, 그는 갑자기 배신하여 닌텐도의 경쟁사인 세가에 판권을 넘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행크 로저스는 직접 소련으로 찾아가 테트리스의 휴대용 게임기 저작권을 확보해야만 했다. 당시는 소련에 입국조차 힘들었다. 이곳에서 사업적 활동을 하다가 그는 신변의 큰 위협을 받기도 했지만, 소련의 게임 개발자를 직접 만나서 여러 가지 오해와 위협을 극복하며 서로의 믿음과 우정을 쌓게 된다. 이 덕에 <테트리스>는 전 세계에 출시될 수 있었다.

닌텐도 게임기와 세가의 아케이드 모형의 게임기 모두를 가지고 있는 내겐 엄청 중요한 역사였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게임이기에 이 영화에 몰입하여 세계사를 공부하듯 영화를 보았고, 굉장한 재미를 느꼈다.


소련의 원개발자인 알렉세이 파지노프와 이 게임의 진가를 알아보고 세계에 유통시키고자 한 행크 로저스의 대화는 짜릿했다. 마치 커다란 프로젝트의 프로그램 개발자들의 회의 같았고, 협업의 중요성을 느끼게 해 주었다. 개발자인 알렉세이 파지노프는 파스칼과 어셈블러 베이직의 힘에 대해 이야기한다. 요즘 유행하는 프로그래밍 언어가 아닌 고전 프로그램 언어에 대해 새삼 그 가치를 느꼈다.

개발자의 PC  속 원본 프로그램을 통해 테트리스를 시연해 보고, 행크 로저스가 조언을 한다.

블록 쌓기를 4줄씩 사라지게 하고 레벨 업에 점수를 더하자고 말하자, 알렉세이 파지노프는 그 자리에서 프로그램을 수정한다. 이런 과정 덕분에 테트리스 게임에서 긴 막대를 세로로 세워 넣어서 한 번에 4줄이 사라질 때의 짜릿함을 느낄 수 있다는 사실에 전율이 느껴졌다. 클라이언트의 요구를 정확히 분석하고 즉시 수정하는 프로그래밍 과정에 소름이 돕고 경이로웠다.


알렉세이 파지노프가 한 말 중에 나에게 와닿은 명대사가 나온다.

" 인생은 고되지만 작은 승리는 받아 마땅하죠!!"

그래 맞다!! 이것이 게임을 하는 이유이다!

난 이 말을 듣고서야, 오래전 게임을 좋아하던 내게 면죄부를 주는 느낌이 들었다. 엄마 몰래 오락실을 갔을 때의 죄책감을 비로소 씻는 듯했다.


세가의 판권을 잃었어도, 닌텐도에 테트리스를 탑재하기 위해 인생을 건 행크 로저스의 행보는 지금 이 시점에서 돌아보니 정확한 판단이었다. 오락실은 거의 사라졌지만, 집집마다 휴대용 게임기는 가지고 있는 시대가 되었다. 열정과 확신을 가지고 도전했고, 시대를 앞서 내다보았기에 그의 성공이 가능했던 것 같다.

이젠 아쉽게도 오락실을 찾기가 어렵다. 그 커다란 오락실 아케이드 앞에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인생의 작은 승리를 맛보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그 시절이 문득 그리워진다.


영화 속에 나오는 코카콜라, 디스코장, 리바이스 청바지, 경쾌한 음악 모두가 억압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상징적 장치로 다가왔다.


목숨을 걸고 우정을 나누었던 개발자와 판매자가 마지막 나눈 인사가 머리에 맴돈다.

" 이건 작별 인사가 아니에요. 약속해요. 그 단어 싫어하는 것 알아요."

이 인사를 나눌 때만 해도, 소련과 미국의 냉전 시대에서 이들이 다시 만나 역사에 남는 동업을 하게 될 줄은 몰랐다.

그러나, 그야말로 영화 같은 일이 일어났고, 행크 로저스는 작별 인사가 아닌 약속을 지킬 수 있었다. 이 둘은 미국에서 함께 사업을 하였고, 테트리스는 전 세계 5억 개가 넘는 판매량을 기록한 역사상 가장 유명한 게임 중 하나가 되었다.


이 영화에서는 게임 마니아들을 위한 세심한 연출 배려가 좋았다.

영화의 엔딩 장면에서 마지막 실제 인물들을 타자체로 타입핑하듯 설명해 주는 장면,

영화의 내용을 설명할 때 게임 캐릭터들에 비유하여 상황을 전달하는 점(이를테면, 파트너를 설명하는 장면에서 마리오와 루이지, 젤다 링크와 마이크 타이슨의 비유)

게임 용어(게임 오버, 플레이어, 스테이지 등)로 현실의 상황을 대입하여 설명하는 점,

슈퍼마리오 게임에서 피라냐 식물이 나타나서 불꽃을 쏘는 장면으로 현실의 우발적 상황을 빗대어 설명하는 점 등은 게임 마니아들에게 영화 속 숨은 그림 찾기처럼 즐거움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이제야 테트리스 게임에서 질 것 같은 기운이 감돌 때 등장하는 러시아인의 정체도 이해가 된다. 그 러시아인이 춤출 때 나오는 테트리스 음악의 경쾌함은 게임을 할 때는 곧 죽을지 모른다는 초긴장에 이르게 했다. 이 음악은 많은 음악인들이 색다른 연주곡으로 만들어서 여러 버전을 들어보곤 했다.


영화와 게임을 좋아하고, 프로그래밍을 해 본 사람이라면 백 퍼센트 열광할 영화라 여긴다.

이 영화를 통해 인생의 즐거웠던 취미와 그 시절을 회상할 수 있었고, 오래간만에 나의 게임기들을 꺼내보게 되었다.

그 시절 그 모든 것들은 아마도 열정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임을 깨달았다.

문득, 앞으로 나이가 들어도 이런 즐거움과 열정 거리를 놓치고 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인생은 고되지만, 게임을 통해 작은 승리를 맛보고 싶어 진다. 비록 수많은 실패를 딛고 얻은 작은 승리일지라도..

이젠 게임에서가 아닌 또 다른 승리를 맛볼 수 있는 것들을 시도해보고 싶다. 또다시 실패하고 승리하고, 이 작은 승리의 경험이 뭉쳐져 성공을 맛보는 날이 언젠가 올 거라 믿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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