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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스터Lee May 26. 2020

한국 유일의 체스키크롬로프 거주자

안녕 나의, 우리의 체스키크롬로프_ #15

  "부인, 생각해보면 우리 참 대단하다."

  "응? 왜?"

  "대한민국에서 체스키크롬로프에 5년 동안 산 유일한 부부야."

  "어휴, 그러고 보니 그러네?"

  혼돈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요즘, 마스크를 챙기고 잠시 외출을 다녀왔다. 랑금과 함께 옆 동네 체스케 부데요비체를 다녀올 일이 있어서다. 일부러 멀리 빙 돌기도 하며 바깥공기를 맘껏 마셨다. 그러다 깨달은 사실, 한국인 부부로는 유일하게 5년 동안 이곳에 뿌리내리고 거주했다는 사실. 언제였는지 기억은 안 나지만, 민간이 최초로 위성을 우주에 띄웠다는 일반인이 라디오 스타에 나온 적이 있었다. 그 사람이 떠오르며 뭔가 가슴이 뿌듯했다.

  "남들은 인정해 주지 않을지 몰라도 왠지 기분이 좋네."

  "히히, 남편이 그러면 됐지 뭐"

  체스키크롬로프 유일의 한국인 거주자로 삶을 산다는 건 특별했다. 동네를 거니는 동양인들은 수두룩 빽빽이지만 이들도 눈치가 있기 때문에, 자주 눈에 띄는 우리를 유심히 볼 수밖에 없다. 이곳 체스키크롬로프는 인구 1만 5천의 작은 마을이다. 그렇기에 한 다리 건너면 누구인지, 옆집 수저가 몇 개인지까지 알 정도로 마을 사람들끼리 몹시 친한 시골마을이다. 관공서에 가면 오랜만에 만난 사람들끼리 떠드느라 뒷사람이 기다리는 건 예삿일도 아니고, 또 기다리는 사람은 이 광경을 익숙하게 받아들이는, 그런 곳이다. 이곳에 동양 것들이 와서 산다는 건 보통 일일 수 없다.

  로컬리즘 Localism, 우리말로는 지역이기주의. 어려서부터 알고 지낸 이들의 틈을 파고들어 가까워진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곳에 살며 처음에는 밝은 모습으로 동네를 돌아다니며 인사를 하곤 했다. 어느 상점, 어느 식당을 가던 밝은 모습으로 웃으며, 가까워져 보려 했으나, 아마 이들 눈에는 잠깐 왔다가는 동양인 관광객 정도로 보인 듯하다. 퉁명스럽고 불친절한 체코인의 모습에 당황하고 실망하기도 했다. 그렇게 맘의 문을 닫고 오히려 집 밖으로 나가지 않는 상황이 생기기도 했다. 

  "부인, 이런 싹수없는 놈들 상대하지 마. 아주 후레자식이야! 쌍놈들."

  "그러게, 어쩜 저래? 참나, 아주 싸가지가 바가지야."

  아마 새로운 문화에 처음 정착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겪을 과정이라 생각한다. 익숙한 나의 문화, 나의 환경, 나의 경험으로 상대방을, 상대 문화를 바라보게 되고 나와 맞지 않은 불편한 것들이 거슬리게 되는 과정들 말이다. 마음이 넓은 사람이라면 '그럴 수도 있구나'라고 넘어갈 수 있겠지만, 적어도 난 그런 사람은 아니었던 것 같다. 체코의 역사와 문화적 배경을 알지도 못하며 이 나라와 이 나라 사람들을 나의 생각으로 재단했다. 내가 경험한 것을 일반화해서 손님들에게 말해주기도 했다. 

  이곳에 사는 유일한 한국인임을 망각하고, 어쩌면 우리가 전달하는 말이 상대방이 듣는 체스키크롬로프의 처음이자 마지막 인상이 될 수도 있다 생각지 못하고 이야기했던 적이 많다. 이곳에 사는 다른 한국인이 있다면 오해라도 풀어줄 수 있을 텐데. 핑계지만, 처음 이곳에 도착해 생활을 시작하고 몇 년 동안은 체코 최남단 민간 외교관의 역할을 한다 생각할 여유도 없었다.

  서양에서 동양인으로 산다는 건, 참 외로운 일이었다. 매일 문밖으로 나설 때면 눈에 쌍심지를 켜고 '나 만만한 사람 아니야'를 눈으로 외쳐야 했고, 한국에서 편히 길을 걷는 것과 달리 주변에 누가 있는지, 따라오는 사람은 없는지를 항상 살피고 걷는 스마트 워킹을 해야 했다. 어쩌다 학교들이 끝나는 시간에 걸어 나가야 하는 일이 생길 때면 꼭 한 번은 형, 누나 같은 짐승 같은 꼬맹쓰가 니하오 또는 치나(체코말로 중국)라는 인종차별적 멘트를 들이댔다. 괜히 앞으로 가까이 붙어 지나가는 놈들, 헤이 헤이라며 뒤에서 놀리는 것들, 이런 경험들은 나의 눈빛을 갈고닦게 해줬고 눈부시게 빛나다 못해 닿으면 살이 패일 것 같은 레이저 눈빛으로 바꾸어 주었다. 

  가뜩이나 남들보다 조금 더 발달한 듯한 본능이 더 발달하며 나를 향한 어떤 타인의 감정이 더 빨리, 더 정확하게 와닿았다. 누군가 놀릴 것 같으면 결국 놀렸고, 시비 걸 것 같으면 시비를 걸었다. 나의 레이저는 어두운 밤에도 빛을 발했고 나중에는 두려울 것이 전혀 없다 생각할 정도에 이르렀다. 그렇게 죽일 듯 눈에 힘을 주고 살기를 품고 거리를 다니니 아무도 시비를 걸지 않았다. 시비를 걸려고 준비하던 친구들도 점점 거리가 좁혀지며 서서히 빛나는 레이저를 발견하곤 주춤 거리며 멋쩍은듯 웃고 넘어갔다. 대부분 이렇게 시비를 거는 친구들은 집시로 보이는 친구들이 많았는데, 정말 나이가 어린 꼬맹이(어림잡아 초등 1학년 정도)들도 저런 걸 어디서 배웠나 싶은 행동을 할 때가 많았다. 그러다 한번, 랑금과 마을을 거닐다 쪼만한 꼬맹이가 겁도 없이 혼자 시비를 걸길래, 눈에 레이저를 켜고 슬쩍 쳐다보며 몇 걸음 다가가니 흠칫 놀라 뒷걸음질 친 적이 있었다. 꼬맹이를 겁주고도 뭔가 뿌듯했다.

  일 년에 한번 한국에 귀국해 가족, 친구들과 시간을 보냈는데 두 번째 들어갔을 때였을까, 사람들이 내 눈을 피하는 걸 느꼈다. 아차, 레이저의 부작용이었다. 불 피우는 법을 배웠지만 끄는 법을 배우지 못했던 것이다. 별일 아닐 수 있지만 생각지 못했던 일에 충격을 받고, 체코로 돌아와 불을 끄는 방법을 고민한 적이 있었다. 언젠가 외국 여행자와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는데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게 뭐라 생각하냐고 물은 적이 있다. 그 외국인은 밸런스 Balance라고 답했다. 문득 그 친구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이곳에 와서 처음 사귀게 된 현지 친구 하나 Hanah, 고등학생과 초등학생 자녀를 둔 중년의 여성이었지만, 매우 편한, 스스럼 없는 친구가 되었다. 처음 체코어 과외 선생님으로 관계를 가졌다가 한국인에게 호의적이고 밝은 성격으로 좋은 관계가 되었다. 체코어 할 줄 모르는 친구를 둔 탓에 귀찮을 만한 일들을 많이 도맡아 해결해 줬다. 이 친구 덕분에 '도움'이라는 개념이 명확히 머릿속에서 정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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