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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lly JP May 22. 2021

호안재에서

공간이 주는 사유, 여유

나에게 사유의 시간을 선물해준 건, 책보다 음악이 먼저였다. 국민학교 시절, 적당한 양의 책을 읽었지만재미있어서 읽은 것이 대부분이었고, 상상과 간접경험의 빈 공간을 채우는 것이 그 시기 책의 역할이었다, 중학교 이후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음악을 찾아 듣게 되었다. 특이하게도 나는 가요나 팝 음악보다 가벼운 피아노 곡이나 성악을 들으며 내 감정을 탐색하고, 표출했다. 정경화 소품집, 조수미 소품집(팝송 등 가벼운 음악을 성악으로 연주), 피터와 늑대, 짐노페디 등이 내 청소년기를 대표하는 곡들이고, 반항심이 끓어오를 때에는 베토벤의 비창을 온 힘을 다해 치거나 쇼팽의 곡들을 감성충만하게 쳤던 기억이 난다. 그 시기 SNS가 없어서 천만다행이다.


그 이후 음악 취향은 계속 변화해왔지만 음악이 내게 사유를 선사하고, 사유가 다시 음악으로 이어지는 세월을 지내왔다.


2019년경, 내 사유의 시간은 한 계단을 올라서게 되었는데 그것은 음악에 '달리기'가 더해진 형태였다. 1시간 정도 5마일을 뛸 수 있는 여유가 주어졌을 때, 가벼운 옷차림에 이어폰을 꽂고 달렸다. 어떻게 달리는 게 맞는 건지 모르는 상태로, 그저 상체를 앞으로 숙여서는 오랜 시간 뛸 수 없다는 경험 하나만 붙들고. 걷는 것보다 조금 빠른 속도로 뛰었다. 캠퍼 스니커즈를 신고 뛰다가 나이키 러닝화를 사서 신었을 때, 마치 구름 위를 나는 듯한 느낌을 난생 처음으로 느꼈는데 아직도 그 때의 깨달음이 생생하다. 그렇게 뛰면서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실컷 듣고, 햇살, 나무, 연못, 사람들을 마음껏 구경하고, 그 순간에 대해 생각해보고, 내가 원하는 것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았다. 심장뛰는 걸 느끼고 내 숨소리에 집중했다. 내가 그 사회의 구성원이 된듯한 느낌은 달리기의 만족감을 더해 주었다.


한국에 돌아온 후, 생활환경, 사고방식 등 내가 생활하는 공간이 나에게 미치는 영향이 굉장히 크다는 걸 더 크게 느끼게 되었다. 여러 상황상 적어도 '당장' 한국을 떠나는 것은 어렵겠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고백하자면, 코로나 상황이 오히려 '갈 수 있는데도 현실적인 문제때문에 못 가는 게 아니라, 갈 수가 없는 상황이다'라는 이유를 제공해주면서 안도감을 준 측면도 있다. 제한된 결론 하에, 일단 내게 영향을 미치는 사람들, 내가 사는 공간에라도 변화를 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만났을 때 기분 좋은 사람들, 틀에 얽매이지 않은 친구들이 더욱 소중하게 느껴졌다. 만연한 쳇바퀴 안에서의 피곤함을 공유하기보다 꿈이라고 하기에는 이제 거창하게 느껴지지만 아직 붙들고 있는 '내 삶'에 있어 추구하는 것, 희망하는 것을 말하고 들으며 공유하고 지키고 싶은 마음이 컸다. 


하지만 공간을 바꾸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다. 돈이 들고, 버려야 할 것도 많고, 정리를 해야 하는데 나는 일단 정리에 능력이 없다. 그 외에 가족 모두의 생활반경 등 고려할 것이 많다. 인테리어를 바꾸는 것조차 많은 에너지가 들어 엄두를 못 내고, 지금 지내는 평범하고 약간 낡은 인테리어와 낙서묻은 가구들의 좋은 점, 허세없는 편안함 등을 끌어다 합리화하면서 내가 바라는 모던하면서 세련되고 따뜻한 공간은 미래의 것으로 미루어왔다.


한옥에 살고싶다고 생각하면서도, 현실적인 문제들(벌레들을 어떻게 치우지? 보수 공사는 어떻게 하지? 몇 년이나 유지될까?)과 한 번도 경험해보지 않은 데서 오는 막연함을 넘을만한 절실함이 부족하여, 현실은 TV에서 하는 한옥탐방 프로그램이나 가끔 기웃거리는 게 전부였다. 마당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실상 주말농장을 인터넷으로 찾아보다가 그마저 '차 타고 가야하는 곳이면 멀어서 안 가게 되겠지' 하면서 쿠팡에서 큼지막한 화분 두 개를 주문해서 허브와 쌈야채 씨앗을 뿌려두고 Green이 주는 평안함을 최대한 찾아 누리려 하는 게 전부였다.


석가탄신일을 맞아 이번에도 이틀 휴가를 내고 수요일~일요일까지 이어지는 휴가 계획을 짰다. 늘 홍콩이나 도쿄로 여행을 다니던 기간이지만, 올해는 강릉. 씨마크호텔에 있는 웬만한 객실에 모두 묵어본 것 같은 상황에서, 호텔에 전화해서 호안재 객실이 있는지 물어보았는데 예약가능한 일자가 2박 있어서 4박5일 일정 중 2박은 호안재, 나머지 2박은 일반 호텔객실로 예약을 했다. 석가탄신일 전 날에는 업무 마무리할 것도 있고 아버지 병원진료 일정도 있어서 심신이 지친 상태였다. 수요일에 일어나서 짐을 챙기고 차를 운전해서 강릉으로 와서도, 겨우 저녁을 먹고 거의 잠만 잘 정도로 지쳐 있었다. 목요일에 잠깐 양양에 다녀왔다가 호안재로 옮겼지만 심지어 저녁을 먹으러 나갈 기운도 없어서 저녁은 룸서비스, 금요일 아침도 방에서 도시락으로 식사를 마치고 계속 자다가 점심도 룸서비스 후 낮잠. 


이제 금요일에서 토요일로 넘어가는 새벽 1시인데, 이제까지 강릉에 와서 채운 잠보다도 이 공간이 아주 오랜만에 '내가 가고 있는 방향에 대해 사유할 에너지'를 주었다는 생각이 든다. 땅이랑 맞닿아있는 공간이라 그런지, 앞에 마당이 펼쳐져 있어서 그런지, 본연의 것으로 아주 약간 치유되는 느낌이 든다.


5년 뒤 내 커리어 모습은 어떠면 좋을까, 언제쯤 한국을 벗어나 살 수 있을까, 아이들에게 어떤 선택이 좋은 것일까. 언제쯤 아파트를 벗어날 수 있을까, 내가 일을 하는 한 아파트를 벗어나기는 힘들겠지? 바쁘게 사는 와중에 아이들의 등하교 등등은 모두 '이모님'에게 맡기는 상황일테니... 답은 없고 결단이 요구되는 사유의 조각들이 계속 순환한다. 


가끔씩 생각한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 시간이 현실인 것 맞는지. 정말 인생은 한 번 뿐이고 다시 태어난다는 것은 없는 것인지. 세상은 넓은데 나는 무엇을 붙들고 아직도 치열하게 살고 있는 것인지. 이렇게 치열하게 살았을 때 나중에 후회가 없을 것인지, 지금 내려놓고 눈귀 다 닫고 베짱이처럼(?) 소박하게 산다면 나중에 노후가 되었을 때 정말 후회할 것인지... 아이들은 어떤 상황에서 더 감사할 것인지. 


어쩌면 이 모든 것이 정말 배부른 생각들이다.


겸손, 감사, 기도드리는 것을 잊지 말고 아이들과도 공유하자... 그게 전부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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