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무모한 여름의 시작

Reading Festival

by every summer





무모한 여름의 시작


서른 살 봄이었다. 이제껏 살면서 한 번도 한국을 벗어나 본 적이 없었다. 해외는커녕 제주도도 가본 적이 없었다. 나는 비행기조차 타본 적이 없었던, 늘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것이 두려웠던 사람이었다. 누구보다 소심하고 걱정을 이고 지고 살던 내가 단 한 번에 여행을 결심하기란 쉽지 않았다. 그동안 늘 여행을 꿈꾸기만 했지, 추진력이 턱없이 부족했던 나는 공항이란 곳과는 거리가 먼 채로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글라스톤베리’라는 글자를 알게 됐다. 나는 그곳의 사진을 보는 것만으로도 큰 충격을 받았다. 지금까지 가봤던 한국 페스티벌의 몇 십배는 되어 보이는 광활한 대지가 눈에 들어왔다. 정말 저게 다 페스티벌이라고? 저 점 같은 것이 모두 사람이란 말이야? 멈춰있는 사진 속에서 조차 자유로움을 내뿜는 사람들, 해 질 녘 나부끼는 수천 개의 깃발들, 끝이 없어 보이는 텐트촌...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는 그 사진들을 보고 또 봤다.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다. 그 어떤 아름다운 여행지의 사진을 보고도 마음이 동하지 않던 나는 글라스톤베리의 사진 몇 장으로 영국으로 날아가는 비행기를 타는 구체적인 그림을 그리게 됐다. 이제는 정말로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새로운 세계로 한 발 내딛을 때였다.



글라스톤베리는 매년 6월 말 영국 서머싯 주 필턴에서 열린다. 내가 떠나야겠다는 결심을 한 건 4월 말이었다. 지금부터 준비하면 갈 수 있겠지! 라며 호기롭게 알아보기 시작했다. 그러나 글라스톤베리의 티켓은 전년도 10월에 티켓팅을 하고 보통 몇십 분 만에 135,000장이 매진이 된다는 것. 맙소사. 그다음 해 4월 초에 취소표를 구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지만 이미 끝나버린 후였다. 나만 빼고 이렇게 다 부지런하게 살고 있었던 거야? 그해에 글라스톤베리에 갈 방법은 죽었다 깨어나도 사실상 없었다. 생각보다 더 대단한 곳 이잖아? 점점 가고 싶은 욕망은 집착으로 변했고, 반드시 언젠가는 꼭 가야겠다고 더 심한 다짐을 했다.


그렇다면 그 언젠가 가게 될 글라스톤베리를 위해 미리 영국에 가보는 건 어떨까? 어차피 가야 할 영국인데 미리 시험 삼아 가보면 좋지 않을까? 영국에서 열리는 다른 페스티벌은 어떤 게 있는지 검색하기 시작했다. 영국은커녕 해외 페스티벌에 대한 지식이 전무했던 나는 모든 것이 낯설 뿐이었다. 수많은 검색 끝에 7월에 스코틀랜드에서 열리는 티 인 더 파크(T in the park)와 8월에 열리는 레딩(Reading) & 리즈(Leeds) 페스티벌이 눈에 들어왔다. 바다를 건너본 적 없는 여행 무식자 단계였기에 일단 접근성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당시 같이 갈 사람 조차 없는 혈혈단신이었기에 더욱 그러했다. 런던에서 기차로 40분 거리에 있다는 레딩 페스티벌이 그나마 쉬울 것 같았다. 런던이야 비행기 타면 한 번에 가고 거기서 기차만 타면 되는 거잖아? 갑자기 근거 없는 용기가 마구 솟아났다. 8월 말이었기에 준비할 시간도 충분했다. 그래 일단 레딩에 먼저 가서 글라스톤베리를 위한 연습을 해보자.




Do you remember the first time?


1961년 영국 버크셔 주의 레딩에서 시작된 레딩 페스티벌은 현존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음악 축제다. 매년 8월 마지막 주말 뱅크 홀리데이에 3일간 열린다. 여름의 끝자락, 페스티벌 시즌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페스티벌로 같은 기간 열리는 리즈 페스티벌과 라인업을 공유한다. 록, 펑크록, 헤비메탈 위주의 라인업으로 다른 어떤 페스티벌보다 10대들이 유독 많이 오고 와일드한 분위기로 유명하다. 유튜브엔 텐트에 불을 지르고 목마를 태우는 걸 넘어서 천에 사람을 태우고 집어던지는 영상이 수두룩했다. 이미 레딩을 경험한 친구는 나에게 술에 취해 그 과격한 곳에 정말 혼자 괜찮겠냐고 거의 울먹이며 걱정했다. 첫 해외 페스티벌, 심지어 첫 해외여행을 너무 격정적인 곳을 선택한 것일까? 그것도 혼자? 내가 이렇게 무모한 사람이었던가. 날짜가 다가올수록 설렘이 두려움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하지만 라인업을 볼 때마다, 그 노래들을 미리 들어볼 때만큼은 모든 걱정은 잠시 사라졌다. 펄프, 더 스트록스, 뮤즈, 내셔널, 엘보우, 프렌들리 파이어스, 백신즈, 패닉 앳 더 디스코! 평생 방구석 리스너였던 내가 이 밴드들을 직접 보기 위해 떠난 다는 게 믿기질 않았다. 특히 펄프(Pulp)의 <디퍼런트 클래스> 앨범을 듣고 또 들었다. '커먼 피플'을, '디스코 2000'을 정말 라이브로 들을 수 있다고!!



처음엔 휴가가 짧으니 페스티벌 전체 일정인 3일 전부는 힘들 것 같고, 펄프가 나오는 토요일 하루만 볼 생각이었다. 처음이라 뭘 몰라서 했던 선택이었다. (단호하게, 거기까진 간 이상 무리해서라도 3일 전부 봐야 한다.) 다행히 준비하다 보니 욕심이 나서 결국 토요일에 이어 일요일 티켓까지 예매했다. 그러나 이미 일요일 티켓은 매진된 상태였기에 비아고고(Viagogo) 사이트(티켓 중고거래 사이트)에서 정가보다 좀 더 비싸게 구매했다. 토요일 티켓은 현장 수령이었고 일요일 티켓은 영국에서 집까지 배송을 받았다. 배송을 받은 날은 마침 3일간의 지산 록 페스티벌이 끝나고 집에 돌아온 날이었다. 아직 지산의 락 스피릿 충만한 기운이 가시기도 전에 레딩의 키 컬러인 샛노란색 티켓을 보니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상상으로만 존재하던 어떤 것이 실물로 손에 쥐어지니 가슴이 벅차올랐다. 이미 레딩에 도착해 펄프가 눈 앞에 있는 기분이 들었다.





♬ 함께 들으면 좋을 음악

Pulp - Do you remember the first time?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