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 와일드
< 와일드, 리즈 위더스푼 주연, 미국 실화, 2015 >
인생에서 길을 잃었을 때, 모든 것을 포기하려는 순간의 누군가가 이 영화를 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당장 무작정 떠날 수 없을지라도, 적어도 운동화를 신고 햇빛을 마주할 수 있는 계기가 되어줄 영화로 추천하고 싶다. 그리 힘든 상황에서 이 영화를 보라고 권하는 것이 잔인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볼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세릴은 가난하고 폭력적인 가정에서 자라난 어린 시절 악몽을 겪고 필사적으로 벗어나기 위해 애썼다. 친구처럼 의지하고 유일한 안식처였던 엄마는 이제 조금 살만해진 어느 날, 암선고를 받는다.
세릴은 남편의 폭력을 견디다 못해 이혼한 엄마, 남동생과 함께 살았다. 가난하지만 열심히 살며 바로소 보통의 삶을 살아가나 싶었다. 그녀의 엄마는 힘든 가정사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에게 따뜻하고 행복한 기억으로 그들의 불행을 치유해 주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었다. 불행하고 힘든 상황에서도 늘 밝고 긍정적이며, 남편을 원망하기보다 남매를 얻은 결혼 생활이었음에 초점을 맞추고 아빠를 원망하는 아이들을 보듬어주는 엄마였다.
학업과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며 늦깎이 대학생이 된 엄마와 함께 학교를 다닌다. 이런 일상의 소소한 행복이 모두 무너져버렸다. 엄마의 죽음과 함께...
그녀의 깊은 방황이 시작되었다.
하룻밤을 보내는 문란한 성생활, 마약 등을 서슴지 않으며 삶을 놓아버린 그녀는 이혼 후 모든 것을 잃고 주저앉아 버린다. 엄마의 죽음 이후로 몇 년간 헤매던 그녀가 드디어 엄마가 언젠가 말씀하신 자신의 최고의 모습을 만나기 위해 길을 떠나기로 어려운 결심을 한다.
PCT 트래킹을 떠나다..
그녀가 길을 떠난 퍼시픽 크래스트 트레일에 대해 찾아보니, 4,318km의 백패킹 코스이다. 이런 길을 그녀는 약 3개월을 예상하고 길을 떠난다. 처음엔 어마어마한 짐을 혼자서 짊어지기도 버거운 상태에서 위태롭게 떠난다. 과연 그녀가 이 여정을 마칠 수 있을지 출발부터 불안해 보였다.
이 여정은 생각보다 위험하고, 험난했다.
그러나, 그녀는 여러 위험 못지않게 도움도 받아가며 결국은 이 길을 완주한다.
혼자서 이 길을 걸으며 과거의 그의 삶을 끊임없이 들여다보며 마주하고 싶지 않은 과거를 적나라하게 살펴본다. 무작정 걸어 나가며 지독한 고독, 회상, 자책, 두려움, 불안, 위험과 마주한다. 예상치 못한 갖은 어려움들을 만나며 종주를 포기해야 할 순간도 마주하지만, 결국은 완주하며 얻은 깨달음의 과정이 영화로 만들어졌다.
<금발이 너무해>의 깜찍 발랄한 리즈 위더스푼은 여배우로서 그야말로 모든 것을 내던지고 이 영화를 찍었다. 한번씩 샤워를 할 때 검은 물이 흐르는 장면, 망가진 발톱을 뽑아내는 장면, 등산화가 산아래로 굴러 떨어져서 비명과 욕이 터져 나오는 장면, 슬리퍼로 간신히 신발을 만들어 걷는 장면, 초반에 어설픈 준비로 인해 생존을 위해 찬음식만 먹는 장면 등은 백패킹 영화를 실감 나게 해 주었다. 내가 좋아하는 <캐스트 어웨이>의 톰행크스가 떠오르기도 했다.
이 영화는 미국의 작가 세릴 스트레이드의 자전적 소설인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영화이다. 영화를 보면서 함께 주인공의 인생에 빠져들며 고뇌하고, 90여 일 동안 이 험한 길을 걸으며 트레킹 한 기분이 들어서 관람 직후 매우 에너지가 소비되는 느낌에 맥이 다 빠졌다. 그만큼 영화 속의 장면, 대사, 인물들에 몰입했던 것 같다.
그 엄청난 길을 걸어온 종착점에서 그녀가 말한다.
예상한 일에도 완벽한 대비는 불가능하다!
영화의 마지막 나래이션이 내내 머리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인생에서 뜻하지 않은 불행들로 고통받은 그녀는 자신의 불행에 잠식되지 않고 그 늪을 자기 발로 걷고 또 걸어서 기어코 빠져나왔다.
예상한 일에도 대비가 어려울 수 있는데, 하물며 원치 않은 불행 앞에서 무너진 자신을 더 이상 자책하지 않게 되었다. 비록 이 여행이 끝나면 수중에 단돈 20센트로 시작되어야 하는 삶이지만, 기꺼이 살아나갈 용기를 얻는다.
영화를 보고 나서, PCT 트레킹 여정에 대해 검색해 보았다.
나 역시 올레길, 산티아고 순례길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 있었다. 영화를 보니, 이런 길은 PCT 트레킹에 비하면 동네 산책길 수준으로 여겨지기까지 했다. 과연 나라면 세릴처럼 그 길을 혼자서 종주할 수 있을지에 대해 심각하게 하루 정도 고민하긴 했다. 영화에서 이 길을 완주하는데 90여 일이 좀 넘었다는데, 커다란 백팩을 무장하고 하루 거의 50킬로의 길을 걷는 것이 가능한지 깊게 생각했다. 숲 속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상황에서 그 긴 시간 동안 혼자서 걸어 나갈 수 있는지 생각해 보니 심각해졌다. 친구들과 언젠가 순례길을 한 번 가보자고 약속 아닌 약속을 했던 것이 섣불리 말한 것은 아닌지에 대해서도 진지해졌다.
이런 거창한 여정은 아니지만 언젠가 내 삶의 좌표를 잃어버렸을 때, 나 또한 무작정 걸었던 경험이 있다. 그 당시 사는 것에 대해 어떤 의욕조차도 없던 내가 어느 날 더 이상 이리 살지 말고 뭐라도 해봐야 하겠다는 생각을 문득 하게 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 생각이 들었던 것이 참 다행이고 고맙다. 당시에는 아무 생각 없이 그저 몸을 힘들게 해서라도 잠을 좀 제대로 자보고 싶었다. 걷고 또 걷는 동안 서서히 내 마음과 몸이 회복되었음을 한참을 지나고 나서야 깨달았다. 그때의 귀중한 경험으로 인해 지금도 조금 힘든 일이 생기면, 우선 걸으러 나간다. 좀 여유가 되면 산에 가기도 하고, 무언가 거창한 깨달음이 아니라도 길을 나선 것 자체로 위로를 얻는다. 이젠 꼭 힘든 일이 아니어도 걷는 것만으로 편안함에 이르를 때가 있다.
영화 속에 주옥같은 대사들이 나온다.
" 뭘 선택하든 자책하지 말아요. 여기까지 온 것도 대단한 거니까."
" 내 인생도 모두의 인생처럼, 신비롭고 돌이킬 수 없고 고귀한 존재다"
이 세상 모든 이에게 누군가 위로를 전하는 말처럼 들렸다.
영화 속 지혜로운 엄마에게서 배우게 된다.
엄마 : 네게 가르칠 게 딱 하나 있다면, 네 최고의 모습을 찾으라는 거야. 그 모습을 찾으면 어떻게든 지켜내고...
딸 : 그래서 엄마는 이게 최고의 모습이야?
엄마 : 노력 중이야...
엄마의 노력 중이라는 그 말이 참 와닿았다. 나도 살아가는 동안, 이 노력에 대해 게을리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릴의 힘든 여정의 숲 길에서 몇 번을 마주하는 여우가 등장한다. 여행의 끝에 배웅을 해주고 떠나는 모습을 보면서 엄마가 떠올랐다.
여정 끝에 우연히 만난 할머니와 손자에게 위로를 건네는 그녀를 보면서, 자신의 상처를 보듬고 다른 사람의 아픔도 살펴볼 만큼 성장한 그녀를 만날 수 있었다. 비로소 그녀에게 마음이 놓였다.
일출과 일몰은 매일 있으니까, 네가 맘만 먹으면 볼 수 있어. 너도 아름다움의 길에 들어설 수 있어.
엄마의 유언과 같은 이 가르침을 딸이 길을 걸으며 비로소 깨닫게 되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그 장면의 그 석양을 바라보며 나도 그 공간에서 커피 한잔을 마시고 싶은 간절함이 생겼다.
주인공 세릴 덕분에 세릴이 힘겹게 얻어낸 깨달음을 함께 생각해 볼 수 있어서 고맙고,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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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의 황야에서 자신을 잃어버린 후에야 숲에서 빠져나오는 길을 찾아냈다.
종착점에 닿기 전까지 어딘지도 모르고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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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이 되느니 망치가 되겠다. 몸이 그댈 거부하면 몸을 초월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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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겐 지켜야 할 약속과 잠들기 전 가야 할 길이 있다.
예상한 일에도 완벽한 대비는 불가능하다.
죽기 전 이 길을 걸어볼 기회가 되면 좋겠지만, 힘든 누군가 이 영화 한 편으로 인해 무거운 몸을 일으켜 어려운 한걸음을 내딛길 조심스럽게 바라본다. 엄청난 배낭의 무게보다 삶의 무게를 견디기 힘들 때, 한 번뿐인 소중한 인생에서 나 자신을 믿고 손을 내밀어줘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