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조직개편후업무에서 활력을 느끼지 못했던 나는 이직을 마음먹었다. 십여년의 경력은 1차 면접을무난히통과시켜주었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이제 기업으로 돌아갈수 없는 건가 초조했고 좌절스러웠다. 마음이타들어갔다.
그 즈음 사회복지학 전공의 《상담심리》수업을들었다. 기말 과제가 상담심리 이론틀로 자신의 문제를 진단하는 '개인성찰보고서' 에세이였는데, 처음으로 나의 ‘이직’ 행위가퇴행이나 비합리적인 사고일 수있음을알게 되었다.
이직은 문제적 행동일까?
상담심리 접근법으로 바라보면 이직은 정서나 인지적 문제라기 보다는 행동으로 분류가 될 것 같았다. 기저로 탐색해 들어가면 정서나 인지적 문제가 있을 수도 있겠지만, 일단 이직 자체가 문제적 행동인지를 점검해야 했다.
프로이트 정신분석의 ‘자아방어기제’를 살펴보니 이직은 일단 행동화와 분리에 해당되는 것으로 보였다. ‘행동화’에 비추어 보면 나의 이직은 중간단계 없이 충동적이어야 한다. 하지만 가장 충동적이었던 첫 직장 퇴사는 4년반을 다닌 후에 이루어졌고, 그마저도 한 차례의 사표 반려와 상담이 있었다. 두 번째 직장은 6년반을 다닌 후에 결정되었다. 그 때는 관리자급이었기 때문에1년 가까이 팀장과 고민을 나누었다. 때문에 ‘행동화’로 포섭하기에는 무리가 있는 듯 했다.
그렇다면 ‘분리’로 설명될 수 있을까? 프로이트에 따르면 분리는 하나의 대상을 선악이라는 극단으로 나누어 바라보아야 한다. 다양한 스펙트럼과 변화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것인데, 초기 이직은 확실히 이로 해석될 수 있는 부분이 있겠지만 두 번째부터는 설명되기 어려웠다. 줄곧 비슷한 업무를 했지만 첫 직장은 외국계 대행사, 두 번째는 대기업, 그리고 고민 당시에는NGO라 직장에 대한 스펙트럼이 넓어졌기 때문이다. 스펙트럼이 넓어지면서 다른 곳도 별반 다르지 않다는 생각도 커졌으니, 분리로도 설명되기 어렵겠다.
그러다 ‘퇴행’에 눈길이 갔다.
프로이트는 퇴행을 이전 발달 단계로 되돌아감으로써 현재 불안이나 책임을 회피하려는 것으로 정의했다. 나는 불안보다도 ‘책임’에 더 시선이 갔다.
어쩌면 40대의 관리자의 역할을 받아들여야 하는 내가 계속 30대의 실무자의 역할로 되돌아가려는 퇴행이 있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하지만 프로이트의 심리성적 발달단계로는 현재의 내가 어느 단계로 돌아가려 하는지가 이해되지 않았다. 이것을 구강기나 항문기, 또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로 분석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은 것 같았다.
프로이트보다는 에릭슨의 심리사회적 발달단계가 더 적절한 설명틀을 제공했다. 에릭슨에 따르면 성인중기(35-60세)는 자아가 '생산성'을 추구하는데, 이것이 충족되지 못하거나 좌절되면 무관심이나 무감동이 동반되는 침체감을 위기로 겪게 된다고 한다. 이 단계에서 말하는 '생산성'이란 단순히 직업적인 생산성이 아니라, 가족, 여가, 지역사회 등 보다 넓은 공간적 의미에서의 생산성을 뜻하며, 자신을 넘어 타인의 성장을 지원하는 경지까지 포괄한다고 한다.
돌아보면, 처음으로팀장이 됐고처음으로 팀원을 채용해 함께 일한 시기였다. 독립 부서였던 팀이 더 큰 부서로 통합되면서 그 과정에서 역할과 책임이 많이 혼란스러웠다. 나는 팀을 성장시키지도, 팀원을 성장시키지도 못했다고 생각했다. 그러한 불안함은 팀원과 주변에도 많이 전달되었다. 어쩌면 개인이 아닌 부서 차원에서, 나아가 단체 차원에서의 생산성을 고민해야 할 때 그러지 못한 것이 내게는 가장 큰 위기가 아니었나 싶었다.
에릭슨에 따르면 이전 단계는 성인초기(18-35세)로 자아가 친밀감을 추구하는 단계이다. 내 경우는 이전 단계인 성인초기 단계로 퇴행하지는 않았더라도 '생산성'의 대상과 범위를 넓혀야 할 시점에 좁은 의미의 생산성에 갇혀 있었던 것이 큰 이유가 아니었을까 싶었다.
생산성에 대한 신념이 잘못된 것은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내 어려움은 어떻게 개선될 수 있을까? 역할과 책임을 받아들이지 못해 대안으로 이직을 하려는 것이 문제적 행동에 가깝다고 한다면, 그것은 그저 관리자의 역할과 책임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해결되는 것일까? 여기부터는 인지행동치료의 도움을 받아야 할 것 같았다.
인지행동치료는 이직과 같은 부적응적 행동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비생산적이거나 무력한 생각 패턴을 바꾸면 된다고 한다. 그 중 엘리스의 성격이론은 비합리적인 신념이나 비합리적인 사고가 비합리적인 해석을 하면서 정서적 행동적 문제를 일으킨다고 한다. 그렇다면 나는 일이나 직장, 또는 생산성에 대해 잘못된 신념이나 사고를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비합리적인 신념이나 사고가 나의 직장 생활에 대한 만족감을 떨어뜨리고 이직을 추동하는건 아닐까?
나는 첫 직장(대행사)에서혹독하게 일을 배웠다. 3~4개 고객사에게 일상적 서비스를 제공하면서 1~2개의 프로젝트를 수행했다. 2년차에 접어들었을 때는 9시에 출근해서 새벽 1~2시에 퇴근하는게 다반사였다. 11시까지 야근하고 2시까지 동료들과 술마시며 고된 하루를 푸는 일과였다. 결과물을 만들어 내는 건 기본이었고 늘 동료들과 새로운 것을 실험하고 도전했다. 첫 직장은 일과 놀이의 중간에 위치했다.
두 번째 직장으로 이직했을 때 내게는 ‘세 개의 배터리’라는 이미지로 업무 로드를 평가하기 시작했다. 이를 테면 “첫 직장에서 세 개의 배터리로 일했다면, 지금은 두 개 정도 쓰고 있어”라는 식으로 업무량이나 난이도를 재단하는 것이었다. 두 번째 직장도 거의 세 개의 배터리를 사용했다. 저녁에는 기자들과 술을 마시고, 주말에도 간혹 출근하거나 골프를 나가기도 했다.
그 때는 그게 가능했다. 첫 직장은 싱글이었고, 두 번째 직장은 결혼은 했지만 각자 일을 했다. 아이가 걸음마를 떼고 어린이집에 갈 때까지의 비교적 개인 중심의 생활 패턴이 가능했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어느덧 아이는 초등학생으로 성장했고, 아내도 자신의 사업 기반을 갖추었다. 외부 환경이 변했다. 그 변화에 맞춰 나는 자연히 세 개 중 하나의 배터리는 가족에게 떼어주어야 하는 일상으로 진입했다.
일, 직장, 생산성
일이란 무엇일까? 직장이란 무엇일까? 생산성이란 무엇일까? 30대라면 이 질문에 앞에서부터 대답했을 테다. 하지만 40대 가장의 나는 뒤에서부터 대답해 나가야 할 것 같다.
먼저 생산성을 확장하지 말고 명료하게 한정해야 할 것 같다. 이에 나는 생산성을 ‘타인을 돕고 스스로의 생계를 부양할 수 있는 역량’으로 정의하려 한다. 이어서 직장을 ‘우리에게 소중한 세계를 함께 지키고 발전시는 공동 생산 현장’으로 바라보고자 한다. 끝으로, 일은 좀더 가볍고 자유롭게 풀어주려고 한다. 이제부터 내게 일이란 ‘내게 소중한 세계를 지킬 수 있는 말과 행위’이다.
결국 나의 자아는 새로운 외부 환경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불안이나 책임에서 또다시 도망치려 할 테다. 40대에도 이직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단 30대처럼 도전과 성장이라는 깃발 아래로는 어렵다. 내부적으로도 외부적으로도 말이다. 생산성을 명확하게 한다면, 직장은 더 드라이해질 수 있다. 그러면 기본적이고 필수적인 생산성 기준 위에서 좀더 자유롭게 일하고, 좀더 느긋하고 포용적으로 직장 생활을 풀어갈 수 있을 것이다. 뜨거웠던 시절의 신념과 사고는 그 시절에는 맞았겠지만, 지금은 비합리적이게 되었음을 받아들이고 현재 상황에 맞는 신념과 사고를 부팅해야겠다.
에세이를 쓰고 나니 개운했다. 해탈의 경지에 도달했달까. 그래 관리자건 뭐건 받아들이자. 더이상 일따위에 휘둘리지 말자... 마음을 내려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