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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그린 Mar 20. 2023

오직 다정함으로만 싸우는 법

내 기준 최고의 남주, 영화 '에에올'의 웨이먼드

저번주부터 "내 기준 최고의 남주"라는 부제를 가진 에에올에 대한 글을 쓰고 있었는데, 그동안 실제로 남주인 웨이머드를 연기한 키 호이 콴이 이 영화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탔다. 오랜 휴식기 끝에 스크린으로 돌아온 키 호이 콴 배우를 응원한다 :)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에에올)에 대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웨이먼드와 백조의 공통점


에에올에 등장하는 웨이먼드는 참 세상물정을 모르는 것 같은 나이브한 사람으로 그려진다.

웨이먼드와 그의 부인인 에블린은 함께 미국에서 세탁소를 운영하고 있는데, 부인인 에블린이 온통 바쁘게 세탁소 운영을 위해 뛰어다닐 동안 웨이몬드는 한가하게 손님과 장난을 치고 있다.


한편, 에블린은 본인이 실제로 살고 있는 현실 외에 다양한 세계관 기반의 현실 세계의 종합체인 멀티버스라는 개념이 존재함을 알게 된다. 그리고 아무것도 의미가 없다는 허무주의라는 사상을 가진 조부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멀티버스를 파괴시키고자 하는 악의 세력과 싸우게 된다. 에블린이 악의 세력들과 현란한 몸싸움을 벌이는데, 웨이먼드는 영화 후반까지 옆에서 별 도움이 되지 못한다. 그러나 후반부에 들어서면서 에블린이 점점 악의 세력들과의 싸움에서 지게 되고, 위기에 빠지게 된다.


이 때, 웨이먼드는 에블린에게 새로운 싸움의 방식을 알려준다. 바로 다정함으로 싸우는 방식 말이다.

웨이먼드는 말한다.


내가 나약하다 생각하지?
당신이 그랬지. 세상은 잔인하고 우린 쳇바퀴 돌듯 살 뿐이라고.
나도 알아. 나도 당신만큼 살만큼 살았어.
내가 늘 세상을 밝게 보는 건 순진해서가 아니야.
전략적으로도 필요하기 때문이지. 난 그런 방법으로 살아남았어.
당신은 자신을 투사로 여기잖아. 나도 나를 그렇게 생각해. 이게 내가 싸우는 방식이야.


인생을 다정하고 친절하게 살아가는 것은 사실은 정말 많은 에너지와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다정한 사람은 백조와도 같다. 겉보기에는 우아하고 차분하지만 사실은 물밑 아래로 엄청난 발길질을 하고 있다.

계획한대로 술술 풀리는 인생은 그 어디에도 없다. 예기치 못한 작고 큰 위기 상황을 마주하며 우리는 에에올의 조부처럼 허무주의 또는 냉소주의에 빠지기 쉽다. 또는 그저 챗바퀴 돌듯 돌아가는 일상에 몸을 맡기고, 의도한 다정함 없이 그저 무심하게 인생을 살아가기가 쉽다.


따라서 다정하기를 선택하는 사람은 마치 투사와도 같다. 웨이먼드는 바로 그런 지점을 얘기한다. 에블린이 열심히 본인의 방식대로 싸우고 있는 동안, 웨이먼드는 웨이먼드의 방식대로 싸우고 있었다는 것. 마치 백조처럼 말이다. 웨이먼드가 바쁜 와중에 손님과 장난을 치고 손님의 농담에 웃어주는 건 그가 사업 운영에 관심이 없어서가 아니다. 그는 그저 다정한 세탁소집 주인으로서 손님들에게 부지런히 따뜻함을 흘려보내는 중이었던 것이다.


왓챠플레이,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왓챠플레이,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실제로 웨이먼드의 다정함은 위기의 순간에서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다정함을 기반으로 한 진심어린 소통 방식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 위기를 모면할 수 있는 힘이 있는데, 웨이먼드는 영화에서 그걸 2번이나 증명해낸다.


위기의 순간 1.


미국 국세청인 IRS를 방문했을 때, 제출한 서류를 문제삼으며 심각한 법적 이슈가 생길 수 있다는 직원 디어드리에게 정말 실수였다고 얘기하며 아주 귀엽게 생긴 스마일리 쿠키를 건네준다.


보통 이 대목에서 생각할 것이다. "갑자기 웬 쿠키?"


그러나 웨이먼드의 접근 방식은 효과적이다. 디어드리는 잘못을 솔직하게 인정하며 실수였다고 하는 웨이먼드에게 마음이 움직여 시간을 더 주게 된다. 그리고 솔직히, 누가 그렇게 귀엽게 생긴 쿠키를 마다하는가?


왓챠플레이,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위기의 순간 2.


한번 더 시간을 더 줬음에도 불구하고, 허무주의에 빠진 에블린이 서류를 시간 내 제출하지 않아 디어드리가 세탁소를 압류하기 위해 직접 방문하게 된다. 이때 에블린은 오히려 깽판을 치는데, 웨이먼드가 놀랍게도 또 한번 제출 기한을 연장시키는데 성공한다.


웨이먼드는 디어드리에게 왜 시간을 줘야 하는지 논리적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협박을 하거나 뇌물을 주지도 않는다. 또는 여느 액션영화에서 나오는 것처럼 디어드리와 디어드리가 데려온 경비들을 상대로 10:1 싸움을 해서 이기지도 않는다.


다만, 현재 본인이 에블린에게 이혼을 통보한 상태이고, 그래서 에블린이 마음이 몹시 힘든 상태임을 얘기하여 디어드리의 마음을 움직인다.

웨이먼드의 접근 방식은 너무너무 단순하다. 일단 에블린과 본인의 잘못을 겸허하게 인정한다. 그리고 상대에게 본인의 입장을 이해시키기 위해 지극히 개인적 상황, aka 에블린과 웨이먼드 부부의 취약점을 드러낸다. 너무 단순하지만, 취약점을 드러내놓고 사과를 하는 이러한 진실된 태도는 분명 용기를 필요로 한다.


빛나는 하남자 캐릭터, 웨이먼드


웨이먼드가 특히나 더 매력적인 이유는 웨이먼드가 흔히 접하기 어려운 남성 캐릭터라는 데에 있다.

에에올과 같은 할리우드 영화 (또는 대부분의 문화권의 영화에서) 에서 주로 그려지는 남자 주인공의 캐릭터는 alpha male, 즉 상남자이다.

상남자는 강인하고 쿨하다. 상남자였으면 모든 악의 세력을 대상으로 싸움으로 한방에 이겼을 것이다. 멋진 액션 신이 연출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웨이먼드는 beta male, 즉 하남자이다. 웨이먼드는 남성 호르몬을 뿜뿜하는 괴력을 가진 사나이가 아니다. 그저 마음이 따뜻하고 에블린을 진정으로 사랑해주는 남자일 뿐이다. 에블린은 아메리칸 드림을 품고 먼 미국 땅으로 웨이먼드를 따라 이민을 왔다. 그리고 웨이먼드와 함께 세탁소를 차렸고, 세금 문제를 포함한 많은 골칫덩어리들을 처리하며 애를 먹었다. 고생도 많이 했다. 그러나 웨이먼드는 항상 에블린을 웃게 했다. 그가 일상 속에서 하는 작은 장난들과 에블린을 향해 지어주는 따스한 미소는 그녀와 함께 이국땅에서의 치열한 삶을 이겨내기 위한 그만의 방식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에블린이 웨이먼드를 안아주자 웨이먼드는 감동한 표정으로 에블린을 꼭 안는다.


그의 이러한 순수함과 따뜻함은 너무 특별하고 희귀해서 다른 어떤 상남자 캐릭터보다도 빛이 난다.


왓챠플레이,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우리 모두 (심지어는 무시무시한 국세청 직원도) 때로는 따뜻함이 필요하다


내가 이 영화에서 또 하나 인상깊게 본 장면이 있다면, 그건 바로 처음에는 빌런처럼 비춰졌던 IRS 직원 디어드리를 그저 따뜻함이 필요한 또 한명의 인간으로 그려냈다는 점이다.

디어드리가 웨이먼드의 얘기를 듣고 에블린을 또 한번 봐주기로 한 결정적인 이유는 본인이 과거에 남편에게 이혼 통보를 당한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에블린과 웨이먼드의 입장에서 디어드리는 골칫덩어리이다. 위협적인 태도로 이해도 안 되는 세금 서류들을 제출하라고 하고, 그걸 하지 않을 경우 세탁소를 압류시킬 가능성까지 있는 무시무시한 사람이다. 그러나 결국 그녀도 이혼이라는 아픔을 가지고 있는 한 명의 인간이다. IRS라는 기관에서 최선을 다해 본인의 실력을 증명해내기 위한 일을 하지만, 때로는 그저 직장에서 강압적인 태도로 사람들을 대하는 것이 힘에 부쳐 터덜터덜 집에 오는, 따뜻한 위로가 고픈 그런 인간인 것이다.


에블린과 디어드리가 사람 손가락이 소세지로 만들어진 멀티버스에서 사랑하는 사이가 되는 장면이 나온다. 발가락으로 피아노를 치는 등 굉장히 우스꽝스러운 장면이 연달아 나오지만, 이 두명의 인간이 여러 멀티버스에 걸쳐 나누는 교감이 참 사랑스러웠다.


왓챠 플레이,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손가락을 사용할 수 없어 발가락으로 눈물 닦아주는 장면)
왓챠 플레이,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디어드리 뿐 아니라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참 다양한 빌런을 만나게 된다. 그러나 그들 또한 때로는 우리의 배려와 따뜻함이 필요한 인간이라는 걸 문득 깨닫게 된다.


내가 좋아하는 보통 아저씨의 문구와 많은 이들의 마음을 울렸던 수학자 허준의 말을 인용하며 글을 끝맺어보고자 한다.


이 세상에 항상 나쁘기만한 사람은 없다. 우리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 스스로도 고통스럽다. 그러므로 적절한 대응은 냉소나 공격이 아니라, 드문 순간이나마 우리가 할 수 있는게 있다면, 사랑해주는 것뿐이다.

알랭 드 보통,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
여러 변덕스러운 우연이, 지쳐버린 타인이, 그리고 누구보다 자신이 자신에게 모질게 굴 수 있으니 마음 단단히 먹기 바랍니다.
무례와 혐오와 경쟁과 분열과 비교와 나태의 허무의 달콤함에 길들지 말길, 의미와 무의미의 온갖 폭력을 이겨내고 하루하루를 온전히 경험하길, 그 끝에서 오래 기다리고 있는 낯선 나를 아무 아쉬움 없이 맞이하길 바랍니다.
서로에게, 그리고 자신에게 친절하시길, 그리고 그 친절을 먼 미래의 우리에게 잘 전달해 주길 바랍니다.

서울대 졸업식 축사, 필즈상 수상자 수학자 허준


다정함과 친절함으로 무장한 사람들은 어려운 용기를 낸 사람들이라는 것.

다정함은 강력한 힘이 있으며 우리 모두는 삶에서 따스함과 다정함이 필요한 순간이 있다는 것.

그러기에 우리는 좀 더 용기내어 서로에게 부지런히 다정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기억했으면 좋겠다.


우리 모두의 인생엔 웨이먼드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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